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불확정성과 이론의 경험적 미결정성

 

1. 서 론

의미론은 언어적 표현과 그 표현이 적용되는 비언어적 대상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이다. 그런데 여기서 관계의 짝을 이루고 있는 '언어적 표현'과 '비언어적 대상'이라는 말은 너무나 외연이 넓은 애매한 말이다. 이 두 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에 따라 다양한 의미론이 나타나게 된다. '언어적 표현'과 '비언어적 대상'이 가리키는 바에 대한 가장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견해는 '언어적 표현'은 낱말들이나 용어(term)들을, 그리고 '비언어적 대상'은 이에 상응하는 사물(thing)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행동주의(behaviorism)를 자신의 이론의 기본 전제로 받아들이는 콰인에 있어서는 결코 '비언어적 대상'이 사물이 될 수는 없다. 사물은 행동적인 기준에 의해 제 일차적으로 파악되는 대상이 아니다. 또한 사물은 인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칸트의 Ding an sich와 같은 것도 아니다. 사물은 인간 주관의 사물화(reification)의 결과이다. 콰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더나아가 행동주의적 접근은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심리학에서는 우리는 행동주의자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언어학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우리가 우리의 언어를 배우게 되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언어행위를 관찰하고 우리 자신의 서툰 언어행위를 다른 사람이 관찰하게 하고 강화시키고 그리고 교정시키도록 함으로써이다. 우리는 관찰가능한 상황 속에 있는 명백히 드러난 행동에 엄격히 의존한다. 우리의 정신적 삶은 언어에 대한 우리의 마스터 정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언어적 의미 속에는, 관찰가능한 상황 속에서 명백히 드러난 행위로부터 획득된 것을 넘어서는 어떤 것도 없다.(p.37)

마지막 문장에서 드러나듯이 행동주의자 콰인에 있어서 '비언어적 대상'은 바로 "관찰가능한 상황속에서 명백히 드러난 행위"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발화와 동시에 관찰가능한 상황"이다. 바로 여기에 콰인의 의미론이 번역론이 되는 근거가 있다. 의미의 문제는 결국 번역의 문제와 동일한 상황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행동주의에 기반한 콰인의 번역론은 결국 번역의 불확정성론에까지 이른다. 그렇지만 번역의 불확정성과 평행한 것으로 이론의 미결정성(underdetermination) 논제가 있다. 이 양자는 둘다 경험적 증거의 총체로는 하나의 고유한 체계를 선택하는데 불충분하다는 점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서로 다른 점도 있다. 콰인은 두 불확정성 논제의 차이를 다음의 두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번역의 불확정성은 이론의 미결정성에 부가적이다. 즉 세계에 대한 경험적으로 동치인 체계들 중의 하나에 우리가, 임의로라도, 정착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 속에서 번역의 불확정성을 지닌다.

둘째, 번역의 불확정성은 접근 불가능한 사실들이나 인간의 한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우리는 이 두 불확정성의 근거들을 살펴보고 이 둘의 관련과 차이를 보다 분명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2. 자극과 관찰문장과 행동주의

콰인에 있어서 관찰문장이란 다음과 같다.

그 문장은 적절한 범위의 자극이 주어질 경우에, 더이상의 조사 없이 그리고 그가 그 당시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에 상관없이, 주체의 즉각적인 동의 내지 부인을 명령해야만 한다. 더 나아간 요구는 상호주관성이다. 감정의 보고와는 달리 그 문장은 그 경우(occasion)의 언어적으로 유능한 모든 목격자들로부터 동일한 평결을 명령해야 한다.(p.3)

행동주의에 있어서 언어와 그 언어가 관계하고 있는 실재 사이의 고리는 관찰문장이다. "관찰문장 자체가 유사하게 유발된 행동의 한 경우이다."(p.4) 자극의 유사성은 그 자체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관점에서, 유사한 행동을 이끌어낸다는 점에 의해서 확인된다.

이점에서 행동주의는 반형이상적이고 경험적인 전통을 충실히 이어받고 있다. 행동주의는 인간 주체의 감각, 지각의 능력을 넘어선 어떤 실재도 거부한다. 자극을 넘어선 어떤 것도 토대가 될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콰인의 행동주의는 반형이상학적이다. 자극의 범위를 신경계의 입력 즉 신체의 표면을 넘어선 어떤 가장 가까운 원인으로 확장시킬 수도 없다. 콰인이 행동주의를 고집하는 것은 콰인의 "관심이 인식론적이기 때문이다. 콰인은 감각의 촉발로부터 과학의 주장에까지 이르는 증거의 흐름에 관심을 갖고 있다."(p.41)

