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게와 후설에 있어서 의미와 그 지시체(대상)

 

1. 들어가는말

하나의 기호(낱말)나 표현(문장)을 내포와 외연으로 나누는 것은 논리학의 오랜 전통이다.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우리는 의미와 그 지시체(대상)으로 나눌 수 있다. 한 표현의 내포 내지 의미에 관한 논의는 이것에 암암리에 개입하기 쉬운 주관적 성향 때문에 논리학, 특히 형식논리학의 분야에서 배척되어 왔다. 한 표현의 외연에만 관심을 가짐으로써 형식논리학은 자신의 엄밀성을 유지한 대신에 세계의 모습에 대한 모든 발언권을 포기해버렸다. 그렇지만 세계에 대한 개념적 인식에도 모종의 질서가 있고 의미와 의미 사이에 포섭, 배척, 함축, 반대 등등의 상호 관계가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의미의 연관에 대한 탐구를 통해 세계의 통일적인 모습을 반성해보고자 하는 노력도 논리적 탐구라는 이름 하에 계속해서 있어왔다. 역사적으로 보건데 이러한 내포적 논리에 대한 탐구는 주관성의 개입을 완전히 봉쇄하지 못한 탓인지 모두가 공감하는 공통의 논리를 확보하는데 실패한 것 같다. 다만 한 철학자의 고유한 형이상학 내지 세계관으로 간주되어 왔을 뿐이다.

이러한 내포논리와 외연논리의 대립되는 경향을 심리주의가 팽배하던 동시대에 살면서 심리주의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했던 후설과 프레게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글은 후설과 프레게가 의미와 대상(지시체)을 어떻게 구분하는지 비교 고찰하고 이러한 구분이 각각 어떻게 외연적 논리체계와 내포적 논리체계로 전개되는 실마리를 제공하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2. 프레게에 있어서 의미와 지시체 그리고 대상

프레게는 [산술의 기초]에서 다음과 같이 탐구의 세가지 근본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프레게는 우선 표상(Vorstellung)과 상상(Imagination)으로부터 개념(Begriff, concept)과 사유(thought)를 구분한다. 전자는 주관적인 것이고 후자는 객관적인 것이다. 한사람의 정신적인 이미지를 자신의 이미지와 비교하거나 또는 전달하기 위해서는 전달의 과정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의식의 동일한 상태가 있어야 한다. 바로 이것을 가능케해주는 것이 상상과는 구별되는 사유이다. 우리가 서로 의사소통을 한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러한 객관적인 것으로서의 사유가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이렇게 개념의 객관성을 확보한 후 프레게는 개념과 대상, 의미와 지시체의 자세한 구분을 수행한다.

(1) 개념과 대상의 구분

개념과 대상의 구분은 프레게에 있어서는 한 문장의 논리적 구조를 파악하기 위한 기본개념이다. 전통적 논리학은 하나의 문장을 주어-술어 구조로 분석해 왔고 이를 근거로 삼단논법이라는 추리 형식까지 고안해냈다. 그러나 프레게는 이러한 주어-술어라는 문법에 일치하는 구조가 한 문장의 논리적 구조를 보여주는데 충분치 못하고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고 본다.

종래의 주-술 구조에서는 술어에 올 수 있는 것이 주어에도 오는 것이 형식적으로는 허용된다. 즉 '철수는 사람이다'에서 술어에 있는 '사람'이 주어가 되는 '사람은 죽는다'도 허용된다. 주-술 문장구조에서는 위의 두 문장은 형식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대상과 개념의 구조에서 본다면 위의 첫문장에서 우리는 하나의 대상(고유명사인 철수)과 하나의 개념(사람)을 가지는데 반해 두번째 문장에서는 두개의 개념(사람, 죽는다)만을 가질 뿐이다. 전자에서는 대상이 하나의 개념 아래 놓여 있으며(fall under) 후자에서는 개념이 다른 개념 안에 놓여 있다.(fall within) 개념과 대상은 주어와 술어처럼 동일한 위상위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2) 따라서 주어가 술어가 되고 술어가 주어가 되는 것처럼 개념이 대상이 되고 대상이 개념이 될 수는 없다. 개념과 대상은 서로 위상이 다르다.

프레게는 개념과 대상의 관계를 산술에서의 함수와 비교함으로써 그 관계를 보다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의 함수는 독립변수 기호가 들어갈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자리를 보여주어야 한다.

