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 원인(Ursache)과 근거(Grund)

 

1. 들어가는 말

근거에 대한 탐구는 철학이라는 학문의 근본적인 특징을 이룬다. 근거는 정당화 및 권리의 문제로서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진, 선, 미등의 가치의 문제를 다룬다. 특히 단순히 사실이 아니라 사실의 참의 가능성을 다루는 철학에 있어서는 근거의 탐구는 철학을 다른 학문과 구별시켜주는 규범의 학으로 만들어 주는 토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절대적 근거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모든 학문의 여왕 간주하는 자기 과시가 있어왔다. 그러나 모두가 그 절대적 근거를 탐구하기에만 급급했지 '근거를 탐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그말이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우리는 근거에 대한 탐구가 왜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비유를 플라톤 대화편 {국가}의 제 6권에 나오는 유명한 동굴의 비유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땅밑의 동굴에 사는 죄수들이 있다. 이들은 발과 목이 묶여 있어서 움직일 수도 뒤로 돌아볼 수도 없다. 그런데 그들의 뒤쪽에는 커다란 불빛이 하나있고(태양이라고 해도 좋다) 그들과 그 불빛 사이에 뚝과 같은 길이 하나 가로지로고 있고 그 위로 나무나 돌 등의 온갖 실물들이 지나다닌다. 그러나 그 죄수들은 뒤를 돌아볼 수가 없기에 다만 그들의 정면 동굴의 벽에 비친 그림자밖에 볼 수가 없다. 그리고 그 그림자가 비치는 곳에서 사람의 말소리나 다른 소리가 울려나온다고 한다면 그 죄수들은 그 그림자가 말을 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 그림자가 진짜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 동굴의 비유는 우리의 경험에 의해 보이는 것을 거부하고 이들이 조금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사태의 본래 근거를 태양 앞에 마주섬으로서 제대로 볼 것을 요구한다. 비록 처음에는 눈이 부시고 아프더라도 참고 견디어서 사태의 본래적인 절대적 근거를 찾아서 알아낼 때까지 절대 멈추지 말도록 우리를 다그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비유에서 다음의 두가지 측면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 그림자와 죄수의 뒤에 있는 실물과의 관계이다. 이 비유만 본다면 그림자는 실물의 모습을 어느정도 대변하고 있고 따라서 실물, 즉 사태의 궁극적인 근거가 알려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이는 이 비유가 가지는 두번째 유의점과 관계한다.

둘째, 위의 기대가 가능한 것은 바로 그 죄수가(어쩌면 우리 인간 모두가) 보는 그림자가 가능할 수 있는 근거를 두가지로 즉 태양과 실물들로 나누어 놓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림자와 태양, 그림자와 실물의 관계를 유념해야 한다. 그림자와 실물 사이에는 실물이 그림자의 근거라고 하는 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림자와 태양 사이에는 그러한 근거의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림자의 근거는 실물이지 태양이 아니다. 태양을 아무리 자세히 살펴보아도 우리는 그 그림자가 지니는 실제의 진상을 알수는 없다. 태양은 다만 그림자의 원인일 뿐이다.

위의 비유에는 이미 원인과 근거가 분리된 채 놓여있다. 이러한 분리는 우리에게 그림자로 주어지는 사태의 참된 근거, 틀릴 수 없는 근거를 찾을 수 있으며 또 우리는 그것을 찾을때까지 절대 멈추지 말고 안주하지도 말것을 강요한다. 그리고 이것만이 사태의 진상을 보는 유일한 길이며 가장 옳바른 길이라고 강요한다. 근거율이 모순율, 동일율과 비슷한 위상에서 거론되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라 할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은 것 같다. 우선 위의 비유에서 보는 것처럼 원인근거가 그렇게 분리되어 있고 분리되어 주어져 있을 수 있을 만큼 사태가 그렇게 인간이라는 죄수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것 같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분리가 인간의 본래적 상황을 호도하고 왜곡시켜서 도리어 사태의 진상을 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닐까? 철학자들이 오만하게 지녀왔던 근거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사태의 본모습을 못보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근거에 대한 집착은 근거가 아닌 것, 즉 원인에 해당되는 것도 근거라고 우기게 되는 우를 범하게 한다. 원인과 근거가 그렇게 절대적으로 분리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원인을 근거라고 우기는 일도 있어서는 안된다. 근거는 인식론적 기반위에 있는 것 같고 원인은 존재론적 기반위에 있는 것 같다. 이 둘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역설적이게도 근거와 원인을 분리시켜놓은 비유가 무엇이 근거이고 무엇이 원인인지그리고 이둘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들고, 이들에 대한 겸손한 태도가 오히려 원인과 근거에 대해 제대로 보게 만든다.

