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에 대한 회의적 태도와 이에 대한 훗설의 반론

1. 들어가는 말

현상학은 철저히 반성을 통해서 수행되는 학문이다. 반성이란 체험의 본질적 특성(Wesensartung)을 현상학적 태도를 지니고서 순수하게 기술하고자 할 때에는 어디에서나 드러나게 되는 가장 일반적인 특징이며 따라서 반성은 순수 체험영역의 가장 일반적인 본질특성이다. 따라서 반성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는 곧 현상학 자체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로 연결되며, 현상학의 성립과 그 정당성 여부는 반성의 성립과 정당성에 의존한다고 볼 수 있다.

반성이라는 현상을 어떻게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반성에 대한 긍정적, 부정적 태도가 결정된다. 다음에서 우리는 반성에 대해 회의적 태도를 취하는 입장을 살펴보고, 그들이 반성을 어떻게 보고 있으며 이들 입장의 한계가 무엇이며 이것이 어디에서 파생하는지를 지적한 후, 후설이 의도하고 있는 반성의 의미가 무엇이며 그것이 체험일반과 어떤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연관 속에서 반성이 어떻게 정당화되며 또한 참된 궁극적 인식의 토대가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이러한 반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현상학이 어떻게 해서 모든 여타의 학문들을 궁극적으로 정초하는 학문에 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물론 여타학문과 현상학의 이러한 관계에 대한 해명이 또한 반성에 대한 정당화의 근거가 될 수도 있으며 또 되기도 할 것이다.

2. 반성이란?

반성이란 체험의 흐름과, 그 흐름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체험요소, 지향적인 것들) 모두를 명증적으로 파악하고 분석할 수 있는 그러한 작용에 대한 이름이다. 반성은, 또한 의식일반을 인식하기 위한 의식의 방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체험에 대한 반성, 즉 각각의 자아가 자신의 체험을 체험한다고 하는 것은, 자아가 자신의 체험을 가진다거나 "직접 보는(im Blick haben)"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체험에 대한 반성은 곧 각각의 체험이 "이념적 가능성"에 따라서 탐지되는(erblicken)것을 말하며, 반성이 향해지는 대상도 바로 그러한 이념적 가능성이다.

예를들어 우리는 다시떠올림(Widererinnerung) 속에서 반성을 수행함으로써 다시떠올려진 것에서 그것의 "지각되었음"을 반성할 수가 있으며, 또 미리떠올림(Vorerinnerung) 속에서 반성을 수행함으로써 미리떠올려진 것에서 그것의 "지각되어질 것임"을 반성할 수 있다. 게다가 우리는 자연적 태도에서 조차도 다음과 같은 것이 자명하다는 것을 안다: 즉 체험들은 단지 우리가 체험들에로 향해 있고 그 체험들을 내재적 경험 속에서 파악할 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파지(Retention)(원초적 떠올림(primären Erinnerung))내에서의 내재적 반성속에서 "방금" 있었던 것으로 "아직 의식"되고 있는 그러한 체험들도 실제적으로 있었던 것일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우리의 의해 체험된 것이었다는 것, 그리고 직접적인 파지와 하나의 짝을 이루는 직접적인 예지에 있어서도 그 속에서 반성되는 체험들이 실제적이라는 것이 자명하다는 것을.

