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적 정신상태와 선험적 구조

 

1. 들어가는 말

마음에 대한 탐구를 시작함에 있어서 썰이 기본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의도는 그의 책 서문에 쓰여진 다음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이책을 관통하는 주제 중의 하나는 심리철학에서 말해지는 것들 중 어느 것이 <본디의(intrinsic) 것>이고 어느 것이 <관찰자 상관적인 것>인지를 분명히 하려는 것이다. 심리철학과 인지과학의 주도적인 흐름에 따르면, 계산(computation)은 세계의 본디의 특성이고 의식과 지향성은 관찰자 상관적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제거될 수 있거나 계산과 같은 보다 기본적인 어떤 것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나는 이러한 가정들이 꺼꾸로 되어 있음을 논증하겠다. 즉 의식과 지향성이 본디의 것이어서 제거될 수 없으며 오히려 의식적인 마음에 의해서 실제로 수행되는 것을 제외한 모든 계산이 관찰자 상관적이다.

썰에 따르면 <본디의 것>이란 말은 관찰자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이고, <관찰자 상관적>이란 말은 어떤 외부의 관찰자나 사용자에 관계해서만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예컨대 질량은 대상의 본디의 특성이고 욕조는 대상의 관찰자 상관적 특성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우리 모두가 죽어도 여전히 대상의 특성이지만 후자는 우리 모두가 죽으면 사라지는 특성이기 때문이다.

썰은 이러한 구분 기준을 가지고 우리가 보통 의식의 현상으로 간주하는 것들 중에서 어느 것이 대응하는 사실을 지닌 <본디의 것>인지를 밝혀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썰이 이런 구분을 무의식에 어떻게 적용하고 있으며, 이런 입장에 근거해서 인지과학의 작업들을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썰이 수행하는 인지이성비판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그의 비판이 그의 이론체계 내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지를 검토해 보겠다.

2. 썰의 기본적인 형이상학

2.1 이원론적 용어법의 폐기

썰은 전통적인 심리철학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기본적인 전제 하나를 비판한다. 즉 세계는 힘의 장 속에 있는 물리적 소립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분명한 물리학적 사실들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의식이 있으며 의식적 상태는 환원불가능한 현상학적 특성들을 가지고 있음도 인정할 수 있는데 전통적인 견해에서는 이 두 입장이 비정합적이라고 가정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견해가 일원론이든 이원론이든 상관없이 모두 이런 가정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들이 자명한 것으로 사용하는 어휘들이 이원론에 기반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썰의 지적이다. 즉 그들은 데카르트 이후 만연된 이분법적 용어법을 받아들인다. 정신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마음과 몸이라는 어휘가 전적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현상도 이 두 용어들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심리철학을 지배하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유물론도 마찬가지이다. 유물론은 일원론이면서도 이원론의 어휘는 버리지 못하고 있다. 유물론자들은 실재는 객관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마음도 객관적으로 연구해야 하며 또 연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생각의 저변에는 주관적인 의식에 대한 모종의 공포가 깔려 있다. 물론 이런 공포는 물질/의식, 주관/객관을 서로 양립불가능한 것으로 보는 데카르트적 양분법적 어휘를 자명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발생한다. 따라서 유물론자들이 이제는 더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주관적인 것들을 배제해 버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이분법적 용어법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종래의 일원론, 이원론 모두를 폐기하고 철저한 유물론자이면서도 정신적인 것들의 존재를 인정할 수가 있다. 즉 어떤 것이 물리적이라고 해서 정신적인 것이 아닌 것은 아니고 또 어떤 것이 정신적이라고 해서 물리적인 것이 아닌 것은 아니다. 이것을 우리는 신경생물학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다.

2.2 원자론과 진화론

뇌는 의식적인 정신상태와 같은 어떤 "정신적"인 현상을 만드는데, 이런 의식적인 상태는 뇌의 상위차원(high level) 또는 창발적인(emergent) 속성일 뿐이다. 이는 상온에서의 물의 액체성, 영하에서의 물의 고체성이 물분자들의 상위차원의 창발적 속성인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에서이다.

썰의 이런 설명은 두가지 기본적인 현대의 과학적인 세계관에 기반하고 있다. 그것은 원자론과 진화론적 생물학이다. 우주가 입자라는 매우 작은 물리적 현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원자론은 거시적 현상을 미시적인 현상의 인과적 특성과 행태를 통해 설명하고자 하는데 그 본질적 특성이 있다. 이런 원자론이 생물학에 적용된 형태가 바로 DNA유전학이다.

