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관의 두 측면

 

1. 문제제기

(1) "나는 이 책을 본다"
(2) "나는 이 책이 펼쳐져 있음을 본다"

지각의 가장 전형적인 예로 들 수 있는 이 '본다'라는 표현이 위에서 두가지 방식으로 쓰여지고 있다. 우선 문법적으로 보면 (1)은 봄의 목적어가 명사이며 (2)는 봄의 목적어가 절이다. 이 문법적 차이에 상응하여 (1)에서는 봄의 대상이 사물이며 (2)에서는 봄의 대상이 사태이다. 사물과 사태에 대해 둘다 우리는 '본다'라는 말을 사용한다.

하나의 표현의 두가지 용법에서 우리는 '본다'라는 표현이 지니는 긴장을 감지한다. 이 긴장이란 바로 '본다'라는 표현의 변하지 않는 측면과 변하는 측면 사이의 긴장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이 물어볼 수 있다: 봄의 이 두 대상의 차이란 본질적으로 어떤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해서 이 성격이 다른 두 대상에 '본다'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인가? 이 둘의 '봄'이 지니는 같은 점은 무엇이며 다른 점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둘은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가? 아니면 아무런 관계도 없는가?

이 두 표현이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보는 대상 속에 둘 다 '책'이라고 하는 공통의 인자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봄'이라고 하는 지각작용의 두 측면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봄의 두 대상인 사물과 사태의 차이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해명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글은 '작용'(Akt)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더 자세히 말하면 '대상들을 구성하는 여러가지 다양한 작용들'을 도입하여 위의 차이들을 해명하고자 하는 후설의 시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앞으로 감성적 직관의 작용과 범주적 직관의 작용으로 크게 대별될 후설의 구체적인 해명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후설이 도입하고 있는 '작용' 개념부터 살펴보자.

2. 작용개념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이 작용이란 심리적 과정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작용은 대상을 구성하는 작용이다. 구성되는 대상의 성격에 따라, 즉 그것이 사물이냐, 사태냐, 그리고 사태 중에서도 개별적인 사태냐 일반적인 사태냐에 따라 작용의 성격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의식 중에 들어있는 모든 내용에 이 작용이 개입한다. 작용과 대상은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상관자이다. 이 작용 중에서 특히 술어화되는 대상을 상관자로 가지게 되면, 그 작용은 바로 의미부여작용(noesis), 그리고 객관화하는 작용(objektivierende Akt)이 된다. 앞의 두 예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바도 바로, 술어화 되기 직전으로부터 술어화 되어 하나의 문장이나 언표(Aussage)로 표현될때까지 그 사이에 개입되는 작용의 본성이 무엇이며 그 작용이 이전의 작용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를 해명하는 것이다.

후설의 현상학적 해명의 기반이 바로 이 작용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의미를 구성하는 의미부여작용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의미로, 즉 개념이라는 하나의 통일체로 형성되기 이전의 선술어적 파악의 영역에서 조차도 그 영역에 속하는 대상에 상관적인 작용이 있다. 이 상관적인 작용이 있는 이상 우리는 현상학적 분석을 계속해서 수행해 들어갈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작용은 언제까지나 의식 내의 것이고 의식내의 것인 이상 우리는 음영 없이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그리고 자체로 주어지는 감각적 대상들도 이들 대상들을 구성하는 지각이라는 작용이 있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현상학적 분석을 더 계속해서 나가보면 지각 작용보다 더 밑바닥에 지각 작용이 토대를 두고 있는 또 다른 작용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대상은 모두 이런 구성 작용들의 결과물들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될 것은 구성작용이라고 해서 그것이 주관적인 작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작용에 관해 제일 먼저 말했던 것처럼 작용은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작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 처해서 그 상황의 영향에 의해 초래되는 심적인 변화를 우리는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관여하고 있는 작용들이란 자체로 주어진다고 생각되는 객관적인 상관자를 구성해내는 작용들이다. 이 작용은 너만의 작용도 너만의 작용도 아니며 어쩌면 인간만의 작용도 아닐 지도 모른다. 가장 밑바닥에 되는 작용, 즉 그 極(Pole)에 있는 작용은 나와 너 그리고 나와 나의 외부세계를 초월한 그 어떤 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나'도 '너'도 '주관'도 '주관 밖의 세계'도 모두 이 극의 작용에 의해 구성된 객관적인 상관자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작용들의 이 모든 위계를 낱낱이 해명하는 작업은 모든 세계를 하나의 관점 아래로 통일시키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것은 이정도로 해두고 여기서는 문제가 되는 감성적 지각과 범주적 지각 사이의 차이를 불러일으키는 데 개입하는 작용들의 성격을 살펴보자.