다른 한편으로 반성은 체험에 대한 반성이면서 그 자체 또 하나의 체험이며 따라서 반성 그 자체가 새로운 반성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반성은 계속해서 높은 단계의 상응하는 반성을 통해서 분석될 수 있고 이것은 원리적으로는 무한히 반복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무한히 소급될 것만 같은 반성에 대한 반성은, 반성에 대한 형상적(eidetisch) 기술을 수행하는 현상학적 태도 위에서 비로소 종결될 수 있다. 즉 반성에 대한 반성 -- 이는 반성되지 않은 것이다 -- 을 포함한 모든 체험의 흐름은 체계적인 완전성을 목표로하는 학문적인 본질 연구 아래로 종속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체험의 흐름에 대한 연구는 고유하게 짜여진 다양한 종류의 반성적 작용들 속에서 수행되는 데, 이 때의 이 반성적 작용 자체도 또한 다시 체험의 흐름에 속하며 따라서 더 높은 단계의 상응하는 반성들 속에서 현상학적 분석의 대상으로 될 수 있고 또 되어야만 하며, 그리고 바로 이러한 현상학적 분석을 통해서 방법과 그 내용이 일치함으로써 반성의 무한한 반복을 중지시킬 수 있는 절대적 정초를 획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으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반성을 현상학적으로 분석하고 이러한 분석이 어떻게 무한소급을 끝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우선 이러한 반성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주장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이러한 회의적인 입장의 기본전제와 그것의 한계를 분명히 보여 줌으로써 우리는 현상학이 가지는 절대적 정초, 절대적 정당성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훨씬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3. 반성에 대한 회의적인 견해

반성을 통해 확실한 인식을 획득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반성을 경험적-심리학적 태도 위에서 해명하고 그것의 한계를 비판하고 있다. 바트(Watt)의 회의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우리가 직접적인 체험함(Erleben)에 대한 인식에 어떻게 도달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결코 어떤 추측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체험함은 앎도 앎의 대상도 아니며 그것과는 다른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관찰의 대상들의 알려진 현실성의 반대편에 현재의 나와 현재의 의식체험들의 현실성이 서 있다. 이러한 후자의 현실성은 체험된다. [즉 단지 체험될 뿐, '알려지지' 않는다. 즉 반성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성은 절대적 현실성이다."

"각자는 체험함을 단적으로 수행한다. 단지 각자는 그 체험함을 알지 못할 뿐이다. 만약 그가 만약 안다고 한다면, 그는 자신의 체험함이 실제로 절대적으로 자신이 생각한 것 그대로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현상학은 완전히 삶 속으로 몰입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과연 누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현상학이란 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떤 의미에서 가능한가? 이러한 의문들이 주위를 맴돌고 있다. 아마도 실험심리학으로부터 자기관찰의 문제를 논의해보면 그것이 그 영역에 새로운 빛을 던져줄지도 모든다. 왜냐하면 현상학의 문제는 또한 실험심리학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문제와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실험심리학에서의 대답은 보다 조심스러울 것이다. 왜냐하면 실험심리학에서는 현상학의 발견자가 가지고 있는 열정이나 흥분이 제거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험심리학은 항상 자기 자신으로부터 귀납적인 방법에 의존하고 있다."

체험함에 대해 체험함, 즉 반성에 대한 바트의 이러한 회의적인 결론에 대한 후설의 대답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현상학에서 행해지는 반성은 바트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반성이 아니다. "현상학적인 본질론은, 현상학자가 자신의 현상학적인 확정(Feststellung)을 위해서 토대로서 사용하는 그러한 체험들의 현존(Existenz)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기하학이 어떻게 칠판 위의 도형이나 옷장의 本들의 현존을 방법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과 같다. 기하학이나 현상학은 순수 본질에 대한 학문으로서, 실제적 현존에 관한 어떠한 확정된 대답도 알지 못한다. 이러한 학문들에서는 분명한 허구가 실제적 지각이나 경험만큼 좋은 토대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넓은 범위에 있어서는, 더 좋은 토대를 제공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따라서 본질확정을 목표로 하는 현상학적 반성은 현존하는 것(Dasein)을 확정하고 그 범위를 찾고자 하는 심리학적 반성과는 그 차원이 다른 것이며 또한 반성의 정당성 내지 권리에 대한 평가도 전혀 다른 시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에 대한 다음과 같은 재반론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현상학이 사실과학이 하는 것과 같은 "경험"이나 "관찰"을 결코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현상학은 여전히 반성되지 않은 체험들에 대한 본질확정을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본질확정은 반성적 본질직관에 의해서 수행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성적 본질직관도 일종의 반성이라고 할 때, 모든 종류의 반성, 즉 반성 일반이 의심의 눈길을 피할 수 없는 한, 이러한 반성적 본질직관도 의심의 영역 밖에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이러한 본질직관을 토대로 하고 있는 현상학도 의심스러운 학문이 될 수 밖에 없다.