이 유전학과 진화론이 만나 나타나게 된 진화론적 생물학은 표현형과 인자형라는 개념을 통해 두가지 설명의 수준을 갖는다. 즉 표현형적 특질에 의존해 그것의 "적합성"의 측면에서 종의 생존을 설명하는 "기능적" 수준과 문제의 특질이 실제로 유기체를 환경에 관계시키는 인과적 기제를 설명하는 "인과적" 수준. 이를 결합하면 다음과 같다: 인자형과 환경간의 상호작용의 결과물인 표현형이 환경과 관련하여 생존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인자형이 생존하고 복제된다.

이런 설명방식에 기반하여 썰은 의식과 두뇌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진화과정의 산물인 유기체는 "세포"라는 하위체계로 구성되고 어떤 유기체들은 "신경체계"로 생각되는 신경세포의 하위체게를 발전시킨다. 나아가서 어떤 극도로 복잡한 신경체계는 의식적 상태와 과정을 야기하고 유지시킬 수 있다. 특히 신경세포의 커다란 집합인 두뇌가 그렇다. 우리는 어떻게 두뇌가 의식을 야기시키는지 상세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인간의 두뇌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우리의 세계관에서 기본적인 것은 인간과 다른 고등동물들도 다른 모든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생물학적 질서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이다. 인간은 자연의 나머지들과 연속선상에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이런 동물들에게 고유한 생물학적 특징들 - 그들이 의식의 풍부한 체계를 소유한다는 점, 그리고 그들의 높은 지능, 언어능력, 극도로 정밀한 지각력, 이성적 사고능력 등 - 은 다른 모든 생물학적 현상들과 마찬가지의 생물학적 현상이다. 더나아가 이런 특징들은 모두 표현형들로서 다른 모든 표현현들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적 진화의 결과물들이다. 의식은 인간과 특정 동물의 두뇌가 갖는 생물학적 특징의 하나이다. 의식은 신경생물학적 과정에 의해 야기되며, 광합성, 소화, 세포분열과 같은 다른 생물학적 특성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생물학적 질서의 일부분이다. ..... 일단 원자론과 진화론이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에 중심적인 것임을 알게되면, 의식은 자연히 고도로 발달된 신경체게를 지닌 특정 유형의 유기체가 갖는 진화된 표현형적 특질이라는 위치를 점하게 된다.

그렇다면 의식이라는 것이 지니는 진화론적 이점은 무엇일까? 이는 곧 의식이 어떠한 기능을 하느냐 하는 물음이다. 의식은 유기체와 자신의 환경 그리고 자신의 상태 사이의 모종의 관계를 조직화하는 데 기여한다. 그리고 이러한 조직화의 형식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표상"이라고 이름 부른다. 세계의 사태가 표상을 야기시키면서 의식의 지각이 이루어지고 의식적 표상이 세계의 사태를 야기키시면서 지향적 행위가 이루어진다. 의식은 무의식적 기제가 가질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분별력과 유연성을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의식이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진화론적 잇점들은 바로 유연성, 민감성, 창조성인 것이다. 이런 현상들을 유물론적 심리철학은 전혀 설명해주지 못한다.

3. 의식의 여러 특성

3.1 주관성

의식이 자연에서 차지하는 이런 위치에도 불구하고 의식은 의식 고유의 특별한 측면, 주관성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주관성은 인식적 양상이 아니라 존재론적 범주를 가리킨다. 예를들어 "지금 내 등 아래쪽이 아프다"라고 할때 이 진술은 실제의 사실이 존재하므로 참이고 또 관찰자의 자세, 태도, 생각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객관적이지만 현상 그 자체, 실제의 아픔 그 자체는 주관적 존재양상을 가진다. 아픔은 어떤 관찰자에게도 똑같이 접근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의 존재는 일인칭 존재이다. 나는 내가 지금 의식적이고 이 의식상태가 주관성을 가진다는 것을 알고 나와 같은 많은 다른 유기체들도 마찬가지로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의식상태를 가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언제나 바로 우리 눈앞에 있는 이 사실들이 왜 반직관적이고 어려운 것으로 보이는가? 그것은 바로 관찰된 것 만이 실재하는 것으로 보는데서 기인한다. 그러나 관찰행위 자체는 관찰되지 않는다. 관찰행위 자체를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 바로 관찰행위의 주관적 측면이다. 의식은 그 자체가 현상(appearance)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현상/실재(appearance/reality)의 구분이 적용될 수 없다. 의식에서는 현상 그 자체가 실재이다. 관찰은 항상 어떤 이의 관찰이고 대개 의식적이며 항상 어떤 관점에서 출발한다.

