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이율배반(Antinomie)의 원천과 그 의미

 

1. 카논과 오르가논

한때 儒學을 空理空論이라고 하여 경멸적인 어조로 배척한 적이 있었다. 이와 비슷한 태도가 근대과학이 시작되던 서양에서 과학의 성과에 대해 눈을 뜨고 있던 당시의 지식인들이 중세에 대해 가지는 태도에서도 드러나는 것 같다.(1) 베이컨이 {노붐 오르가논}을 쓰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도 바로 종래의 논리학의 체계가 사람들에게 끼치는 해악이었던 것 같다. 베이컨은 말뿐인 일련의 구별들에 의해 세계를 "만들어 내려는" 교만을 아담의 원죄로까지 비교하면서, 자연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피한 채 가만히 앉아서 추론과 개념의 연관에 대한 추상적인 사고를 통해 지적으로 엄밀한 거미줄만을 만들어내는 스콜라 학자들의 탁상공론이 다만 겉으로 그럴듯하기만 할 뿐이고 논쟁의 어려움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그는 {노붐 오르가논}을 통해서 '자유로이 내버려진 정신(이성)'이 가지기 쉬운 우상들을 지적하면서 자연의 사실들에 대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는 '탐구의 특수한 기법'을 배울 수 있도록 '지성을 정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2)

경험을 통해 진리를 확보하려고 하는 칸트도 바로 이러한 전통속에 있는 것 같다. 그도 오르가논과 카논을 구별하면서 논리학의 잘못된 사용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논리학은 두가지 의도에서 수행될 수 있다. 일반적인 지성사용의 논리학으로서 또는 특수한 지성사용의 논리학으로서. 전자는 지성이 사용되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사고의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규칙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지성이 향하는 대상들의 차이에 상관없이 지성을 사용하고자 한다. 특수한 지성사용의 논리학은 특정한 종류의 대상들에 관해 옳바르게 사고하는 규칙들을 포함하고 있다. 전자를 우리는 기본논리학이라 하고, 반면에 후자는 이런 또는 저런 학문의 오르가논(Organon)이라고 부른다."(B 76)

"일반적이면서도 순수한 논리학은 오직 선험적인 원리들만 다루며, 지성과 이성의 형식적 사용에만 관계하는 이들 지성과 이성의 규준(Kanon)이다."(B 77)

"인식의 단순한 형식은 그것이 논리적 법칙과 일치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인식의 질료적(객관적) 진리를 성립시키기에는 불충분하다. 때문에 누구도 단순히 논리학만 가지고 대상을 판단한다든가 어떤 것을 감히 주장할 수는 없다. 먼저 논리학 밖에서 확립된 탐구(Erkundigung)를 끌여들여야 하고 그 다음에 이러한 탐구를 논리적 법칙에 따라 연관된 전체속에서 이용하고 결합하려고 해야한다. 아니 그 탐구를 오직 논리학의 법칙에 따라서 시험해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모든 인식에 지성의 형식을 줄 수 있는 - 이런 인식의 내용은 매우 공허하고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 그럴듯한 기술을 소유하고자 하는 유혹때문에, 인식을 판정하는 규준(Kanon)에 불과한 저 일반 논리학이 객관적 주장을 현실적으로 산출하기 위한, 아니면 적어도 객관적 주장인듯한 환상을 위한, 오르가논인 것처럼 사용되어 왔고 또 실제로도 잘못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오르가논이라고 잘못생각된 일반논리학을 변증론이라고 한다."(B 85)

선험적 변증론이란 위의 유비를 따르면, 경험만이 지성의 순수한 개념이 적용될 수 있는 질료를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서까지 사용하려고하는 유혹에 빠져서 순수한 지성의 순 형식적 원리를 질료적으로 사용하게 되고 그리하여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도 않고 또 주어질 수도 없는 대상이 무차별적으로 있다고 판단하는 위험에 빠져있는 것을 말한다. 이는 곧 중세에 진리의 원천으로 간주되어 왔던 이성의 사유 및 추리 능력에 대한 경종이고 절대적 진리의 담지자인 신의 존재를 사색하던 변증론에 대한 평가절하이다.