"현상학자의 시선이 체험에로 돌려질 때에야 그때 비로소, 그 체험은 이제 그에게 주어진 것으로서의 체험이 되며....... 파악된 본질은 단지 반성된 체험의 본질일 뿐이며, 따라서 반성을 통해서 절대적으로 타당한, 즉 체험일반에 대해, 즉 그것이 반성된 체험이든 반성되지 않은 체험이든 상관없이 모두에게, 타당한 인식을 획득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은 전적으로 근거없는 것이다."

현상학에서 행해지는 대상의 "현출방식"이나 "감각음영들"에 대한 반성을 살펴보더라도, 이러한 반성은 시선전향을 통해서 주어지며 시선전향을 통해서는 새로운 본질직관 속에서 새로운 것이 보여질 뿐이므로, 반성되지 않은 체험들의 본질적 구성요소들이 반성을 통해 파악된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마찬가지로 대상들의 "의미연관"에 대한 현상학의 반성도 확실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반성적인 "자기 관찰과 더불어, 기술되어야 할 체험의 대상적 연관이 변화되기" 때문이다.

4. 회의적 견해의 기본전제와 그 한계

만약 위의 재반론이 옳다고 한다면, 우리가 방금 바로 여기의 이 책에 주목했고 지금도 여전히 주목하고 있다고 확인하는 것 속에서 조차도 우리는 너무도 지나친 것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확인은 반성 이전에나 타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진정한 회의주의가 자신의 논증 속에 암묵적으로 자신의 주장이 부정하는 바의 것을 자신을 정당화시키는 가능 조건으로서 전제하는 원칙적 모순을 통해서 제시되는 것처럼, 반성에 대한 이러한 회의적인 태도도 이러한 모순 속에서 드러난다.