3.2 관점적 측면

인간의 의식은 눈, 코, 귀, 혀, 피부를 통해 이루어지는 오감과 균형감각, 신체감각, 사고의 흐름 등의 한정된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런 형태로 나타나는 대부분의 의식은 지향적이다. 물론 기분과 같은 것은 지향적이지 않지만 거의 모든 의식적 상태는 무언가를 향해 있다. 향해있는 대상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대부분의 의식은 무엇에 "대한 의식"이며 여기서 "대한"이란 말은 지향적이라는 의미에서 "대한"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대상의 특성들은 우리의 의식적 경험의 만족조건들이다. 우리의 의식적 경험은 경험의 대상들과는 달리 언제나 관점적(perspectival)이다. 의식적 경험은 언제나 하나의 관점으로부터 생겨난다. 그러나 대상들 자체는 어떤 관점도 가지지 않는다. 모든 지향성은 관점적이다. 모든 표상들은 자신의 대상을 특정 관점 하에서 표상한다. 모든 지향적 상태들은 하나의 관점적 형태(aspectual shape)를 가진다.

3.3 배경(Background)

이러한 관점적 의식은 다양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 지향적 관점은 그 관점을 형성하는 배경을 가지고 있고, 또 관점이 집중되는 부분과 주변부를 이루고 있는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한 친숙성과 같이 지향적 관점을 가능하게 하는 다른 여러 배경능력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의미, 이해, 해석, 믿음, 욕구, 경험 등의 지향적 현상들은 오직 배경능력들의 집합 내에서만 기능한다. 그러나 이 배경능력들은 지향적이지 않다. 다시말하면 언어든, 사유든, 경험이든 모든 표상들은 비표상적인 능력들의 집합들이 주어져야 표상할 수 있다. 모든 지향성과 지향성을 이루는 전체적 그물망(Network)은 또다시 배경능력들을 필요로 한다. 각각의 지향적 상태들은 작동하기 위해 배경능력들을 필요로 한다. 이 배경이 다름에 따라 한 문장의 의미가 다르게 결정될 수 있다. 즉 지향적 상태들의 만족조건이 달라진다. 왜냐하면 지향적 상태들은 자율적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배경은 하나의 능력이다. 우리는 정신적 상태에 대한 모종의 목록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지향적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무의식적 그물망이라고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배경의 일부이다. 그리고 배경은 지향적 능력과 비지향적 능력 모두를 포함한다.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배경능력들 중 지향적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자.

4. 무의식에 대한 썰의 입장

4.1 무의식의 위치

썰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들 중 정신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유일한 실재는 의식 밖에 없다. 의식 이외의 어떤 정신적인 것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지향적인 모든 것들은 의식되는 것이므로 (주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무의식도 정신적인 상태로 간주한다. 물론 여기서의 무의식은 전혀 정신적이지 않다는 의미에서의 "비의식"(nonconsciousness)과는 다르다. 프로이드 이래 무의식적 정신상태가 인간을 설명하기 위한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여 오늘날에는 오히려 의식보다 무의식이 더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는 형편이다. 왜냐하면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정신적 과정은 과학적 탐구의 주제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거꾸로 실재를 규정하여, 주관적 의식은 실재하지 않으며 객관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무의식이 오히려 실재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 썰의 지적이다.

그러나 정작 실재하는 것은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이다. 썰에 따르면 무의식적 정신상태라는 개념은 의식의 접근 가능성(의식 가능성)을 함축한다. 무의식은 잠재적으로 의식적이다. 의식 개념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무의식은 이해불가능하다.

의식과 지향성 개념을 분리하려는 노력이 최근에 있어왔다. 심리학적으로 실재하지만 의식이 접근할 수 없는 구문론적인 규칙이 있다고 주장하는 언어학자들이나, 의식적이 접근할 수 없는 진정으로 심리학적인 추론과정이 지각 내에 있다고 주장하는 심리학자들, 그리고 믿음과 욕구등을 의식과 무관하게 설명하려고 하는 기능주의자들이 그 예이다. 이들의 이러한 주장들은 의식과 지향성의 분리를 함축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원리적으로 의식이 접근할 수 없는 정신적 과정이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썰에 따르면 모든 무의식적 정신상태는 원리적으로 의식이 접근할 수 있다. 이를 우리는 '연결원리'라고 부른다.