3. 감성적 지각으로 충족되지 않는 의미지향

(1)의 표현에서처럼 명사적 표상들 뿐만 아니라, 앞의 (2)의 표현에서 보이는 것처럼 문장의 형태로 표현되는 완전한 언표(진술)에 대해서도 지각을 바탕으로 한 충족(여기서는 봄)이 이루어지는 이 자명한 사실로부터 후설은 다음과 같이 의문을 제기한다.

완전한 언표(Aussage)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완전한 언표는 우리의 지각을 표현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나는 이 종이, 잉크병, 많은 책들 등등을 본다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또한 나는 이종이가 쓰여져 있음을 본다, 여기에 청동으로 만든 잉크병이 있음을 본다, 많은 책들이 펼쳐져 있음을 본다 등등 이라고도 말한다. 모두에게 명사적 의미들의 충족이 충분히 분명한 것으로 드러날 때, 우리는 전체 언표의 충족은, 특히, 자신의 "질료(Materie)"를 넘어서는, 즉 여기서는 명사적 용어들을 넘어서는 것들에 대한 충족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게 된다. 문장형태 그 자체를 형성하는 의미계기들 - 여기에는 예를들어 계사(Copula)가 포함되는데 - 즉 "범주적 형식"의 계기들에 충족을 제공할 수 있고 또 해주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40)

사태에 대해서도 지각에 의한 충족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태가 지니는 부분들과 형식들에 평행하게 상응하는 지각의 부분들과 형식들이 있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즉 사태의 의미지향이 의도하는(meinen) 대상을 그것이 의도하는 그대로 지각이 현출시켜주지는 못한다. 이는 다음의 세가지를 통해 보여질 수 있다.

첫째, 흰 종이(weißes Papier) 라는 말에서 은 흰 종이 자체에 있는 어떤 것을 의도하고 있다. 이 의도가 흰 것에 대한 단적인 지각에 의해 충족되는가? 아니다. 단순히 일부분만 충족시킬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위의 흰 종이에서 희-인(weiß-seindes)으로 분석될 수 있는데 단적인 지각은 이 seindes의 부분은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 이 흰 종이이 종이는 희다의 차이에 상응하는 지각의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자. 이 두 표현은 언표 형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어도 단적인 지각에서는 동일한 내용을 가진다.

세째, 범위를 넓혀서 이념적인 통일체들 사이의 관계를 보편적으로 표현하는 판단을 살펴보자. 이러한 보편적인 판단도 그것이 참된 지식이라는 의미에서 인식(Erkenntnis)인 한, 충족(Erfüllung)과 고유성(Identifizierung)을 지닐 수 밖에 없다. 단적이 지각에서는 이 충족과 고유성이 동시에 만족된다. 즉 평행관계가 성립했다. 그러나 이 보편적인 판단의 경우에는 충족은 직관(Anschauungt)에 의해 제공되지만 보편적 판단이 나름대로 의도하는 고유성(Identifizierung)은 직관에 의해 제공되지 않는다. 직관에 의해서 명료함의 충족, 명증성이 충족은 제공되지만 보편적인 판단의 의미지향은 직관을 통해서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의 의미(의도)가 주어지기 위해서는 새로운 작용이 덧붙여져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도 단적인 지각에서 보여졌던 평행론이 깨어진다.