누군가가 단지 나는 반성이 지니는 인식적 의미를 의심한다라고 말하기만 하면 그는 하나의 모순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의심을 진술(aussagen)하면서 그는 반성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진술을 타당한 것으로 제시한다는 것은 곧, 반성이 그 의심시되는 인식 가치를 실제적으로 그리고 의심할 여지 없이 가진다는 것을, 그리고 반성은 대상적 연관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반성되지 않는 체험은 그것이 반성됨에 따라서 자신의 본질을 상실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회의적 논증은, 반성되지 않는 체험이나 반성되지 않는 반성에 대한 앎의 가능성이 문제되고 있는 동안에 이미 그러한 체험이나 반성에 대한 앎을 전제로 하고 있는 자기 모순 속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반성에 대한 회의가 동반하는 이러한 자기 모순은, 반성은 본질을 확정하는 인식작용으로 보되 반성작용 그 자체는 경험적(심리학적)인 관점에서 해석된 체험일반에 속하는 것으로, 따라서 반성작용 자체를 경험적인 파악의 대상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우리는 반성을 통해서만, 특히 부여하는 반성적인 직관(reflektive gebende Anschauung)을 통해서만, (반성되지 않은 체험과 그 체험에 대한 반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포함한) 모든 체험일반에 대해 참된 인식을 가질 수가 있다. 이러한 참된 인식의 근거인 부여하는 반성적인 직관은 단순히 "우리 인간에 있어서" 그리고 우리의 "심리물리적 구조"를 따르는 우연적인 인식의 방법이 아니며 따라서 경험을 통해서 확인되거나 거부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이러한 직관은, 경험적으로 파악되는 현존재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존재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기 나름의 소여방식과 인식방식에 일치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의 소여방식과 반성적인 직관의 인식방식은, 경험과 인간을 초월한 동일한 근원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이 둘은 서로 일치한다. 이 둘의 일치는 다음 장에서 반성과 체험일반의 본질적인 관계에 대한 현상학적 해명을 통해 보다 자세히 고찰될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모든 체험과 순수한 자아(das reine Ich)와의 본질적인 연관관계를 추적하는 현상학의 내재적인 본질 분석이, 내재적인 심리학적 기술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개념들의 확정을 위한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임을 확인하게 된다. 체험방식과 관련된 모든 본질 기술은, 가능한 경험적인 현존재에 대해 무제약적으로 타당한 규범을 표현한다. 특히 이것은 심리학적인 방법에 있어서 본질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모든 체험방식에 대해서도 무제약적으로 타당한 규범을 제공한다. 따라서 현상학은 심리학의 방법론적인 근본 물음들에 대한 재판소이다. 심리학자는 현상학이 일반적으로 확립해 놓은 것을 확장된 자신의 모든 방법론의 가능성의 제약으로서 인정해야하며 또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을 요구해야만 한다. 이것과 싸우려고 할 때, 바로 심리학의 원리적인 모순이 나타나게 된다. 이는 마치 물리학의 영역에 있어서 기하학적인 진리와 자연 일반의 존재론에 관한 진리에 거역하려고 할 때 자연과학의 원리적인 모순이 나타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러한 원리적인 모순은 따라서, 과연 자기 관찰이 가능한가라고 의심하게 되는 회의적인 생각을 실험적 심리학의 도정에서 심리학적 귀납을 통해서 극복하고자 하는 희망을 품음으로써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또한, 자연에 대한 물리학적 인식의 영역에서 우리가 위와 평행선상에 있는 회의, 즉 결국 모든 외적인 지각은 속고 있는 것이 아닐까(왜냐하면 실제로 각각의 지각은 따로따로 살펴보면 속을 수 있으니까)라는 회의를, 각 단계마다 외적 지각의 정당성을 전제로 하고 있는 실험물리학을 통해서 극복하고자 할 때에도 모순이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의 것이다.

이러한 모순들은 우리로 하여금 반성 자체에 대한 그리고 더 나아가서 반성 자체가 포함되는 체험일반에 대한 경험적-심리학적 이해가 아닌, 경험적이고 심리학적인 이해보다 더 근본적이면서 또한 이러한 경험적 이해를 궁극적으로 정초시켜주는 다른 방식의 이해를 요청한다. 이는 심리학적 이해와는 달리 자기 모순에 빠지지 않는 스스로를 자기 자신이 정초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절대적인 정초를 제공할 수 있는 이해 방식이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직관 내지 통찰(Intuition bzw. Einsicht)에 의한 본질 직관의 방식이다. 다음에서 이것에 의해 직관되는 체험일반 및 반성의 성격이 해명되고 이를 통해 반성의 정당성이 확보될 것이다.

5. 반성에 대한 절대적 정당성의 정초

다시 반성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에로 되돌아 오자. 본질직관에로, 원본적으로 부여하는 직관과 그 직관의 근원적으로 고유한 권리에로 되돌아감으로써 회의적 의심은 그 힘을 상실하게 된다. 이제 여기서 우리가 해야할 바는 그 원본적으로 부여하는 직관의 고유한 권리를 확보하고 정당화시키는 일이다. 이 작업은 원본적으로 부여하는 직관을 경험적이 아니라 현상학적으로 파악된 체험일반의 본질적 성격과의 관계 속에서 살펴봄으로써 수행될 것이다.

현상학적 분석을 통해서 파악되는 반성이 지니는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바로 반성이란 일종의 의식의 변양작용(Bewußtseinsmodifikation)이라고 하는 사실이다. 반성이 변양작용이라고 하는 말은 곧 모든 반성이 본질적으로 태도변경, 다시 말하면 선소여된 체험 내지 체험자료(반성되지 않은 것)를 바로 반성된 의식의 양태(즉, 의식된 것)로 변화시키는 그러한 태도변경으로부터 생겨난다는 것을 말한다. 본질적으로 모든 각각의 체험은 반성을 통해 변양될 수 있으며 그것도 여러 방향에서 반성을 통해 변양될 수 있다. 반성을 변양으로 보는 이러한 이해방식에서 우리는 반성의 절대적 정당성을 두가지 측면에서 정초할 수 있다.