2. 이성의 추론능력

선험적 변증론이란 이성이 지니고 있는 추리능력과 전체적 인식(절대적 완전성)의 요구가 만나서 일어나는 불가피한 착각에 대한 논의라 할 수 있다. 이제 이 불가피한 착각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칸트에 의하면 지성은 규칙(Regeln)의 능력이고 이성은 원리(Prinzipien)의 능력이다. 즉 지성이 규칙들을 매개로해서 현상들을 통일하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이성은 지성의 규칙들을 원리들 아래로 통일하는 능력이다.(B 359) 이성은 원리로부터 현상을 보는 능력이다. <원리로부터의 인식>은 특수를 보편 안에 포섭해서 인식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이성이 가지는 논리적 능력인 간접추리의 능력, 즉 삼단논법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삼단논법은 대전제, 소전제 그리고 이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단논법에서 대전제는 보편에 대한 판단이고 결론은 특수에 대한 판단이다. 따라서 삼단논법을 통한 인식 즉 결론을 대전제와 소전제로부터 도출함으로서 인식한다는 것은 특수에 대한 판단을 보편에 대한 판단아래로 포섭시킴으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말하고자 하는 원리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대전제로부터 결론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대전제의 보편명제는 지성이 범주를 통해 제공할 수도 있다. 즉 경험을 통해 인식될 수 있다. 칸트가 말하는 원리란 경험을 초월하여 <개념에만 의해서 이루어지는 종합적 인식>을 말한다. 이성은 추리작용에 의해서 지성의 다양한 인식을 최소수의 원리로 환원하고 그리하여 지성의 다양한 인식들에 최고의 통일을 주려고 한다.

3. 순수이성의 원칙

순수 이성이 원리를 통해서 지성의 다양한 인식들을 통일하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지성이 감성에 주어지는 것을 종합통일하기 위한 원칙(Grundsatz)을 가지는 것처럼 이성도 원리에 의한 종합통일을 위한 원칙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성의 원칙에 관해 칸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둘째로 이성의 논리적인 사용은 자기 판단(결론)의 보편적 조건을 추구하는 것이다. 판단의 조건을 보편적 규칙(대전제)에 포섭함에 의해 이루러지는 이성추리는 그 자신 하나의 판단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규칙도 또다시 이성의 마찬가지의 시도에 놓여지고 그리하여 (전방 삼단논법의 의해) 조건의 조건을 가능한데까지 추구해야 한다. 이때문에 (논리적 사용에서의) 이성일반의 고유한 원칙이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충분하게 알려진다: 지성의 제약된 인식에 대해 그것의 통일이 완성되는 무제약적인 것을 발견하는 것.
그러나 이 논리적인 준칙이 순수이성의 원리(3)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가정을 통해야 한다. 즉 제약된 것이 주어져 있으면 순차로 종속되는 제약들의 전 계열 - 따라서 이것은 무제약적이다 - 도 주어져 있어야 한다(즉 대상과 대상의 연결에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가정"(B 364)

위에서 우리는 이성의 간접추리인 삼단논법을 통해 어떻게 이성이 무제약자로까지 올라가게 되는지를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이념들의 발생과정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제약들의 전 계열>과 <무제약자>의 관계를 설명한 칸트의 다음 글을 살펴보자.

"따라서 이성의 선험적 개념이란 하나의 주어진 <제약된 것>에 대한 <제약들의 전체(Totalität)>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데 무제약자만이 제약들의 전체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뒤집어 말하면 제약들의 전체란 항상 그 자신 무제약적이기 때문에 순수이성개념은, 그것이 제약된 것들의 종합의 근거를 포함하는 것인 한, 무제약자의 개념을 통해서 설명될 수 있다."(B 379)

즉 제약들의 전체 내지 전 계열이 전제됨으로 인해 이 전계열을 설명할 수 있는 무제약자가 필요하게 되고 그리하여 이념들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순수이성의 개념들, 즉 이념들을 산출해내는 순수이성의 원칙이 하나의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칸트가 끝끝내 물고 늘어지는 바로 이 전제가 그의 변증론에서 종래의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토대가 된다. '자아' '세계' '신'과 같은 순수이성의 개념들, 즉 이념들은 모두 위의 전제 위에서 건립된 개념들이므로 이 전제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칸트는 이들 이념들을 새롭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비판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무제약자 내지 제약의 전계열은 이성의 완전한 통일의 욕구에 의해 전제되지만 그러나 이것은 지성에 의해 파악되지 않는다. 즉 경험과 모든 현상을 초월해서 있다. 따라서 이 개념은 경험에 어떠한 사용도 가질 수 없다. 그런데 개념에 대응하는 대상이 구체적으로 주어지는 경우야 말로 이성의 순수한 사변적(실천적이 아닌 이론적) 사용의 본래의 의도이므로, 대상이 주어지지 않는 이념들은 말그대로 '한같 이념일 뿐'이다.