4. 감성적 소재(Stoff)와 범주적 형식 사이의 구분

따라서 우리는 형식을 갖춘 표현에서, 지각 가능한 것이 무엇이며 의미지향, 내지 의도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신중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이 둘에서 상응하는 것이 무엇이며 상응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별해 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의도가 충족되는 부분과 충족되지 않는 부분을 구별해 내야 한다. 바로 여기서 상응하는 부분이 의미지향 중의 소재적 성분이고 상응하지 않는 부분이 형식적 성분이다. 예를들어 어떤 S는 P이다, 모든 S는 P이다, 이 S는 P이다에서 SP에 해당되는 부분이 지각에서 자신에게 들어맞는 어떤 것을 직접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소재적인 요소들이며 어떤, 모든, 이, 이다가 바로 판단을 완전하게 하는 형식적인 요소들이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 만한 형식적 요소의 예는 이다/있다(sein)라는 개념이다. 이다/있다(sein)는 그것이 존재적으로 쓰었든(있다), 술어적으로 쓰였든(이다), 한정적으로 쓰였든(-인) 그것은 어떤 실재적(real) 술어도 아니다. 이것은 내감이든 외감이든 어떤 직관에서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찾아낼 수 없다. 또한 이다/있다(sein)는 자체로 주어지지도 않는다. 이다/있다(sein)가 자체적으로 주어지는 경우는 모종의 사태(Sachverhalt)를 우리가 알아채는(Gewahrwerden) 경우이다. 명사적인 대상이 자체로 주어지듯이 하나의 사태도 자체로 주어질 수 있으며 따라서 충족될 수 있다. 그렇지만 사태가 주어질 수 있기 위해서는 이 사태를 부여하는 모종의 작용이 있어야 한다.

5. 감성적 직관과 범주적 직관의 동종성

단적인 지각에서는 아니지만 형식들도 충족을 발견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2)에서 보듯이 의심할 수 없다. 단적인 지각이 소재적인 것에 대해 수행하는 충족과 동일하게 사태의 범주적인 의미요소들에 대해 충족을 수행하는 작용을 우리는 가지는 것이다. 직관 개념을 확장하면서 후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충족기능 및 이 충족기능과 합법적으로 관련하고 있는 모든 이념적 관계들의 본질적인 동종성은 <확증적으로 스스로를 제시하는 방식을 통해 충족을 완수하는 모든 작용>을 지각으로, 모든 충족작용 일반을 직관으로, 그것의 지향적인 상관자를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사실 우리는 범주적 형식화을 갖춘 의미들이 충족을 발견한다는 것, 또 그것들이 지각속에서 확증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 물어볼 수 있고 그것에 대해 오직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범주적 형식을 갖춘 의미들이 대상을 범주적으로 형성하면서(in seiner kategorialen Formung) 대상 자체와 관련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범주적 형식들을 지닌 대상은 단순히 기호적으로 기능하는 의미들의 경우에서처럼 단지 생각되기만(gemeint)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대상은 바로 이러한 형식들 자체로 우리 눈 앞에 주어진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 대상은 단순한 사고의(gedacht)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직관 내지 지각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충족이라는 말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이며, 형식화된 의미들이 표현하는 것 내지 형식화된 의미들 속에서 형식요소들이 표현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형식화된 의미들에 상응하는 통일적인, 또는 통일성을 부여하는, 객관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자마자 우리는 불가피하게 "직관" 내지 "지각" 그리고 "대상"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이 말들을- 우리는 이 말들의 확장된 의미를 오해의 여지없이 명백히 알고 있다 - 결코 없앨 수 없다. 대상이라는 말을 거부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비감성적 내지 감성적이지 않은 형식들을 포함하는 주관표상의 상관자들>을 지적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지각이라는 말을 거부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대상이 구체적으로 "주어지는 것" 내지 "주어진 것"으로 현상하는 것을 이름붙일 수 있겠는가? (§45)

이 초감성적인 지각과 감성적인 지각을 모두 포괄하는 확장된 지각 개념이 가지는 특성이 있다. 그것은 "이 작용 속에서는 어떠한 모종의 것도 현실적으로 그리고 자체로 주어지는 것으로 현출"(§45)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충족이라는 말로 나타내고자 하는 바이다.