근거에 대한 집착은 두가지 형태로 전개된다. 첫째는 우리가 알수 있는 근거를 찾을 때까지 절대로 멈추지 않으려는 태도이고 둘째는 근거가 아니고 원인에 해당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근거가 없으므로 이것을 근거로 삼아버리려는 태도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바로 이 두가지를 모두 비판한다. {확실성에 관하여}에 나오는 '근거'와 관련된 귀절을 중심으로 비트겐슈타인이 이들에 대한 비판을 어떻게 전개하는지를 각각 살펴보고 비트겐슈타인의 기본입장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2. 앎과 근거

우리가 어떤 사태의 근거, 그리고 그 근거의 근거를 캐물어 들어가서 궁극적 근거에 도달한다고 할때 그 근거는 자명한 것으로 알려지든가 그 근거는 말해질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알려지지 않든가 말해질 수 없다면 그것은 근거라고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여기서 회의주의가 귀결된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양자 택일 밖에 없다. 근거가 찾아지든가 아니면 회의주의에 빠지든가. 이것은 근거를 인식론적으로 정초하려는 모든 입장이 빠질 수 밖에 없는 귀결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무어처럼 "나는 내 손이 있음을 안다"라는 것이 틀릴 수 없는 자명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내 손이 있음을 입증하거나 아니면 러셀처럼,

무어가 자기는 지구가...존재해 왔음을 안다고 말하다면, 우리 대부분은 그것이 그동한 존재해 왔다는 점에서 그의 말이 옳다고 할 것이며, 자기가 그점을 확신하고 있다는 그의 말도 또한 믿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확신에 대해 올바른 근거도 가지고 있는가?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어쨋든 그는 그걸 아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91)

라고 주장함으로써 무어의 앎 자체를 또다시 문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서로 꼬리를 무는 반박을 끝이 없는 악순환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모두 근거에 눈이 멀어 우리의 말놀이의 본질적인 구조를 제대로 보지 못한 탓에, '안다'라는 말이나 '근거'라는 말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잘못이다. 우리가 '안다'는 말은 '근거'란 말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나는 그것을 안다"는 종종 이런 뜻을 지닌다: 나는 나의 진술에 대해 올바른 <근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만일 다른 사람이 언어 놀이를 숙지하고 있다면, 그는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가 언어놀이를 숙지하고 있다면 그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것을 알 수 있는지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18)

이러이러한 곳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나는 안다고 단언하는 것은 -- 내가 그걸 아는 위치에 있음을 (다른사람에게) 납득시켜주는 근거들 없이 진술하는 것은 -- 충분하지 못할 것이다.(438)

우리가 안다는 말을 쓸때는 우리가 근거를 댈 수 있을 때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자명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근거를 대지 않는다. "이렇다"라고 말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근거를 대야 할 상황은 가령 대화 상대자끼리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이다. 그러나 의견이 일치하는지 하지 않은지를 알려면 먼저 서로간에 일치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서로 대화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바로 우리의 말놀이의 본질적인 구조가 드러난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의심의 대상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마치 데까르트가 한 것처럼. 그러나 의심을 위해서는 근거들이 필요하다(122) 의심을 위해서는 의심하지 않은 무엇이 밑받침되어 있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일제히 한꺼번에 의심할 수는 없다. 의심에는 의심의 크기만큼 또한 자명한 무엇이 이미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우리의 모든 말놀이가 그러하다. 즉 우리의 말놀이를 이루는 본질적인 구조에는 의심할 근거를 발견하지 못하는(결여되어 있는) 그러한 부분이 있다. 물론 '바로 이 부분이다'라고 꼬집어 지적할 수 있는 그런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꼬집어 지적해낼 수가 없다. 그것은 우리가 더이상 파고 들어갈 수 없는 부분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문법적 명제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이것은 강물이 흐르기 위한 강바닥(Flussbett)이다.(97) 물론 흐르는 것과 흐르지 않는 것이 명시적으로 구분되어 있거나 구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구조는 언제나 유지된다. 이러한 문법적 명제에 대한 서술은 이를테면 그 문법적 명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말놀이 속에서 작동하는 언어로 서술하는 것이 될 것이므로 이는 자기가 눈을 통해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자기 눈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같아서 언어의 사용이 혼란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문법적 명제에 대해서 서술할때는 언어의 사용을 극히 조심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미한 말을, 파리통에 빠져버린 말을 하게 된다.