콰인은 관찰문장을 새롭게 정의함으로써 자신의 경험론을 세련화시킨다. 그의 경험 개념은 칸트의 경험(Erfahrung) 개념처럼 자극과 주관의 합작물이다. 이를 콰인은 perceptually와 receptually의 구분을 통해 보여준다. 그러나 콰인은 칸트가 판단표를 분석하듯이 문장의 내적 구조나 성격을 밝혀냄으로써 문장의 경험적 본성을 밝혀내고자 하지 않는다. 앞의 관찰문장의 정의가 보여주듯이 관찰문장의 정의는 철저히 문장 외적이다. 문장에 대한 모종의 반응 내지 행동에 의해 관찰문장이 정의된다. 이것은 물론 관찰가능한 행동들이며 이 점에서 여전히 행동주의는 견지되고 있다. 관찰문장의 정의에 나타나는 이 문장 외적인 성격이 바로 번역의 불확정성과 이론의 미결정성의 뿌리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어떻게 번역의 불확정성과 이론의 미결정성에 이르게 되는지를 살펴보자.

3. 번역의 불확정성

가. 감정이입

어린애나 현장언어학자나 언어학습의 단초가 되는 것은 관찰문장이다. 관찰문장들은 관찰가능한 공적인 상황들에 상당히 엄격하게 의존하는 문장들이다. 그리고 바로 이 공적인 상황들이 바로 화자의 관찰문장과 언어학자의 번역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부분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어린애에 있어서나 현장언어학자에 있어서나 언어의 학습을 지배하는 것은 감정이입이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의 지각 상황에 대해 감정이입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감정이입을 통한 언어학습과 의사전달은 대화의 유창함, 그리고 반응의 예측가능성 등에 의해서 그 성공이 판가름 된다. 이것은 번역편람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더 좋으냐 더 나쁘냐 하는 문제이다. 여기서는 관찰문장 자체가 지니는 사실성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누구나 공유할 수 없는 관찰문장 고유의 사실성이란 없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관찰문장으로부터 논리사를 포함하고 있는 복합문장을 번역하는데 이르기까지 기반이 되는 것은 역시 감정이입을 토대로한 질문과 동의의 반복적인 과정이며 그리고 번역의 성공은 성공적인 협상과 매끄러운 대화가 판가름 해 준다.

나. 번역의 불확정성과 그 근거

a. 지시의 불확정성과 번역의 불확정성

콰인은 말한다.

번역의 이러한 고려사항들은 원초적 번역가가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들이다. 이것은 문장들의 의미들이 포착하기 어렵거나 탐지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런 더듬거리는 절차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것을 넘어 그 어떤 것도 문장들의 의미들에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절차를 법전화해서 이 절차를 인용함으로써 번역이 무엇인지를 정의할 희망조차도 없다; 왜냐하면 그 절차는 통약불가능한 가치들의 무게를 재는 것과 관련되기 때문이다.(p.47)

바로 여기서 번역의 불확정성이 도출된다. 콰인은 번역의 불확정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반성을 통해서 볼 때, 정글에서 독자적으로 일해 온 두 사람의 원초적 번역가가 상호교환가능한 안내서를 내놓을 것이라고 기대할 이유가 없다. 그들의 안내서들은 원주민의 행동에 의해서는 전혀 구별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각각의 안내서는 다른 번역가가 거부하고자 하는 번역을 명령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번역의 불확정성 주장이다.
..... 어떤 주어진 정글 문장을 두개의 경쟁하는 안내서를 가지고 번역한 영어문장들이 영어문맥에서 서로 바꾸어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pp47-48)

이러한 번역의 불확정성은 그러나 지시의 불확정성과는 차이가 있다. 지시의 불확정성은 한 문장 내에 있는 단어들의 보상적 조정에 의해 그 문장 전체의 번역을 동일하게 유지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의 번역의 불확정성은 사소한 것이고 또 논쟁의 여지가 없다. 보다 중요하고 심각한 불확정성은 완전한 문장 또는 한단어문장의 번역의 불확정성이다. 여기서의 불확정성은 완전한 문장의 수준에서조차 화해되지 않은채 남아 있으며 오직 다른 완전한 문장들의 차이에 의해서만 보상되는 그러한 불확정성이며 따라서 이런 불확정성은 한 언어에 매우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다른 문장들과의 연관 속에서 나타나는 불확정성을 번역의 불확정성이라고 범위를 한정시킨다면 지시의 불확정성은 번역의 불확정성의 범위에서 제외될 수 있다. 왜냐하면 지시의 불확정성은 하나의 문장 내에서 조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b. 번역의 불확정성의 근거