연결원리를 위한 논증에 있어서 우선 무의식 개념과 관련하여 두가지 제한 사항이 있다. 첫째, 무의식도 정신상태라고 한다면 그것은 지향적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무의식적 정신상태는 무의식적 지향적 상태이다. 둘째, 무의식도 지향적 상태이므로 그것은 모종의 관점적 형태를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

이 두가지를 단서로 해서 썰의 무의식은 어떤 존재론적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탐구한다.

4.2 연결원리를 옹호하는 논증

썰의 연결원리에 대한 논증은 다음의 일곱단계로 진행한다.

  1. 본디의(intrinsic) 지향성과 인것같은(as-if) 지향성이 있다. 본디의 지향성만이 진정으로 정신적이다.
  2. 무의식적 지향적 상태는 본디의 상태이다.
  3. 본디의 지향적 상태는, 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관점적 형태를 지닌다.
  4. 관점적 특징은 3인칭적, 행동주의적, 신경생리학적 기술만으로는 완전히 파악될 수 없다. 이것들 중 어떤 것도 관점적 형태를 완전히 설명하는데 불충분하다.
  5. 그러나 무의식적 지향적 상태의 존재론은, 그 상태가 무의식적일 때는, 전적으로 순수히 신경생리학적 현상들의 존재에서 성립한다.
  6. 무의식적 지향적 상태라는 말은 가능한 의식적 사고 내지 경험의 상태라는 말이다.
  7. 무의식의 존재론은 주관적인 의식적 사고를 야기할 수 있는 두뇌의 객관적 특징들에서 성립한다.

이 논증의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무의식의 영역을 별도로 두지 않으려는 것이다. 무의식적 정신 상태는 마음 속의 어두운 다락방에 보관된 대상이나 물 속 깊숙히 자신의 고유의 형태를 보존하면서 존재하는 물고기와 같은 것이 아니다. 무의식은 의식의 가능한 내용일 뿐이다. 무의식도 정신현상인 이상 지향적이고 또 관점적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지향적인 의식 현상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향적이고 관점적이다. 무의식적 지향성의 개념은 그것의 의식에의 현현과 관련된 잠재 개념이다.

썰에 있어서 사실(fact)은 두가지 밖에 없다. 즉 그것이 주관적인 의식되든가 아니면 물리적으로 존재하든가이다. 무의식은 주관적으로 의식될 수 있는 원리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현재 의식되지 않는 상태이다. 따라서 무의식에 대응하는 사실은 주관적인 사실이 아니다. 이제 무의식에 대응하는 사실은 물리적 영역에서 밖에 찾을 수 없다. 무의식의 존재론은 따라서 신경생리학적 두뇌과정에서 성립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따라서 그 본디의 측면에서 본다면 의식적 상태를 산출할 수 있는 신경생리학적 상태와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4.3 인지이성비판

그렇다면 사실상 무의식적이고 원리적으로도 무의식적이라고 주장되는 인지과정에 대한 인지주의자의 주장은 어떠한가? 촘스키의 보편문법규칙이나 포더의 사유언어와 같은 의식적으로 될 수 없는 현상들을 썰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4.3.1 인지과학의 성립배경

인지과학은 처치-튜링 테제와 튜링 정리에 기초하고 있다. 즉 모든 연산에 있어서 그 연산이 실행될 수 있는 튜링기계가 있다는 처치-튜링테제와 어떤 튜링기계도 모방할 수 있는 보편적인 튜링기계가 있다는 튜링 정리로부터 우리는 보편적인 튜링기계가 어떠한 연산도 실행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예를들어 나눗셈 연산이 인간 두뇌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우리의 언어이해, 시각지각, 범주화 등도 모종의 연산을 통해 이루어진다면 이런 연산을 수행할 수 있는 보편적인 튜링기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두뇌가 보편적인 튜링기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게다가 의미론적 문제까지 구문론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증명이론은 길을 터주고 있다. 두뇌가 보편적인 튜링기계라면 두뇌의 모든 과정을 디지탈 컴퓨터로도 수행할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디지탈 컴퓨터로 인간의 두뇌를 해명할 수 있는 길을 터게 되는 것이다.