이러한 문법적(논리적) 명제에 대해 우리는 '안다'라는 말을 사용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안다'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으려면 그것에 대해 근거를 댈 수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근거를 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너무나 잘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안다'고 말하지 않는다.

만일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그러나 그것은 인가?"하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에게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가 근거들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나는 당신에게 아무 근거도 댈 수 없지만, 당신도 더 배운다면 같은 의견이 될 것이다." 하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가 예컨대 역사를 배울 수 없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207)

그런데 여기서 이상스러운 것은, 그 낱말들의 쓰임새를 내가 전적으로 확신하고 거기에 관해 아무 의심도 갖지 않지만, 그리고 나는 나의 행동방식에 대해 아무른 근거들을 댈 수 없다는 점이다. 만일 내가 시도한다면 나는 1,000개라도 줄 수 있겠지만, 그것들이 근거지워야 할 바로 그것만큼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줄 수 없을 것이다.(307)

그런데 이 근거를 댈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마찬가지로 의심을 할 어떤 근거도 가지지 못한다. 우리는 특정 근거들 위에서 의심한다.(458) 따라서 근거가 없는 곳에서는 의심도, '안다'란 말도 못한다. 의심이나 오류나 '안다'라는 말 등은 모두 이처럼 강바닥에 있는 명제들이 아니라 이것에 기반하여 흐르고 있는 명제들에 대해서는 가능한 것이다.

근거에는 끝이 있다. 정당화에 끝이 있듯이(192). "근거지워진 믿음의 근거에는 근거지워지지 않은 믿음이 놓여 있다."(253) 비트겐슈타인의 다음의 말은 근거에 대한 인식적 추구가 어디서 잘못되었는지를 분명하게 밝혀준다.

무엇이 그것에 대한 검사로서 간주되는가? -- "그러나 이것은 충분한 검사인가?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볼때 그것은 그런 것으로서 <인식되어야> 하지 않을까?" -- 마치 근거지움이 결코 끝이 나지 않을 것처럼. 그러나 그 끝은 근거지워지지 않은 전제가 아니라 근거지워지지 않은 행동방식이다.(110)

그러나 근거지움, 즉 증거의 정당화는 끝에 이르게 된다; - 그 끝은 그러나 우리에게 어떤 명제들이 직접 참이라고 분명해지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 끝은 일종의 보는 (Sehen) 아니다; 그 끝은 오히려 언어놀이의 근저에 놓여 있는 우리의 행동이다.(204)

나는 내가 타자와 '싸우게' 될 거라고 하였다. -- 그러나 나는 도대체 그에게 근거들을 주지는 못할 것인가? 물론 줄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어디까지 가겠는가? 근거들의 끝에는 설득이 있다.(선교사들이 원주민을 개종시킬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생각해 보라.)(612)

우리가 추구하는 근거의 끝에도 여전히 앎이 개입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위의 인용은 일침을 놓는다. 그 끝은 전제도 우리가 보는 것(Sehen)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동방식이고 설득이다.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우리는 반드시 회의주의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 바탕이 무엇인지 몰라도 '의심이 불가능한' 토대 위에 서있을 수 있다. 우리의 말놀이의 본질을 통찰하기만 하면 우리는 근거가 어디에서만 작동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근거의 끝에 있는 행동방식은 근거가 아니다. 근거지워지지 않은 것이다. 근거는 물론 성립한다. 그러나 그것이 성립하는 영역은 제한되어 있다. 행동방식을 근거로 해석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절대적 근거를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근거집착증'에 걸려있다. 다음절에서 우리는 이런 유형에 대해 살펴 볼 것이다.

3. 원인과 근거

앞에서 우리는 원인과 근거의 차이를 동굴의 비유를 통해서 살펴보았다. 근거에 대한 집착이 지니는 또 하나의 병폐는 바로 원인을 근거로 끌어들인다는 점이다. 근거로 끌여들여지는 원인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경험이고 또하나는 실용성, 적합성이다.