첫번째의 측면은 바로 여기서 반성이 지니는 변양의 성격과 체험일반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변양의 성격을 비교하고 이 양자 사이의 본질적 연관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바로 이러한 연관에 대한 해명을 통해서 우리는 반성의 정당성을 정초할 수가 있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반성이란 이름하에 행해지는 모든 체험 변양은, 모든 체험일반이 원본적으로 진행하는 동안 겪지 않을 수 없는 (원본적 내지 관념적으로 수행되는) 일체의 모든 본질변양의 일종이다. 각각의 모든 체험은 그 자체에 있어서 하나의 생성의 흐름이다. 그 체험이 체험인 것은 그것이 불변하는 본질유형으로부터의 근원적인 산출 내에 있기 때문이다. 즉 체험의 흐름은, 파지와 예지의 영속적인 흐름이 생생한 지금으로 의식되는 스스로 흘러가는 원본적인 국면에 의해서 매개되는 그러한 흐름이다. 물론 이러한 근원적인 체험에 변양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가지 관념적이고 조작적인 변형(예를들어 다시떠올림, 미리떠올림, 환상등등)이 가해짐으로써 모든 체험은 무한히 반복적으로 변양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변양들 속에서도 각 체험들은 동일한 소여방식을 지니고 동일한 지향적 대상성을 지닌채 존속하는 평행물, "정확히 상응하는 짝(모사물)"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꺼꾸로 이러한 변양된 체험들로부터 근원체험에로, 현상학적 의미에서 절대적으로 원본적인 체험이라 할 수있는 "인상"에로 되돌아 갈 수 있다. 이러한 절대적으로 원본적인 근원체험은 그 체험이 구체성 속에서 체험되고, 항상 연속적으로 흐르는 절대적이고 원본적인 국면을 지니며, 따라서 항상 생생한 지금이라는 계기를 지닌다.

이러한 원본적인 국면위에서의 변양은 제 일차적인 변양으로서 반성되지 않은 채 의식된 체험에서 수행되는 변양이다. 바로 이러한 변양에, 반성되어 의식된 체험이 기반하고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반성은 구체적으로 받아 들여질 때 그 자체는 반성되지 않은 채 의식된 체험이며, 따라서 반성되지 않은채 의식된 체험이 지니는 제 일차적인 변양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로서 반성도 또한 모든 종류의 체험이 가지는 변양의 일종임이 분명해졌다.

반성이 새로운 종류의 일반적인 변양인 이상 우리는 반성에 대해서 그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자연적 태도에서도 분명히 확인되는 것처럼 직접적인 파지와 예지의 절대적 정당성(권리)은 자명하게 인정될 수 있으며, 바로 위에서 보여진 것처럼 반성도 일종의 반성되지 않은 체험으로서, 직접적 파지와 예지가 생생한 지금에 의해 매개되는 근원적인 체험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내재적인 지각의 절대적 정당성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아직" 생생하며 "방금"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는 내재적 파지의 절대적 정당성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심리학적 이해에서 주장된 "아직" 생생하며 "방금" 있었던 것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는 반성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에 의해 해소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직접적인 예지와 파지 및 이를 통해 주어지는 소여의 절대적 권리와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는 만큼 반성의 절대적 권리와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다. 완전한 명료성만을 진리의 척도로 삼는 원리중의 원리에 따른다면, 우리는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때 그때의 지금에서만 체험들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파지 속에서 파악되는 대상에 대해 그것이 있었음을 분명히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을 완전히 명료하게, 그리고 자명하게 인식하며 따라서 그것이 진리임을 확신할 수 있다.