4.3.2 인지주의의 난점

그러나 첫째, 컴퓨터에서 구문론적으로 이루어지는 계산(computation)이나 계산을 구성하는 0과 1은 물리적인 결과를 산출하는 물리적인 사물이 아니다. 컴퓨터는 0과 1의 할당(assignment)에 의해 구문론적으로 정의된다. 계산적 과정은 복수실현 가능하다. 즉 컴퓨터에도 두뇌에도 고양이에도 쥐에도 실현가능하다. 왜냐하면 순수히 구문론적인 계산적 과정은 물리학에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물리적 현상을 구문론적으로 다루는 수행자 내지 사용자 상관적이기 때문이다. 구문론은 본질적으로 관찰자 상관적이다. 상이한 매체에서 계산적으로동치인 과정이 복수실현된다는 말은 이것이 그 체계에 본질적이지 않다는 표시이다. 이 과정은 밖으로부터의 해석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 계산적인 과정, 구문론은 물리학에 할당되는 것이다. 구문론은 항상 그것을 구문론으로 해석해 주는 해석자를 필요로 한다.

둘째, 이런 해석자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계산의 과정을 가장 단순한 단계, 즉 0-1의 스위치 단계로까지 내려가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0과 1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전히 단순하지만 해석자를 필요로 한다. 여전히 난장이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가 쓰고 있는 컴퓨터에서는 난장이의 문제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게모르게 그 문제의 난장이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해석된 정보를 컴퓨터로 집어넣고 물리적으로 출력되어 나타난 것을 또 구문론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컴퓨터라고 한다면 난장이(해석자)가 어디선가 있어야 한다.

세째, 우리는 외부에 있는 난장이(해석자)로서 마치 기계적 컴퓨터가 규칙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컴퓨터가 구문론적인 프로그램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치 따르고 있는 것처럼 작용하도록 고안되었을 뿐이다. 즉 지향적 행위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래적인 지향적 내용을 갖지 않기 때문에 프로그램을 이루는 구문론은 어떠한 인과적 힘도 갖지 않는다.

4.4 썰이 제시하는 옳바른 방향(하드웨어적/기능적 설명)

썰에 따르면 우리의 두개골 속에는 복잡하게 얽힌 뇌와 각양각색의 의식이 있을 뿐이다. 거기에는 맹목적인 신경생리학적 과정들과 의식이 있을 뿐이며 그밖에 다른 것은 없다. <본디 지향적이면서 원리적으로 의식이 접근할 수 없는 현상>이란 없다. 접근할 수 없는 정신적 현상을 가정하는 인지주의는 다윈 이전의 개념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다윈의 업적은 지향적 설명 방식을 다른 두가지 수준의 설명으로 대치한 것에 있다. 그 두가지 설명이란 "하드웨어적" 수준의 설명과 "기능적" 수준의 설명이다. 지향적 목적론적 설명을 다음과 같이 하드웨어와 기능적 설명으로 전환시킬 수가 있다.

지향적 설명: 식물은 생존을 원하기 때문에 잎을 태양에로 돌린다.

하드웨어적 설명: 옥신의 다양한 분비가 식물이 잎을 태양에로 돌리는 원인이다.

기능적 설명: 태양으로 잎을 돌리는 식물이 그렇지 않은 식물보다 생존가능성이 높다.

무의식적인 과정에 대한 일반적 설명은 위의 지향적 설명과 같은 의인화된 설명이다. 따라서 이러한 설명도 마찬가지로 하드웨어적 설명과 기능적 설명으로 대치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의식이 접근할 수 없는 지향적 정신상태는 없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지향적 정신상태는 기능적이고 하드웨어적 설명에 의해 모두 대치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안구의 움직임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지향적 설명도 하드웨어적 설명과 기능적 설명으로 대치되어야 한다.

지향적 설명: 나의 머리가 움직이고 있는 동안 나의 망막의 상을 고정시킴으로써 나의 시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나는 안구의 움직임에 대한 심층의 무의식적 규칙에 따른다.

하드웨어적 설명: 내가 머리를 움직이고 있는 동안 한 대상을 보고 있을때, VOR에 대한 하드웨어적 기계적 과정이 나의 안구를 움직인다.

기능적 설명: VOR의 운동은 망막의 상을 고정시키는데, 이것이 나의 시력을 향상시킨다.