(1) 경험주의

경험이라는 말은 그렇게 단순한 말이 아니다. 단순히 감각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러셀이 말하는 감각질과 같은 것이 아니다. '봄'(seeing)을 예로 들어보자. '봄'은 단순히 시각상의 자극이 아니다. 볼 때 우리는 항상 무엇으로 본다. 이미 봄이라는 작용 속에 규칙이 개입되어 있다. 즉 우리의 말놀이가 개입되어 있다. 보다 엄밀히 말해서 봄은 우리의 말놀이의 일부이다. 우리의 말놀이와 떨어져서 따로 독자적인 영역을 가지는 인식의 원천이 될 수 없다. 말놀이 속에 있는 봄, 바로 이것이 봄이라는 경험의 더이상 분석될 수 없는 가장 원초적인 경험양태이다. 따라서 이것은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원인은 될 수 있어도 근거는 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판단하도록, 즉 그렇게 판단하는게 옳다고 가르쳐 주는 것은 경험이 아닐까? 그러나 어떻게 경험이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는가? 우리가 그것을 경험으로부터 끄집에 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경험은 경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끄집어내라고 우리에게 충고하지 않는다. 경험이 우리가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 - 단순히 원인이 아니라 - 라면, 우리는 이것을 근거라고 간주할 근거를 다시 또 가지지 않는다.

아니다. 경험은 우리의 판단놀이를 위한 근거(Grund)가 아니다.그리고 그 놀이의 두드러진 성과(Erfolg)도 또한 아니다.(130-131)

나는 어떤 근거를 가지길래, 내가 내 발가락들을 보지 않고 있는 지금 내발이 다섯 발가락을 지니고 있다고 가정하는가?
이전의 나의 경험이 나에게 항상 그렇게 가르쳐 주었다는 게 근거라고 말하는 것은 옳은가? 내가 열개의 발가락을 가지고 있다는 것보다 이전의 경험이 나에게 더 확실한가?
이전의 경험은 물론 내 확신의 원인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근거인가?(429)

경험은 원인일 뿐이다. 경험을 근거로 간주하는 것은 근거에 대한 집착이 불러일으킨 경험에 대한 과대분석과 평가이다. 이것은 바로 순수감각소여로서의 경험이 다른 것과 어떤 형태로든 분리될 수 있고 그것이 인식의 원천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2) 실용주의

경험도 이성도 근거로서 무너진 곳에 등장할 수 있는 것으로 말놀이라는 하나의 체계를 떠받치는 것으로 실용성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의 관점에서 다른 관점으로 넘어감에 있어서 '단순성', '균형성', '실용성' 등에 의해서 좌우되는 일이 있다. 물론 우리의 판단들이 그것에 의해 좌우된다. 그러나 이것이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이 놀이는 제 값을 한다는 게 입증된다. 이는 그 놀이가 행해지는 원인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근거는 아니다.(474)

어떤 것에 대한 설득력 있는 근거들이 무엇이냐는 내가 결정하지 않는다.(271)

근거에 대한 결정은 내가 하는 것도 이성이 하는 것도 적합성이나 실용성이 하는 것도 아니다. 적합성, 실용성도 물론 하나의 원인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비트겐슈타인이 여러차례 언급하는 바, 변화하는 말놀이의 근거로 삼아서 비트겐슈타인을 상대주의, 규약주의(conventionalism)로 해석하는 성급함은 피해야 한다. 규약주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그의 주장에 주관의 색채가 미약하기 때문이다.

4. 맺는말

사태의 설명에 있어서 사람들은 원인에 대한 설명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사태의 원인을 캐묻는 과학이 이렇게 발전하였으도 아직도 종교적 광신과 정신적 불안이 팽배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가 사태를 원인으로만 설명하려고 하는 아낙사고라스에게 깊은 실망을 맛보았다면서 원인이 아니라 최선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이유에 의한 설명이 보다 참된 설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이 이유의 의한 설명, 즉 근거를 제시하고자 하는 노력이 모종의 한계내에서만 의미가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단순히 원인과 결과의 계열 속에 우리가 던져져서 붕 떠 있음을 보면 우리는 불안감을 느낀다. 이런 불안의 소치로 우리는 막무가내로 이유와 근거를 찾아서 자기 자신을 고정시키고 싶어진다. 바로 이런 유혹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 경험주의든 이성주의든 실용주의든 모두 이런 집착증에 기반해 있다. 바로 이것을 비트겐슈타인은 경고하고 싶었던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려운 일은 우리 믿음의 무근거성을 통찰하는 일이다."(166)

"당신은 언어놀이란 말하자면 미리 볼 수 없는 어떤 것(Etwas Unvorhersehbares)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내 말 뜻은, 그것은 근거지워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성적(또는 비이성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거기에 있다(Es steht da) -- 우리의 삶과도 같이."(559)

 

참고: '근거'와 관련한 구절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노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과 같이 말하고 있다:"나는 나의 노트들을 읽는 것이 어떤 철학자들에게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에겐는 흥미있을 수도 있으리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내가 비록 드물게만 과녁을 맞혔다고 하더라도, 그는 어쨌든 내가 어떠한 목표를 향해서 끊임없이 쏘아댔는지를 인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387)

아래에 '근거'와 관련된 구절을 모두 {확실성에 관하여}에서 뽑아내 보았다. 이를 통해 '근거'에 관해 비트겐슈타인이 어디로 끊임없이 쏘아대었는지를 알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면서.