첫째, 우리가 화자와 번역자 간에 어떤 형태로든 공통성을 확보할 수 있다면 우리는 번역의 불확정성을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공통성으로 '관찰문장의 발화와 동시에 관찰가능한 상황'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이라는 말은 주관적인 것인지 객관적인 것인지도 분명치 않은 너무도 애매한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상황이라는 개념 대신에 이 상황과 관련된 화자의 자극과 번역자의 자극의 동일성을 내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콰인이 자극들을 주체의 표면에 위치시킨다고 말했다. 바로 이 결과 콰인에 있어서 자극의미는 사적이 된다. 게다가 자극의 상호주관성은 의사소통에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다음의 인용이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토끼'라고 하는 관찰문장은 언어학자에 대해 나름의 자극의미를, 'Gavagai'는 원주민에 대해 나름의 자극의미를 가진다. 원주민이 'Gavagai'에 동의를 표하고 있음을 언어학자가 알아채는 경우는 언어학자 자신이 그 상황에서는 '토끼'에 동의를 표했을 그런 상황에서이다. 그리하여 그 언어학자는 '토끼'에 대한 자기 나름의 자극의미를 'Gavagai'에 부과한다. 그리고 그 이후의 경우들에서 'Gavagai'라고 말을 건네보고 자신의 언어자료 제공자에게서 승인을 얻는다. 이에 고무되어 그는 잠정적으로 '토끼'를 번역으로 채택한다.(p.42)

그렇다면 자극의 동일성 이외에 다른 의미의 동일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책이 있는가? 의미의 동일성을 의미라는 마찬가지로 골치아픈 개념으로부터 정의할 수도 없다. 또 진리보존적 교환가능성이라는 기준으로부터 의미의 동일성을 정의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는 de re, de dicto적 문맥의 구분이라는 새로운 문제와 부?히고 이 문제는 결국 의미의 동일성에 대한 선이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또한 분석성 개념도 믿을만한 의존처가 못된다. 왜냐하면 전체론에서는 분석성 개념이 그리 선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의 모든 실패를 우리는 번역의 불확정성의 간접적인 근거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우리는 또 하나의 근거로 이론의 미결정성과 존재론적 상대성을 들수가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이 하나의 근거가 될 수는 있겠지만 우리는 이론의 미결정성과 무관하게 번역의 불확정성이 성립가능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여 그것이 지닌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론의 미결정성과 그것의 근거인 대치함수(proxy function)를 살펴본 후 알아보기로 하자.

3. 이론의 미결정성

가. 지시

이론의 미결정성의 문제를 알기 위해서는 이의 기반이 되는 지시의 뿌리를 살펴보아야 한다. 지시의 문제는 곧 사물화(reification)의 문제이다. 사물화란 "자기 이론의 목적을 위해 주어진 종류의 대상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Quiddities p.180)이라고 콰인은 정의한다. 이 정의를 통해 보여지듯이 존재의 문제는 바로 사물화를 통해서 비로소 나타난다. 사물화의 과정이 곧 존재론적 기투(committment)의 과정인 것이다. 물체들은 관찰문장들을 가로지르는 촛점들에 있는 이상적인 마디이다. 개별화는 관찰문장 이후에 이루어 진다. 기반이 되는 것은 문장으로 표현되는 관찰이다. "명사적 사물화는 이론적인 것이다."(p.25) 사물화가 이론적인 것인 이상 존재의 문제도 이론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콰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시와 존재론은 보조적인 지위로 물러난다. 관찰적이고 이론적인 참인문장이 과학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참인문장들은 서로 구조로 관련지워져 있고, 대상들은 단지 마디로 나타날 뿐이다. 어떤 특정 대상이 존재할 지는 관찰문장의 참에 무관하고, 이론문장에 대한 관찰문장의 지지에 무관하고, 이론의 예측 성공과도 무관하다. (p.31)

의미를 제 일차적으로 담지하고 있는 것은 단어가 아니라 문장이다. 또한 의미를 제 일차적으로 담지하고 있는 것은 명제(proposition)가 아니라 문장이다. 특히 기본이 되는 것은 한단어로된 관찰문장이다. 존재론의 관건이 되는 사물화는 대상과의 관련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효용성'에 의해 평가된다. 사물화는 관찰과 이론 사이의 논리적 연결의 구조를 형성한다. 즉 사물화는 여러 문장들에 수렴적으로 촛점을 맞추는 장치이다. 이것은 곧 대명사나 속박변항의 임무이다. 따라서 존재한다는 것은 변항의 값이 된다는 것이다.

나. 이론의 미결정성(존재론적 상대성)

사물화의 이러한 성격은 결국 존재론적 상대성으로 귀결된다. 이는 대치함수(proxy function)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분명해질 수 있다.