4. 이념의 종류

이글은 여러 이념들 중에서 '세계'와 관련된 안티노미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위의 원칙으로부터 안티노미가 어떻게 나타나며 그리고 안티노미에서는 위의 비판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려면 우선 이성의 간접추론의 여러 방식들에 대한 고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성추리는 경험과 직접적으로 관계하지 않고 지성의 개념과 판단에 관계한다. 특히 이들 개념과 판단의 통일을 위해서 이들은 관계에 주목한다. 따라서 지성의 개념 즉 범주에 의해서 표상되는 관계의 종류만큼 같은 수의 삼단논법(더 정확하게는 전방삼단논법(Prosyllogismus)의 종류가 있게 되고 따라서 같은 수만큼의 이성의 순수한 개념도 주어진다.

"우리들의 표상이 가질 수 있는 관계들 중에서 보편적인 것은 1. 주관(혹은 주체 Subjekt)과의 관계와 2. 객관(혹은 객체 Objekt)과의 관계이다. 그리고 여기서 객관은 현상으로서의 객관이거나 사고일반의 대상으로서의 객관이다. 이 세부구분을 위의 구분과 결합시키면, 우리가 개념이나 이념을 만들 수 있는 표상들의 모든 관계는 세 종류이다. 1. 주관에 대한 관계 2. 현상에서의 객관의 다양에 대한 관계 3. 모든 사물일반에 대한 관계"(B 390)

이러한 세가지 관계에 따라 정언적, 가언적, 선언적 추리의 세가지가 대응하고 이를 통해 다음의 세가지 무제약자가 구해진다. 1. 주관에서의 정언적 종합의 무제약자 2. 계열을 이룬 항들의 가언적 종합의 무제약자 3. 한 체계에 있어서의 부분들의 선언적 종합의 무제약자

이러한 세가지 종류의 간접추리(삼단논법)에 따라서 모든 제약일반의 무제약적 통일을 일삼는 선험적 이념들 즉 자아, 세계, 신이 제시되는 것이다.

5. 가언적 추론의 4가지 종류에서 파생되는 이율배반의 네가지 종류

그럼 이제 가언적 추론을 통해서 주어지는 이념인 '세계'에 관한 이율배반을 살펴보자.

세계라는 선험적 이념은 가언적 이성추리를 모방하여 현상에서의 객관적 조건들의 절대적 통일을 내용으로 삼을때 나타나는 것이다. 즉 이는 현상들의 종합에 있어서의 절대적 전체성에 관여한다. 그런데 이렇게 이성을 현상들의 객관적 종합에 적용하여 절대적 통일의 원리를 주장하려고 하면, 오류추리에서와는 달리 모순에 휩쓸리게 된다. 이러한 모순은 이성 자신의 본성에 따라 불가피하게 빠지게 되는 모순이다. 이제 이 이율배반의 발생근거를 살펴보자.

이성이 자신의 원칙(4)에 따라 현상에서의 객관적 조건들의 절대적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즉 범주를 경험의 한계를 넘어 무제약자에까지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그 범주의 종합이 하나의 계열을 이루어야 한다. 즉 하나의 제약된 것에 대해 (병렬적이 아니라) 일렬로 종속되는 제약들의 계열을 이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종속적인 관계에 있을때만이 제약들이 주어진 제약된 것에 관계해서 이미 전제되어 있고 이것과 함께 주어져 있다고 보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성의 원칙은 우리에게 주어진 제약된 것으로부터 이것에 대한 제약의 전 계열이 주어져 있다고 가정하고 그리하여 逆進的 종합을 통해 제약의 전 계열을 가능케 하는 무제약자를 찾아내려고 한다. 이때 이성은 이 무제약자가 경험에 내재적인지 경험을 초월하여 있는지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서 이성의 불가피한 이율배반이 생겨나는 것이다.

역진적 종합을 가능케하는 계열을 이루는 범주는 다음의 네가지이다.

첫째, 직관의 두개의 근원적 양인 시간과 공간이다. 우선 시간이 계열을 이룬다는 것은 자명하다. 현재는 모두 과거에 의해 제약된다. 따라서 제약된 것으로서의 현재는 제약으로서 과거의 전 계열이 주어져야 한다고 이성은 요구한다. 그러나 공간은 병렬적인 계열을 이룰뿐 종속적인 계열을 이루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覺知하게 되는 공간의 부분들에 대한 종합은 시간의 계기를 통해 이루어지고 따라서 계기적이다. 즉 공간의 한 부분은 다른 부분에 의해 한계지워지기 때문에 한계지워진 공간은 한계지우는 다른 공간을 제약으로 전제하게 되고 따라서 여기서도 하나의 계열이 성립하게 된다.(양의 범주와 관계하는 계열)