4."나는 내가 인간임을 안다." 이 명제의 뜻이 얼마나 불명료한지를 알려면, 그 부정을 고찰해보라. 맨처음에 그것은 이렇게 파악될 수도 있을 것이다:"나는 내가 인간의 기관들을 가지고 있음을 안다."(예를들어, 도대체 아직 아무도 본적이 없을 터인 뇌) 그러나 "나는 내가 뇌를 가지고 있음을 안다"와 같은 명제는 어떠한가? 나는 그것을 의심할 수 있는가? 의심을 할 <근거>가 나에겐 결여되어 있다! 모든 것이 그것을 옹호하는 편에서 말해주고 있으며 아무것도 그 반대를 말해주고 있지를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술해보면 나의 두개골이 텅 빈 것으로 드러나리라는 상상은 가능하다.

18. "나는 그것을 안다"는 종종 이런 뜻을 지닌다: 나는 나의 진술에 대해 올바른 <근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만일 다른 사람이 언어 놀이를 숙지하고 있다면, 그는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가 언어놀이를 숙지하고 있다면 그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것을 알 수 있는지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74.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즉 오류는 원인 뿐만 아니라 <근거>도 가지고 있다고. 즉 대충말해서: 오류는 오류를 범하는 자의 올바른 지식안에 정돈해 넣을 수 있다.

91. 무어가 자기는 지구가...존재해 왔음을 안다고 말하다면, 우리 대부분은 그것이 그동한 존재해 왔다는 점에서 그의 말이 옳다고 할 것이며, 자기가 그 점을 확신하고 있다는 그의 말도 또한 믿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확신에 대해 올바른 근거도 가지고 있는가?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어쨌든 그는 그걸 아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러셀)

92. 그러나 우리는 물을 수 있다:"지구가 ...가령 그의 출생이후부터 비로소 존재했다고 믿을 설득력있는 근거를 가질 수 있는가?" -- 그가 항상 그렇게 들어왔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그것을 의심할 좋은 근거를 가지는 걸까? <생략> 때때로 우리가 어떤 관점의 올바름을 그 단순성 또는 균형성에 의해서 바라보게 된다는 것, 즉 이 관점으로 넘어오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이때 우리는 대개 단적으로 말한다: "그게 틀림없다"(So muss es sein)

107. 이는 우리가 아이에게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또는 하느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칠 수 있으며, 또 아이는 전자 또는 후자에 대해 설득력 있어 보이는 <근거>들을 사정에 맞춰 제공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지 않을까?

110. 무엇이 그것에 대한 검사로서 간주되는가? -- "그러나 이것은 충분한 검사인가?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볼때 그것은 그런 것으로서 인식되어야 하지 않을까?" -- 마치 근거지움이 결코 끝이 나지 않을 것처럼. 그러나 그 끝은 근거지워지지 않은 전제가 아니라 근거지워지지 않은 행동방식이다.

111. "나는 내가 달에 전혀 가 본적이 없다는 것을 안다." -- 사실적 상황들 속에서 이 말이 주는 느낌은 많은 사람들이 (몇몇은 자신도 모르는 채로) 달에 가본적이 있는 경우 줄 느낌과는 전혀 다르다. 이 후자의 경우 우리는 그 앎에 대한 <근거>들을 제시할 수 있으리라. 여기에는 곱셈의 일반규칙과 실제 수행된 어떤 곱셈들 사이에서와 비슷한 관계가 있지 않을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내가 달에 가본적이 없다는 점은 그 점에 대한 그 어떤 <근거지움>이 확고할 수 있는 그만큼 나에게 확고하다.

122. 의심을 위해선 <근거>들이 필요하지 않은가?

123. 내가 바라보는 곳에서, 나는 ... 라는 점을 의심할 <근거>를 발견하지 못한다.

130.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판단하도록, 즉 그렇게 판단하는게 옳다고 가르쳐 주는 것은 경험이 아닐까? 그러나 어떻게 경험이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는가? 우리가 그것을 경험으로부터 끄집에 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경험은 경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끄집어내라고 우리에게 충고하지 않는다. 경험이 우리가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 - 단순히 원인이 아니라 - 라면, 우리는 이것을 근거라고 간주할 근거를 다시 또 가지지 않는다.