범주적인 형식들도 단적인 지각과 마찬가지로 충족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충족의 방식과 충족되는 대상은 서로 다르다. 단적인 직관에서 충족되는 대상, 현실적으로 그리고 그 자체로 주어지는 대상은 단적인 사물이든가 이 사물들의 외적인 연관들이다. 그러나 범주적인 형식들이 충족될 때의 그 대상, 즉 마찬가지로 현실적으로 그리고 그 자체로 주어지는 대상은 바로 문장 내지 진술으로 표현되는 하나의 구체적이거나 일반적인 사태이다. 충족시키는 작용은, 그 작용과 더불어 구성되는 대상을 현실적으로 그리고 자체로 주어진 것으로 현출시킨다고 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점에서 감성적 직관과 범주적 직관은 동종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차이를 무시할 수 없다. 이 둘의 차이를 보다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범주적 지각과 감성적 지각을 각각 현상학적으로 분석해 보는 일이 필요하다.

6. 감성적 지각과 범주적 지각의 차이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

6-1. 양 지각의 관계

감성적 지각과 범주적 지각의 구분이 필요한 까닭은 인식의 감성적 질료와 범주적 형식의 구분 내지 범주와 다른 개념들 간의 구분과 같은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구분들이 바로 이 두 지각의 구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 둘의 구분은 이 둘의 관계를 보여줌으써 보다 잘 보여 줄 수 있다.

각각의 모든 지각에 관해, 지각은 자신의 대상을 자체로 또는 직접적으로 파악한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이 직접적으로 파악함은, 좁은 의미에서의 지각이 문제되느냐 넓은 의미의 지각이 문제되느냐에 따라, "직접적으로" 파악되는 대상적인 것들이 감각적인 대상이냐 범주적인 대상이냐에 따라, 달리 말해서; 대상이 실재적인 대상이냐 관념적인 대상이냐에 따라 상이한 의미와 성격을 지닌다. 즉 우리는 감성적이거나 실재적인 대상들을 가능한 직관 중 가장 낮은 단계의 대상들로 특징지울 수 있으며 범주적이거나 관념적인 대상들은 더 높은 단계의 대상들로 특징지울 수 있다.(§46)

또한 아울러 후설은 감성적인 지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좁은 의미의 "감성적인" 지각 속에서는, 지각작용 속에서 >단적인< 방식으로 구성되는 대상이 직접적으로 파악되고 자체로 현전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다음과 같은 것을 의도하고 있다: 대상이 직접적으로 주어진 대상이라는 것은 바로, 이처럼 특정의 대상적인 내용을 지닌채 지각되는 이 대상이 다른 종류의 대상들을 지각하게하는 다른 작용들 속에 그 >토대를 둔<(fundiert) 관계시키고 연관시키고 그리고 그 밖에 파생되는 작용들 속에서 구성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이다.(§46)

그러나 모든 단적인 지각은 자신의 단적인 지각을 포함하거나 아니면 전제하는 새로운 작용들의 근거작용으로 기능하며, 거꾸로 이 새로운 작용의 측면에서 보면 이 새로운 객관성을 구성하는 작용은 단적인 지각에서는 주어지지 않았던 고유한 어떤 것을 현실적으로 그리고 그 그 자체로 주어진 것으로 현출시키는데 물론 이 새로운 대상적인 것들은 이전의 대상적인 것들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서로 상관적으로 볼 때 단적인 지각 작용은 정초지우는(fundierenden) 작용이 되며 새로운 객관성을 구성하는 작용은 정초지워진(fundiert) 작용이 된다.