둘째, 공간에서의 실재성 즉 물질은 제약된 것이고 이 제약된 것을 내적으로 제약하는 것은 공간의 부분들이고 이 부분들은 또다시 부분의 부분들에 의해 제약된다. 따라서 여기서도 하나의 계열이 형성된다.(질의 범주와 관계하는 계열)

세째, 현상들간의 실재적 관계의 범주와 관련해서는 인과성의 범주만이 하나의 계열을 형성한다. 주어진 결과에 대해 원인은 제약을 이루는 것이요 따라서 여기서 궁극적 원인에까지의 역진적 종합의 계열이 성립한다.

네째, 양상의 범주와 관련해서는 현존하는 것 중의 <우연한 것>이 제약된 것으로 여겨지는 한에서 하나의 계열이 성립한다. 우연한 것은 지성의 규칙에따라 제약을 지시하고 여기서 이성은 이 제약의 계열의 전체에서 무제약적 필연성을 발견한다.

이상에서 우리는 제약들의 계열을 이루는 네가지 범주를 살펴보았다. 이성은 현상을 가능케하는 제약들이 계열을 이루는 한에서 이런 제약들의 절대적 완전성을 요구하며 절대적으로 완전한 종합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절대적 전체성 속에 포함되어 있는 무제약자를 구하고자 한다.

6. 이율배반의 발생 원천

그렇지만 이러한 절대적 전체성이 현상간에도 가능한지, 즉 다른말로 감성적 직관의 조건을 만족시키는지는 우리는 미리 결정할 수가 없다. 이러한 미결상황에도 불구하고 이성은 오히려 전체성이라는 이념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성의 원칙이 전제로 하고 있는 역진적 종합의 계열의 전체성이 두가지 방식으로 성립한다는 점이다. 칸트의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제약자는 다음과 같이 두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1] 전체 계열 중에서 성립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전체 계열 안에서 모든 항은 예외없이 제약되어 있고 제약들의 전부만이 단적으로 무제약적이다. 이경우에 배진은 무한하다고 말한다.혹은 [2] 절대적인 무제약자는 단지 계열의 한 부분이요, 계열 중의 딴 항은 그것에 종속되어 있으나 이 부분 자신은 딴 어떤 제약에도 종속하지 않는 것이다. 첫째의 경우에는 계열은 올라가는 방향에로 한계가 없다.(시초가 없다.) 즉 무한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열전체는 주어져 있는 셈이다. 하지만 계열에 있어서의 역진은 결코 완성되지 않고 단지 잠재적으로만(potentialiter) 무한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의 경우에는 계열 중의 첫째것이 있고 이것은 흘러간 시간에 관해서는 세계의 시초, 공간에 관해서는 세계의 한계, 공간의 한계 내에서 주어진 전체를 형성하는 부분에 관해서는 단순한 것, 원인에 관해서는 절대적 자발성(즉 자유), 변화하는 실재에 관해서는 절대적인 자연필연성이라고 각각 불리워진다."(B 445-446)

이제 우리는 이율배반의 발생근거에 대해서 보다 분명히 알게 되었다. 앞에서 우리는 이성의 원칙이 제약들의 전체도 주어져 있음을 전제로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이 전제가 바로 여기서 또다시 문제가 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위의 두가지 무제약자에 대한 해석은 바로 제약들의 전체가 주어져 있다는 전제 위에서만 이루어진다. 전체가 주어져 있다는 전제가 없다면 무제약자는 찾아질 필요가 없다. 경험에 근거하여 볼 때, 전체가 이미 주어져 있는지 아닌지는 결정될 수 없는 문제이다. 전체는 통일의 완전성을 추구하는 이성이 요구하는 바일 뿐이다. 이것은 직관과 경험에 뒷받침되지 않고 따라서 단지 한같 이념이 불과한 것일 뿐이다.