131. 아니다. 경험은 우리의 판단놀이를 위한 근거(Grund)가 아니다.그리고 그 놀이의 두드러진 성과(Erfolg)도 또한 아니다.

166. 어려운 일은 우리 믿음의 무근거성을 통찰하는 것이다.

171. 무어가 자기는 결코 달에 가본적이 없다고 가정하는 주된 근거는, 아무도 달에 가본적이 없고 또 갈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는 우리가 배운바에 근거해서 믿는다.

173. 내가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이, 또는 무엇을 내가 흔들림없이 믿느냐 하는 것이, 도대체 나의 능력안에 놓여 있는가?
나는 저기에 의자가 놓여 있다고 믿는다. 내가 오류를 범할 수는 없는가? 그러나 나는 내가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는가? 심지어, 그것을 어떻게든 고려 대상에 넣을 수 있는가? -- 그리고 내가 나중에 무엇을 경험하든, 나는 나의 믿음을 또한 고수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때 나의 믿음은 근거지워져 있는가?

200. "명제는 참 또는 거짓이다."는 본래, 명제에 대한 찬반 결정이 가능해야 한다는 점을 뜻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러한 결정을 위한 근거가 어떤 것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204. 그러나 근거지움, 즉 증거의 정당화는 끝에 이르게 된다; - 그 끝은 그러나 우리에게 어떤 명제들이 직접 참이라고 분명해지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 끝은 일종의 보는 (Sehen) 아니다; 그 끝은 오히려 언어놀이의 근저에 놓여 있는 우리의 행동이다.

205. 참이 근거지워진 것이라면, 근거는 도 아니며 거짓도 아니다.

206. 만일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그러나 그것은 인가?"하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에게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가 근거들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나는 당신에게 아무 근거도 댈 수 없지만, 당신도 더 배운다면 같은 의견이 될 것이다." 하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가 예컨데 역사를 배울 수 없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역사를 배우고 있다;역자주)

253. 근거지워진 믿음의 근거에는 근거지워지지 않은 믿음이 놓여있다.

264. 나는 무어가 미개한 종족에 붙잡히고, 이 사람들은 그가 지구와 달 사이 그 어딘가로부터 왔을 거라는 의혹을 말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무어는 그들에게 자기는 ...을 안다고 말하지만, 그들에게 자신의 확신에 대한 근거들을 줄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의 飛行能力에 관해 환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고, 물리학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저 진술을 하는 한 경우일 것이다.

270. "나는 나의 확신에 대해 강력한 근거들을 가지고 있다" 이 근거들이 그 확신을 객관적으로 만든다.

271. 어떤 것에 대한 설득력 있는 근거들이 무엇이냐는 내가 결정하지 않는다.

275. 경험이 우리의 이런 확실성의 근거라면, 그것은 당연히 과거의 경험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령 단지 나의 경험이 아니라, 나에게 지식이 있게 해준 다른 사람들의 경험이다.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믿도록 하는 것은 다시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험이 나로 하여금 해부학 및 생리학 책들이 거짓된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고 믿도록 만드는가? 이 신뢰도 역시 나 자신의 경험에 의해 뒷받침된다는 점은 분명 참이다.

281.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내 친구의 몸 속이나 머리 속에 톱밥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 내가 비록 그것에 대해 직접적인 감각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 믿는다. 확신한다. 나는 내가 들은 것과 내가 읽은 것과 나의 경험에 근거해서 확신한다. 거기에 대해 의심한다는 것은 나에겐 - 물론 다시 다른 사람들과 일치하여서 - 미친 짓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일치한다.

282. 나는 내가 고양이들은 나무에서 자라지 않는다는 견해나, 나에게는 아버지 한 분과 어머니 한분이 있었다는 견해에 대해 좋은 근거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그것에 대해 의심한다면, - 그런 일은 어떻게 일어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는 자기에게 부모가 있었다는 것을 처음부터 결코 믿어 본 적이 없다고 하면 될까? 그러나 사람들이 그에게 이것을 가르쳐 준적이 없다면, 그것은 도대체 생각될 수나 있는 걸까?