 

이런 전환의 중요성을 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학적 설명에서는 특히 무엇이 무엇을 일으키는 원인이다라고 정확히 말하려고 한다. 전통적 인지과학의 이론들에서는 지각적 판단들이나 문법적 문장들과 같은 요구된 결과를 산출한다고 생각되는 심층의 무의식적인 정신적 원인이 있다고 가정되었다. 그러나 이 전환은 이러한 정신적 원인을 제거한다. 맹목적인 물리적 결과를 산출하는 있는 맹목적인 물리적 메카니즘 이외의 어떤 것도 없다. 이러한 메카니즘과 결과들은 정신적이지 않은 다른 수준에서 기술 가능하다. VOR 장치는 시각적 효율성을 증진시키도록 기능한다. 그러나 유일하게 지향적인 것은 대상에 대한 의식적 지각 뿐이다. 작용의 나머지 부분들은 모두 VOR의 있는 그대로의 물리적 메카니즘에 의해 행해졌다. 따라서 전환은 심층의 무의식적 심리학적 원인들의 전 수준을 제거함으로써 근본적으로 인지과학적 설명의 존재론을 변화시켰다. 심리학적 내용 때문에 체계 내부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규범적 요소가 이제 메카니즘 바깥에 있는 의식적 행위자가 그것의 기능의 판단하면서 다시 되돌아 온다.

이제 심층의 무의식적 과정이라고 말해지는 부분은 하드웨어적 설명과 기능적 설명으로 대치될 수 있다. 썰은 이러한 대치를 통해 모든 현상들을 무엇이 본디 무엇을 인과적으로 설명해 내는지를 밝혀내려고 한다. 무의식적 지향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설명은 사물에 본디 있는 인과관계를 보여주는 설명이 아니다. 지향성은 의식에만 적용되는 것이다. 그 외의 모든 의식되지 않은 지향적 설명들은 하드웨어와 기능적 설명으로 대치되어야 하다.

5 인지이성 비판의 의미와 구조

5.1 비판의 의미

의식 이외의 모든 정신상태에 대해 하드웨어와 기능적 설명으로 대치하려는 이러한 썰의 의도는 그가 인정하는 근본적인 사실을 주관적 의식과 물리학적 사실로 제한하는 그의 형이상학적 입장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에 기초하지 않는 설명들은 세계에 본디 있는 것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이런 설명들은 본디의 것이 아니라 관찰자 상관적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론에서 본 <본디의 것>과 <관찰자 상관적인 것>의 구분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처음의 구분 기준은 관찰자나 사용자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사라지지 않느냐 사라지느냐였다. 이제 그 기준은 보다 적극적인 형태로 표출된다. 그것이 의식되는 것이거나 물리학적으로 해명되는 것이냐 아니냐.

이런 기준에 의해 모든 무의식적 정신상태들은 그것이 의식적이지 않는 이상, 물리학적, 더 정확하게는 신경생리학적 과정에서 대응하는 사실을 찾게 된다. 이런 작업은 철학의 고유의 방법이었던 선험적 탐구를 평가절하시키는 작업이다. 선험적 탐구는 칸트 이래로 인식의 가능근거들에 대해 탐구해 왔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인지과학도 마찬가지로 인지가 가능할 수 있는 구문론적 구조를 밝혀내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이런 작업들이 썰에 이르러서는 세계의 본디의 구조가 아니라 관찰자 상관적인 것으로 평가절하되었다. <이유>에 대한 탐구를 <원인>에 대한 탐구로 모두 환원시키려는 의도가 썰에게도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방향은 자연주의적이다.

5.2 인지이성 비판의 구조

썰은 의식의 고유성을 주장하면서 특히 지향적인 의식이 가지는 특성들을 언급하고 있다. 의식은 칸트를 비롯하여 관념론자들에게는 모든 인식의 근원이었다. 오늘날 개념틀(conceptual scheme)을 강조하는 상대주의적 경향도 마찬가지로 인식의 근원을 주관적 측면에서 찾으려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지향성 개념을 사용하는 후설에 있어서는 의식은 모든 인식의 절대적 근거이며, 개념적으로 파악되는 세계의 모든 대상들은 의식 내에 의식의 지향작용(noesis)의 상관자로 존재하는 노에마(noema)이다.