이율배반은 바로 이 제약들의 계열의 전체성 밖이 아니라 속에 무제약자를 위치시키려고 하는 노력에서 비롯된다. 전체성 속에 무제약자를 위치시킬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위의 인용문에서 본 것처럼 두가지가 있는 것이다. 대립되는 두 주장의 성립은 계열의 성격과 관계가 있다. 따라서 현상들의 계열의 절대적 통일을 추구하는 가언적 이성추리에서만 대립되는 주장의 양립인 이율배반이 성립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율배반의 모순은 다음과 같이도 해석될 수 있다: 이념이라는 (절대적) 제약을 객관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간주하게 되면, 그것은 규칙에 따르는 종합으로서 지성에 합치하고 그와 동시에 종합의 절대적 통일로서 이성에 합치해야 한다. 따라서 이 이념이라는 (절대적) 제약은 이성통일에 따르게 되면 지성에 대해서 과대해지고 또 지성에 다르게 되면 이성에 대해서 과소해지게 된다. 이로인해 피할 수 없는 모순이 생겨나게 되며 변증적인 싸움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칸트가 제시하고 있는, 자체상으로는 모순이 없을 뿐더러 자신의 필연적 조건을 이서의 본성 내에 가지고 있으면서 서로 대립하는 두 주장은 바로 위에서 말한 이성에 따르고자하는 입장(이성주의)과 지성에 따르고자 하는 입장(경험주의)을 동시에 만족시키고자 하는 허황된 욕구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둘중에 하나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며 포기해야 한다면 우리는 후자의 요건을 이념들에서 포기해야 할 것이다.

7. 이율배반의 성격

경험에 진리의 원천을 두는 칸트가 이율배반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이성이 추구했던 절대적으로 무제약적인 것이 결국은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게 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경험적인 것에만 타당할 수 있는 지성의 범주를 적용함으로써 생겨나는 동등하게 주장되는 두 입장의 대립이다. 이를 통해 칸트는 순수이성의 개념들인 이념들(Idee)이 다른 순수지성의 개념들과는 그 문법적 형식에 있어서는 구별되는 바가 없지만 실질적으로는 구분되는 것이고 또 구분되어야 함을 보여주고자 한다.

예컨데 '컵'이니 '동물'이니 '인간'이니 하는 개념들과 '자아'니 '신'이니 '세계'니 '자연'이니 하는 개념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구별되는 것이 없어 보이고 또 그리고 실제로 이런 개념들을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아무 무리없이 똑같이 주어로 사용하고 있지만 엄밀하게 철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이 양쪽의 개념들은 그렇게 무리없이 동등한 자격으로 주어자리에 올수 있는 개념들이 아님을 칸트는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후자에 속하는 개념들 즉 '신'이니 '세계'니 '자연'이니 하는 개념들을 주어자리에 위치시키고서 사용하려면 우리는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조그마한 방심이 곧바로 이성이 불가피하게 빠지게 되는 가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들 개념들에는 감성형식을 통해 주어지는 것에만 적용될 수 있는 범주들, 즉 순수지성개념들이 적용되어서는 안된다. 특히 이들 개념들에는 존재함축이 적용되어서는 안된다. 이들 개념들은 경험을 초월하여 있고 따라서 규제적으로만 사용될 수 있을 뿐이다. 개념의 분석으로부터는 절대로 존재가 분석되어 나올 수 없다. 마치 현대 양화논리학에서 전칭문장(예를들어 (x)Fx; 모든 도깨비는 뿔이 있다 같은 문장이 그 예)이 존재함축을 가질 수 없는 것처럼 전체성을 나타내는 위의 개념들도 존재함축이 부여되어서는 안된다. 이럴때만이 이념들은 이론적 사용에서 자신들의 제대로된 사용을 가지게 될 것이다.

8. 맺는말

베이컨의 '노붐오르가논'은 탁상공론의 논리를 통해 세계에 대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태도를 배척하고 실험과 조작을 통해 직접적으로 자연과 접촉하도록 새로운 논리체계를 만들고자 했다. 칸트의 '노붐오르가논'은 베이컨에 비해 훨신 더 광범위한 정리를 수행하고 있다. 물리학과 신학과 도덕과 종교의 대상을 그는 자신의 새로운 논리를 통해서 새롭게 정리해내고 유기적으로 적절하게 위치지우고 있다. 그렇지만 베이컨 칸트 둘다 경험을 중요하게 평가하는 방향으로 그들의 '노붐오르가논'을 전개시켜나갔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러한 경향은 과학의 위세가 아직도 막강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식지않고 있는 주요한 흐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 당시 이들의 평가가 실제로 옳바른 평가였는가는 역사적으로 재평가되어야 할 문제이다.

2) 김영식 편, {역사속의 과학} "베이컨 과학에서의 진리와 효용" 참조

3) 내가 보기에 이것은 원리(Prinzipium)가 아니라 원칙(Grundsatz)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4) 이성의 원칙(Grundsatz)은 다음과 같다: 만약 제약된 것이 주어져 있으면 제약들의 전체 합도 주어져 있다. 따라서 제약된 것을 가능케하는 무제약자도 단적으로 주어져 있다.(B 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