예지와 파지와 관련하여 한가지 강조해야 할 것은 예지와 파지는 이전의 것이나 이후의 것을 파악하거나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예지와 파지는 "이전"이나 "이후"가 성립하기 위한 기반이다. 따라서 예지나 파지에 대해서 심리학적 이해나 방법을 토대로 해서 비판을 가할 수는 없다. 왜나하면 심리학적인 경험적이고 귀납적인 해석은 "이전"이나 "이후" 아니면 "나란히"를 자신의 방법론의 토대로 삼고 있는데 반해, 현상학적 태도에서 보여지는 예지나 파지는 바로 이러한 "이전"이나 "이후"의 가능성의 근거를 정초하려는 노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예지나 파지 원본적인 생생한 지금 등은 모두 체험의 가능성의 토대를 제공하는 절대적 정초이다. 이것으로 인해서 대상적 체험이, 그리고 의 체험이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초에 대한 비판은 곧 체험일반의 존재 일체를 거부하는 것이 된다.

반성에 대한 이러한 해석에 대해 그러나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반론을 정리하고 이러한 반론에 대한 대답을 제시함으로써 우리는 반성의 절대적 권리와 정당성을 정초할 수 있는 두번째 측면을 살필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이미 본 바와 같이, 반성은 변양의 일종이면서 또한 의식활동이 지니는 기본적인 변양의 본질적 구조를 보는 활동이다. 변양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이 두가지 계기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변하지 않는 것이란 바로 후설이 평행물이라고 했던 것이고 변하는 것이란 그 평행물이 각각의 상이한 여러 종류의 의식활동에서 변양되어 주어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현상학적 반성이 궁극적으로 수행해야 할 바란 바로 이 평행물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이를 토대로 변양의 성격을 일일이 규정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즉 평행물을 평행물이게끔 하는 하나의 본질요소나 본질유형을 찾아내고 그것의 변양과정의 본질을 찾아내는 것이라 하겠다. 그 본질 유형이란 바로 지금에서 본래적으로 산출되는 끊임없는 흐름이다. 즉 예지와 파지를 매개하는 영속적으로 흐르는 지금 속에서 비로소 모든 겹겹이 중첩된 변양의 최종적 기반이되는 원본적인 국면이 드러나게 된다. 이 원본적 국면을 밝히어 내는 것이 바로 현상학에서 수행되는 반성이다.

그러나 앞에서 본 것처럼, 이러한 반성도 또한 하나의 반성되지 않은채 의식된 체험이다. 즉, 이 반성도 원본적 국면의 일종이다. 이 원본적인 국면을 벗어난 의식의 체험이란 있을 수가 없다. 모든 체험, 체험대상, 체험의 요소들이 이 원본적인 국면위에서 이 국면에 따라서 주어진다. 현상학에서의 반성은 원본적인 국면이면서 또한 이 원본적인 국면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겹겹의 변양을 그 고유성에 따라서 포착해 내는 의식의 작용이다. 따라서 반성은 현상학적 작업의 기반이 되면서 동시에 현상학적 탐구의 제일차적 대상이 된다. 반성은 모든 체험일반이 원본적인 국면으로부터 어떻게 변양되어 주어지고 있는가를 가장 밑바탕에서부터 보여줌으로서 모든 체험, 모든 관념적 수행, 모든 언어활동을 정초하는 활동이면서 동시에 반성 그 자체는 반성의 대상이 되는 원본적인 국면에 포섭된다.