6-2. 감성적 지각

감성적인 지각 속에서 "외적인" 사물들은 우리의 눈이 닿자마자 단번에 현출하며 어떤 정초지우거나 정초지워진 작용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감성적인 대상이 단적인 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말 그대로 단순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물들 속에도 이 사물을 구성하는 다양한 속성들이 존재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이 부분 속성들은 이 단적인 하나의 전체 지각 속에서 암묵적으로 존재한다. 이 암묵적인 부분이 명시적으로 되는데는 아무런 새로운 작용도 덧붙여지지 않는다.

.... 지각 작용도 또한 언제나 대상을 단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현전시키는 동종적인 통일(작용)이다. 지각의 통일은 따라서 나름의 종합적 작용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정초지워진 작용을 통한 종합의 형식만이 부분지향들에게 대상적인 연관관계의 통일성을 제공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선 말이다. 지각은 분절화도 또 실제적인 결합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지각의 통일은 단적인 통일로서, 부분지향들의 직접적인 융합으로서, 어떤 새로운 작용지향들의 추가도 없이 이루어진다.
더나아가 우리는 "한눈에"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오히려 우리는 언제나 연속적인 지각의 경과 속에서 감각을 가지고 거의 더듬어 찾아야 사물을 관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경과 중의 각각의 개별적인 지각은 이미 이 사물의 지각이다. 내가 여기 이 책을 위에서 보든 아래서 보든, 안에서 보든 밖에서 보든, 나는 언제나 이 책을 본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이 동일성은 단순히 물리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지각 자체가 품고 있는 것(Meinung)에 의해서이다.
여기서의 지각은, 독자적으로 이미 완전한 지각으로 기능할 수 있었던 부분들을 스스로 토막내 버린다. 이러한 지각들의 연속적인 지각으로의 통일은 그러나 하나의 새로운 객관의식을 구성하게 되는 그러한 고유한 작용을 통한 통일은 아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이 연장된 작용속에서는 객관적으로 새로운 어떤 것도 결코 의도되지 않고, 부분지각들이 개별적으로 받아들여질 때, 이미 의도했던 이 동일한 대상이 언제나 의도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47)

새로운 작용은 새로운 대상을 의도(meinen)하며 표상한다. 따라서 새로운 작용이 덧붙여지면 "감성"의 영역이 포기되고 "오성"의 영역이 발을 들여놓게 되고 그리하여 새로운 대상성이 생겨난다.

6-3. 범주적 지각

단적인 지각에서 암묵적으로 구분되어 있던 부분들을 명시적으로 꺼집어내고 이 꺼집어 낸 것을 서로서로이든 전체에 대해서든 관계를 지우는 새로운 종합 작용을 통해, 새로운 객체인 관계들(Verhältnisses)이 구성된다.

A는 ?이다?는 A 속에 있다라는 두가지 종류의 범주적 직관에서 보듯이 파악(Auffassung)의 관점에 따라, 즉 이행의 방향에 따라 동일한 관계가 현실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 두가지 선험적인 가능성이 존재하게 된다. 이 두가지 가능성은 정초지워진 작용들 속에서만 직접적으로 구성되며 자체로 주어질 수 있으며 "지각"될 수 있다. 감성적인 결함형식이 범주적인 형식을 구성하는 토대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리하여 구성된 대상은 감성적인 대상의 영역보다 더 높은 단계의 대상으로 주어지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쉽게 현상학적 분석에서 놓쳐버리는 형식화로 명사적 형식화가 있다. 명사적 형식화는 객관화 작용을 통해 의미(파악의미)의 변화를 일으키지만 이를 통해서 현출하는 대상의 감성적인 내용은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유지시킨다. 즉 이 형식화를 통해서는 범주적 연관 속에 배치되면서 단지 대상에게 하나의 특정한 자리나 역할, 관게항의 역할이 더 입혀질 뿐이다. 이 때문에 그 변화를 주관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놓쳐버리기가 쉽상인 것이다.