대치함수란 우리의 의도된 논의 영역의 대상들에 대해 정의된, 명시적인 일대일 변형 г이다. 여기서 '명시적'이라는 말로 의미하는 바는 어떠한 대상 x 에 대해서도 우리가 гx를 명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술어들 각각을, 그 술어가 원래 그것에 대해 참이었던 대상 x의 상관자 гx에 대해 참인 것으로 재해석한다. 'Px'가 원래 x가 하나의 P이다라는 것을 의미했었다면 우리는 'Px'를 x가 하나의 P의 г이다라고 재해석할 수 있다. 이항이나 그 이상의 술어들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모든 문장들을 글자 하나하나까지 원래 그대로와 똑같이 놓아두고 단지 재해석만 한다. 관찰문장들은 여전히 이전과 똑같은 감각 자극과 연결되고 논리적 상호연관은 건드려지지 않은채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론의 대상들은 원하는 대로 전혀 다른 것들로 대체되어 버렸다.(pp31-32)

더구나 이러한 대치함수는 괴델이 불완전성 증명에서 보여지듯이 일대일 대응이 아닐 수도 있다. 더구나 우리는 뢰벤하임-스콜렘 정리에 따라 어떤 조직화된 체계를 수들만으로 이루어진 빈약한 존재론만을 가지도록 재해석할 수 있다.

두 개의 존재론이 명시적으로 서로 관련되기만 한다면 그 둘은 경험적으로 동등하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경험적 근거는 없다. 우리는 하나의 고양이 대신 전우주에서 고양이을 뺀 것을 지칭하도록 재해석할 수도 있다. 전체로서의 그 두 존재론은 경험적으로 구별될 수 없다. 두 체계는 경험에 의해서 미결정 상태에 있다. 대치함수의 교훈은, 우리의 존재론이 우리 세계 이론에 대한 우리 자신의 개념적 기여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제안을 하고 세계는 그것에 처분을 내린다. 그러나 그 처분은 대상에 대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문장, 특히 관찰문장의 긍정-부정 평결을 통해 주어진다.

4. 두 불확정성의 관계

이상에서 우리는 번역의 불확정성과 이론의 경험적 미결정성의 근거들을 살펴보았다.

번역의 불확정성은 공유되는 자극이나 동의성이라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론의 경험적 미결정성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치함수의 가능성이 번역의 불확정성을 더욱 복잡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번역의 불확정성은 이론의 미결정성과는 별개의 문제다. 둘 다 동일한 뿌리(행동주의)에서 나와서 서로 보완적일 수는 있어도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의 근거일 수는 없다. 우리가 하나의 특정 존재론 속으로 들어와 있다고 할지라도 번역의 불확정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의 언어학습과 의사소통이 공유된 의미를 포장지에 고이 싸서 전달하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번역의 불확정성이나 이론의 경험적 미결정성에 있어서 우리가 최종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공통 근거는 관찰문장이다. 관찰 문장의 내적인 구조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런 견해도 지닐 수 없다. 우리는 관찰문장을 단순히 행동(행태)를 통해 구별할 수 있을 뿐이다. 불확정성은 바로 이러한 행동주의적으로 규정된 관찰문장이 하나의 체계를 붙잡는데 충분하지 않다는 것으로부터 파생한다.

그러나 관찰문장으로부터 구성되는 체계의 성격이 양자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우리는 이 양자의 불확정성을 다음의 차이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론의 미결정성은 실재에 대한 인간 인식의 불확정성이고, 번역의 불확정성은 인간 행동이 지니는 본질적인 불확정성이다.

번역의 불확정성은 의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요구한다. 번역의 불확정성은 의미가 객관적으로 놓여 있어서 그것이 한 화자에서 다른 번역자에로 넘어가는 것과 같이 그렇게 '전달'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전달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화자와 번역자가 다만 서로 자신의 자극의미를 부과할 뿐이다. 의미는 이 이상도 이 이하도 아니다. 의사전달이란 감정이입이라는 상호간의 일방적인 추측일 뿐이다. 이것은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미와 의미에 대한 이해의 본래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불확정성이 바로 의미 성립의 가능근거이다. 불확정성이 없었더라면 의미라고 하는 인간의 독특한 장치는 없고 다른 장치가 있었을지도 모를일이다.

바로 여기에 번역의 불확정성이 이론의 미결정성과 다른 점이 있는 것이다. 이론의 미결정성은 인간의 여러 장치의 범위를 초월하는 실재에 대한 발언이다. 실재에 관해서 우리는 여러가지 관점에서, 즉 다양한 존재론적 기반 위에서, 이론을 구성해 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실재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이는 인간의 한계다. 이론의 경험적 미결정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특정의 이론을 자의적으로든 어쨌든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번역의 불확정성은 피할 수 없다. 말하자면 이론의 문제는 결단(dicision)과 기투(committment)의 문제이고 번역의 문제는 생존의 문제이다.

번역의 불확정성이 보져주는 것은 문장 의미인 명제라고 하는 개념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전체적 과학의 경험적 미결정성이 보여주는 것은 세계를 파악하는 다양한 옹호가능한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p.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