여기서 우리는 반성이 원본적인 국면의 일종이며 이 원본적인 국면의 절대적 정당성이 또한 반성의 의해 파악된다고 하는 순환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순환을 통한 정초가 과연 반성의 절대적 권리에 대한 정당한 정초라고 할 수가 있는가? 이는 단지 하나의 악순환을 보여줄 뿐이며 따라서 이것은 반성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의 한계를 폭로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우리는 순환성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순환성을 단지 하나의 악순환으로만 해석해야 할 것인가라고 오히려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우리는 앞에서 반성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과 그 해석의 회의적인 결론이 결국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됨을 살펴보았다. 경험주의의 교설은 경험에 의해 정당화되지 못한다. 그러나 직관은 자신의 직관주의 교설을 스스로 정당화시킬 수 있다. 절대적 정초란 자신의 정초를 다른 것에 두지 않음을 말한다. 자신의 정초를 다른데서 구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자신의 정초를 자기 자신 속에서 찾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순환성은 악순환이 아니라 오리려 정초의 절대성을 위한 기반이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순환성은 후설이 강조한 바와 같이(S. 161), 방법의 문제가 그 방법이 적용되는 본질적인 구조와 별개의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요구를 충족시켜준다. "방법이란 결코 외부로부터 하나의 영역내로 끌어와진 것(Heranbrachtes)이거나 끌어와져야만 하는 그러한 것(Heranzubringendes)이 아니다. 특정한 방법은 자신의 영역과 그 영역의 일반적인 구조들에 고유한 근본 특징으로부터 생겨나는 규준(Norm)이며 따라서 그러한 방법을 파악하고 인식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구조들의 인식에 본질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반성에 대한 위에서의 순환적 이해에서 반성과 반성에 의해 파악되는 대상의 본질적 구조간의 밀접한 일치를 확인하지 않을 수 없으며 바로 이것에서 반성에 대한 후설의 이해가 방법과 본질구조가 서로 괴리되지 않는 그러한 이해임을 보게 된다.

그리고 한가지 덧붙인다면, 이러한 순환성에서 또한 우리는 현상학의 방법이 일종의 改宗과도 같다는 후설의 말의 진의를 이해하게 된다. 개종이란 세계관의 변혁을 말한다. 이것은 합리적인 이행과정을 통해서 이것에서 저것에로 넘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비약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세계에서 전혀 다른 생각지도 못했던 세계로 새롭게 발을 내딛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약이 지니는 폐쇄적 국면이 바로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은 순환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정초하는 것이기에 이러한 세계에 대한 이해는 이러한 세계로 직접 발을 디뎌놓기 전에는 언제나 그 세계는 전혀 다른, 이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다.

5. 결론

이상으로 우리는 반성이 정초될 수 있는 기반을 체험의 흐름의 본질적인 구조와 연관시켜 해명해 보았다. 반성이 정초될 수 있는 것은 체험의 흐름의 본질적 구조가 생생한 원본적인 지금이 예지와 파지를 끊임없이 매개하는 구조라는데 기반하고 있다. 파지와 예지, 그리고 생생한 지금이라는 체험의 근본구조가 절대적으로 정당한 만큼, 이러한 근본구조에 포섭되어 있는 반성작용도 그 만큼 자신의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예지와 파지가 경험적 체험을 포함한 모든 체험의 가능성의 근거라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하며, 따라서 경험을 기반으로하는 심리학적 방법이 절대로 현상학적 해석에 대한 비판의 도구고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이 항상 강조되어야 한다.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인식은 곧 현실적인 것들에 대한 인식이며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주장들이다. 그러나 현상학적 인식은 곧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며 그것도 본질적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다. 가능성의 인식은, 현실적인 것이 현존하는 것으로 그리고 하나의 대상성으로 존재할 수 있게끔 하는 최소한의 본질구조에 대한 인식이므로 이러한 가능성에 대한 인식은 현실성에 대한 인식에 선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가능성의 인식은 현실성의 인식의 기반이다. 이는 곧 다른 말로 하면 현상학적 인식이 일체의 모든 경험적 인식의 기반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정초의 순환적인 측면은 결국 후설에 있어서는 자아(순수자아, 경험적 자아, 인격적 자아 등등을 포함한 모든 자아 일반)의 여러 변양된 형태들간의 상관관계에 대한 복잡한 해명 문제로 끊임 없이 제기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순환성이 지니는 참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끊임없이 자아를 해명함에 있어서 빠져나올수 없는 악순환에 휘말려 들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