썰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 내용을 의식하고 있는 지향적 의식은 관점적(aspectual)이라고 말하고 있다. 세계의 대한 우리의 모든 표상은 대상에 대한 모종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면 물리적 대상에 대한 물리학적 이론들은 어떠한가? 그것이 이론이고, 사고를 통해 파악되는 것이고, 사고작용도 지향적 의식의 일종이라면 그것도 마찬가지로 관점적으로 파악되지 않겠는가?

바로 여기서 이 지향작용의 관점적 측면과 <본디의 것>과 <관찰자 상관적>인 것의 구분 문제를 조화시키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썰은 경험의 대상 자체는 관점적이지 않고 경험은 관점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대상 자체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후설에 있어서 모든 대상들은 지향작용의 상관자로서의 대상이다. 따라서 대상이 대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근거는 의식의 지향 작용 속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 썰에 있어서도 모든 의식적인 인식은 배경능력들과 전체적인 그물망의 도움을 받아 특정의 관점에 따라 이루어지는 지향적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에 토대하여 어떻게 <본디의 것>과 <관찰자 상관적>인 것이 구분될 수 있는가? 이 구분은 다른 기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그의 형이상학적 전제인가?

물리적 세계의 인과적 이해 조차도 썰에 따르면 지향적 의식의 산물일 수 밖에 없다. 이 지향적 의식의 산물인 물리학적 세계 속에 우리의 의식이 또다시 창발적 속성으로 거주하고 있다. 물리학적 세계는 의식의 산물이고 의식은 또다시 물리학적 세계의 표현형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 순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썰처럼 물리학적 세계를 거부할 수 없는 근본사실로 인정하고서 이야기를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리학적 세계관이 오늘날의 주도적 세계관임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자명하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자명하다는 보장은 없다. 새로운 세계관에 의해 파악된 사실이 근본사실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썰이 주장하는 그 <본디의 것>이 과연 <본디의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관점에 의존적이지 않은 이론이 어디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인식의 가능근거는 썰이 주장하는 것처럼 단순히 관찰자 상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모든 사실들에 대한 절대적인 근거일 수가 있는 것이다.

6. 결론

썰의 기본 전략은 우리가 무의식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가능 근거, 또는 인식의 구조들이 인과적 힘을 결여한 관찰자 상관적인 사실이며 따라서 세계의 본디 특징은 다른 인과적인 힘을 지닌 물리학적, 신경생리학적 사실들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칸트 이래로 이루어진 선험적 탐구에 대한 정면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인식의 규범을 찾고자 하는 철학의 근본 작업에 대해서 회의를 던지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만약 썰의 입장이 정당하다면 그렇다면 철학적 작업들,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또는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가능 근거들에 대한 탐구들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무의식에 대한 탐구가 의미가 있는 것은 그것이 의식과 물리학적 사실을 연결시키는 다리의 구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무의식은 의식의 측면과 물리학적 측면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썰은 무의식의 독자적인 존재방식을 인정하지 않고 의식의 사실과 물리적 사실을 곧바로 인과관계로 연결시키고 있다. 의식의 사실과 물리적 사실은 그러나 전혀 다른 존재방식을 가진다. 의식은 주관적이고 1인칭적이며 물리적 사실은 객관적이고 3인칭적이다. 의식과 의식의 물리적 사실인 두뇌 사이에는 어떤 "연결"(link)도 없다. 이것은 마치 물의 액체성과 H2O 분자 사이에 아무런 연결도 없는 것과 같다. 썰에 따르면 의식과 두뇌 사이에 인과적 연관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인과적 연관이 의식의 과정과 두뇌의 과정 사이에 서로를 연결시켜 줄 구조적 연관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무의식이라는 매개적인 개념을 도입하고 그것의 구조를 밝히고자 하는 노력은 바로 양자가 공유할 수 있는 이러한 구조적 연관을 보여주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썰은 무의식적 정신상태라 할 수 있는 의식의 선험적 구조 자체의 성립가능성을 비판함으로써 의식과 두뇌 사이의 구조적 연관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 사실상 이것은 데이?슨의 무법칙적 일원론처럼 의식과 두뇌 사이에는 인과적 관계가 성립하지만 그렇다고 법칙적 관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가능 근거를 탐구하는 철학적 작업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매개하는 모든 개념들의 적절한 위치와 위계를 잡아주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논리적 구조를 밝혀냄으로써 가능하다. 이 논리적 구조에 대한 철학적 탐색이 썰에게는 어떤 존재론적 의의를 가지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