288. 나는 지구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는 것 뿐만 아니라, 지구는 하나의 커다란 물체라는 것,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는 많은 선조들이 있는 걸로 확정되어 있다는 것, 그 모든 것에 관한 책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런 책들이 거짓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 등등도 역시 안다. 그런데 나는 그 모두를 아는가? 나는 그렇게 믿는다. 이 앎의 덩어리는 나에게 전승되어졌으며, 나는 그걸 의심할 아무 근거로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가지가지의 확증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왜 나는 그 모든 것을 내가 안다고 말해서는 안되는가? 우리는 바로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그러나 단지 나만 그 모든 걸 알거나 믿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아니 오히려, 나는 그들이 그것을 믿는다고 믿는다.

307. 그런데 여기서 이상스러운 것은, 그 낱말들의 쓰임새를 내가 전적으로 확신하고 거기에 관해 아무 의심도 갖지 않지만, 그리고 나는 나의 행동방식에 대해 아무른 근거들을 댈 수 없다는 점이다. 만일 내가 시도한다면 나는 1,000개라도 줄수 있겠지만, 그것들이 근거지워야 할 바로 그것만큼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줄 수 없을 것이다.

322. 인간이 기억해 낼 수 있는 한 이 산은 항상 거기에 서 있다는 걸 학생이 믿으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가 이 불신에 대해 전혀 아무런 근거를 가지지 않고 있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323. 따라서 이성적인 불신은 근거를 가져야만 하는가?
우리는 또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으리라: "이성적인 사람은 이를 믿는다."

333. 누군가에게 나는 묻는다: "당신은 일찌기 중국에 가 본 적이 있습니까?" 그는 대답한다:"모르겠습니다." 이때 우리는 분명 말할 것이다. "그걸 알지 못한다고요? 당신은 당신이 아마도 언젠가 거기 가본적이 있다고 믿을 그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까? 또는 당신이 뱃속에 있을때 당신 부모가 마침 거기에 간 적이 있습니까?" --- 정상적인 유럽인들은 자기들이 중국에 가 본적이 있는지 없는지를 안다.

336. 그러나 사람들에게 무엇이 이성적으로, 또는 비이성적으로 보이느냐는 변한다. 다른 시대에는 비이성적으로 보인 어떤 것이 어떤 시대에는 이성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역도 성립한다.
그러나 여기에 객관적 징표는 없는가?
매우 명민하고 교양있는 사람들이 성경의 창조 설화를 믿는데 반해, 다른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실증적으로 거짓이라고 간주하며, 또 이들의 근거들은 저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373. 확신한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믿음에 대한 근거를 가진다는 것은 왜 가능해야 한단 말인가?

387. 사람들은 나에게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저기 그것이 나무라는 것; 당신이 주머니 속에 돈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이 당신의 발이라는 것을 당신은 얼마나 확신합니까?" 그리고 그 대답은, 어떤 한 경우에는 "확실하지 않다", 다른 경우에는 "확실한 거나 다름없다", 또 다른 경우엔 "나는 의심할 수 없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대답들은 아무런 근거들 없이도 역시 뜻을 지닐 것이다. 예컨데 나는 이렇게 말할 필요가 없다.: "내 눈이 충분히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것이 나무인지 확신할 수가 없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그것이 나무라는 걸 안다"고 무어가 말하는 것은 그로써 그가 어떤 전적으로 특정한 것을 말하고자 했다면 뜻을 지닐 것이다.

429. 나는 어떤 근거를 가지길래, 내가 내 발가락들을 보지 않고 있는 지금 내발이 다섯 발가락을 지니고 있다고 가정하는가?
이전의 나의 경험이 나에게 항상 그렇게 가르쳐 주었다는 게 근거라고 말하는 것은 옳은가? 내가 열개의 발가락을 가지고 있다는 것보다 이전의 경험이 나에게 더 확실한가?

이전의 경험은 물론 내 확신의 원인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근거인가?

438. 이러이러한 곳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나는 안다고 단언하는 것은 -- 내가 그걸 아는 위치에 있음을 (다른사람에게) 납득시켜주는 근거들 없이 진술하는 것은 -- 충분하지 못할 것이다.

458. 우리는 특정한 근거들 위에서 의심한다. 이것이 문제다: 언어놀이에 의심은 어떻게 도입되는가?

474. 이 놀이는 제 값을 한다는 게 입증된다. 이는 그 놀이가 행해지는 원인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근거는 아니다.

484.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나는 안다"고 말하고, 그 앎의 근거를 진술한다. 또는 우리는 어쨌든 그것을 진술할 수 있다.

499. 나는 또한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귀납법칙'은 경험 소재에 관한 어떤 특수 명제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근거지워질 수 없다.