이외에도 범주적이고 종합적인 대상형식의 예들이 있는데 그 첫째가 그리고또는과 같이 그 자신이 사태는 아니지만 사태를 연결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는 집합자나 선언자와 같은 형식이며 둘째는 보편적인 직관의 영역 속에 있는 종합형식으로서 그 지향이 정초를 주는 지각들의 대상에로 함께 향하고 있지 않은 경우이다.

첫번째의 집합자나 선언자들도 단적인 지각의 대상으로는 자체로 주어질 수 없음은 분명하다. 우리는 둘 다는 그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두번째의 보편적인 직관들 속에서 구성되는 보편적인 대상들은 두 단계의 정초지워진 작용을 거쳐 이루어진다. 우선 원초적 직관을 토대로 해서 정초지워진 새로운 작용들 속에서 이데아화하는 추상이 이루어지고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이 개별적인 추상작용들을 종합으로 이끄는 포괄적인 동일화 작용이 섞여 짜여짐으로써 보편적인 규정 작용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따라서 보편적인 의도(Meinung)가 충전적 지각 속에서, 즉 상응하는 개별경우의 "실제적인" 추상을 통해서 구성된 하나의 새로운 보편성의 의식 속에서 충족되며 따라서 상관적인 대상이 자체로 주어지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며 반대로 보편적인 것을, 그것의 정립을 보류한 채, 단지 유비적인 방식으로 표상하는데서 머무르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보류의 상태에서는 그 보편적인 것의 "존재"나 "비존재"가 결정되지 않는다. 다만 그 보편성의 가능성만이 결정될 뿐이다.

7. 맺 는 말

이상에서 우리는 감성적 직관과 범주적 직관의 같은 점과 다른 점 그리고 그 둘의 상관관게에 대해 살펴보았으며 또한 감성적, 범주적 지각 사이에서 그리고 각각의 지각 속에서 나타나는 지향작용의 다충적인 구조와 그 구조의 다층성에 따라 달라지는 충족의 방식의 차이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이 두 작용의 차이를 통해서 실재적(real)이라는 말을 해명할 수 있게 되었다. 실재적이라는 말은 "현실적으로 그리고 그 자체로 주어지는 대상"에 대해서 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곧 충족되는 대상에 대해서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의식(Bewußtsein) 내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후설에 있어서 실재적(real)이라는 말은 따라서 특정의 대상 구성작용이 지니는 고유한 특성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Real을 외부의 실재와 관계시키고자 한다면 그것은 후설이 말하는 자연적 태도를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또한 우리는 충족을 획득하는 두가지 방법(감성적 직관의 방법과 범주적 직관의 방법)을 보았는데 이 충족도 또한 대상을 구성하는 작용의 성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정초지우고 정초지워지는 대상 구성 작용들의 성격들과 그 상관관계, 그리고 이러한 관계들의 반복적인 적용을 통해서 우리는 명사로 부터 문장으로 그리고 문장에서도 개체문장으로부터 연언, 선언 등의 결합문, 그리고 보편적인 일반문으로까지 나아가는 일련의 과정을 서로의 상관관계 속에서 해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후설의 이러한 전략은 칸트가 범주표를 나열함으로써 보여준 범주적 형식들의 평면적 나열보다는 훨씬 더 입체적이고 중충적인 범주적 형식들의 위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칸트는 감성, 오성, 이성의 3충 구조를 제시하고 각각에 서로 다른 존재론적 함축(즉 물체의 세계, 경험의 세계, 이성의 세계)을 걸어놓는 이원적인 구조를 보이는 반면에 후설은 모든 것을 하나의 원리인 대상 구성 작용으로 해명해 냄으로써 일원적인 세계상을 해명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 후설의 현상학이 모든 세계를 다 포괄해 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때문이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