516. 만일 나에게 내 이름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기 쉬운 어떤 것이 일어난다면 (예컨대 만일 누군가가 나에게 어떤 것을 말한다면), 이런 의심의 근거들 자체를 의심스럽게 만드는 어떤 것도 또한 확실히 존재할 터이며, 따라서 나는 나의 오랜 믿음들을 유지하는 쪽으로 결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559. 당신은 언어놀이란 말하자면 미리 볼 수 없는 어떤 것(Etwas Unvorhersehbares)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내 말 뜻은, 그것은 근거지워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성적(또는 비이성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거기에 있다(Es steht da) -- 우리의 삶과도 같이.

563. 비록 아무런 설득력 있는 근거도 제시할 수 없지만, 우리는 "나는 그가 고통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안다"고 말한다. -- 그것은 "나는 그가 ...하다고 확신한다"와 동일한 것인가? -- 아니다. "나는 확신한다"는 당신에게 주관적 확신을 준다. "나는 안다"는, 그걸 아는 나와 그걸 모르는 사람간에 이해의 차이가 놓여 있음을 뜻한다.(아마도 경험의 정도 차이에 근거한 이해의 차이)
만일 내가 "나는 안다"를 수학에서 말한다면, 거기에 대한 정당화는 증명이다.
만일 이 두 경우에, "나는 안다" 대신에 "당신은 그걸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 근거지움은 각 경우마다 종류가 다르다.
그리고 근거지움은 끝을 가진다.

574. 문제는, "나는 거기에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걸 안다"거나 "나는 거기에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어떤 종류의 명제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 "나는 안다"는 모든 근거들을 차단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걸 단지 그냥 안다. 그러나 여기서 어쨌든 오류에 대해 이야기가 될 수 있다면, 내가 그걸 아는지는 검사될 수 있어야만 한다.

599. 예컨대 우리는 물이 100도에서 끓는다는 명제의 확실함을 서술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예컨대, 내가 거명할 수도 있을 이러저러한 명제들처럼 내가 언젠가 들어 본적이 있는 명제가 아니다. 내 스스로가 학교에서 그 실험을 해보았다. 그 명제는 우리의 교과서들 속에서 매우 초보적인 것들이며, 우리의 교과서들은 ....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에서 신뢰될 수 있다. -- 그런데 우리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사람들이 확실하다고 간주해왔던 이러저러한 것이 나중에 (우리의 견해로는) 거짓으로 실증되었음을 보여주는 예들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논증은 가치가 없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근거들로 간주하는 그런 근거들만을 제시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아무것도 말해주는 바가 없다.
여기에는 우리 언어놀이의 본질에 관한 오해가 밑바닥에 깔려 있다고 나는 믿는다.

600. 나는 어떤 종류의 근거를 가지고 있길래 실험 물리학의 교과서들을 신뢰하는가?
나는 그것들을 차라리 신뢰하지 않을 아무런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신뢰한다. 나는 그러한 책들이 어떻게 성립되었는지 안다. -- 아니 오히려 그걸 안다고 믿는다. 나는 몇가지 증거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그리 충분하지는 않고 매우 단편적인 종류이다. 나는 여러가지를 들어왔고, 보아왔고 읽어왔다.

606. 내 견해로 볼 때 다른 사람이 오류를 범하였다는 것은 내가 지금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가정할 아무런 근거가 못된다. -- 그러나 그것은 내가 오류를 범할 있다고 가정할 근거는 되지 않을까? 그것은 나의 판단 또는 행동에서의 그 어떤 불확실함에 대한 아무 근거도 아니다.

608. 나의 행동에서 내가 물리학의 명제에 따르는 것은 잘못인가? 나는 그것에 대해 아무런 좋은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나는 말해야 할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좋은 근거'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609. 그것을 설득력 있는 근거로 간주하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가 만났다고 가정해보자. 자, 우리는 그걸 어떻게 상상하는가? 그들은 물리학자 대신에 가령 신탁에 물어본다.(그리고 그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원시적이라고 간주한다.) 그들이 신탁에 물어보고 거기에 따르는 것은 잘못인가? - 우리가 이것을 "잘못"이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이미 우리의 언어놀이를 출발점으로 삼고서 그들의 언어놀이와 싸우는 게 아닐까?

612. 나는 내가 타자와 '싸우게' 될 거라고 하였다. -- 그러나 나는 도대체 그에게 근거들을 주지는 못할 것인가? 물론 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어디까지 가겠는가? 근거들의 끝에는 설득이 있다.(선교사들이 원주민을 개종시킬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생각해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