"내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독립변수(argument)는 함수에 속하지 않지만 함주와 어울려 하나의 완전한 전체를 이룬다는 것이다. 왜나하면 함수 그 자체는 보충의 필요 속에 있으며 불완전하다고 불리워지거나 '충족되지 않았다'(unsaturated)라고 불리워져야 하기 때문이다."(3)

함수의 이러한 성격을 프레게는 개념과 연관시킨다.

"함수 x2=1의 값은 항상 두가지 진리치 중의 하나라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어떤 하나의 독립변수 예를들어 -1에 대해 함수값이 참(True)이면, 우리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수 -1은 1의 제곱근이다.' 또는 '-1은 1의 제곱근이라는 개념 아래 놓여있다.' x2=1의 함수값이 독립변수 예를들어 2에 대해 거짓(False)이라면, 우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2는 1의 제곱근이 아니다.' 또는 '2는 1의 제곱근이라는 개념 아래 놓여 있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논리학에서 개념이라고 부르는 것과 우리가 함수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게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개념은 그것의 값이 언제나 진리값인 함수이다."(4)

"등식의 언어적 형태가 진술이다. 진술은 사유를 자신의 의미로 가진다.(적어도 가지고자 한다.) 이 사유는 대개 참이거나 거짓이다; 즉 이것은 대개 진리치를 가지며 이 진리치는 문장의 지시체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것은 숫자 4가 '2+2'란 표현의 지시체이고 런던이 '영국의 수도'의 지시체인 것과 마찬가지의 것이다.
등식이나 부등식, 분석의 대상인 표현들과 마찬가지로 진술도 일반적으로 두부분으로 나뉘어진다고 생각될 수 있다; 하나는 그 자체로 완전하고 다른 하나는 보충의 필요가 있으며 '충족되지 않은채'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음의 문장

'케사르는 가울을 정복했다'

를 '케사르'와 '가울을 정복했다'로 나눈다. 두번째 부분은 '충족되지 않았고' 빈자리를 포함하고 있다; 이 빈자리가 고유명사나 고유명사를 대신하는 표현으로 채워질때만이 완전한 의미가 드러난다."(5)

개념과 대상은 한 문장이 완전한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할 상이한 위상에 있는 두 요소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상이한 위상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개념과 대상의 위상을 달리 둠으로써 프레게는 대상에서 주관적인 요소를 모두 탈색시키고자 한다. 주관적인 요소는 모두 개념의 측면에로 넘겨버리고, 그 자신 너무 단순해서 정의 불가능하다고 간주한 대상을 개념과 대립시킴으로써 양화를 통한 외연논리로의 길을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과 대상의 구분은 의미와 지시체의 구분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2) 의미(Sinn,sense)와 지시체(Bedeutung,reference)의 구분

하나의 기호는 그것이 지시하는 바 즉 지시체 뿐 아니라 그 대상이 주어지는 방식인 의미와도 관계한다. 지시하는 바인 지시체는 같아도 그것이 주어지는 방식은 여러가지일 수가 있다. 따라서 동일한 대상에 대해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의미를 연상된 관념(Vorstellung)과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관념은 시간과 그것을 표상하는 사람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만약 주관적인 관념만이 있다면 한세대로부터 다음세대로 계속해서 내려온 인류가 가지고 있는 사유의 공통된 저장물을 거부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하나의 고유명사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하나의 고유명사는 자신의 의미를 표현하고(express) 자신의 지시체를 지시한다(designate). 하나의 기호에 의해 우리는 그것의 의미를 표현하고 그것의 지시체를 지시한다.

"하나의 고유명사의 지시체는 우리가 그것의 의미에 의해 지시하는 대상 자체이다. 그때 우리가 가지는 관념은 전적으로 주관적이다. 이 둘 사이에 의미가 놓여있다. 의미는 주관적이지고 않고 그렇다고 대상 그 자체인 것도 아니다."(6)

프레게는 비유를 통해 지시체와 의미 그리고 관념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누군가가 망원경을 통해서 달을 볼 때, 달이 지시체이고 그 달의 이미지가 망원경 렌즈 내부에 투영되어 있는 것이 의미이고 그것이 인간의 망망에 맺힌 것이 관념이다. 따라서 의미는 인간의 주관적인 조건들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인 것이다.

우리는 고유명사에 대해서 의미와 지시체를 가질 뿐 아니라 하나의 句나 문장에 대해서도 의미와 지시체를 가질 수 있다. 예를들어 서술문을 살펴보자. 서술문이 지시체를 가진다고 한다면 그 문장을 이루는 한 낱말이 동일한 지시체를 가지는 다른 낱말에 의해 대치되더라도 그 문장의 지시체는 변함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한문장이 가지는 사고내용(thought)은 낱말이 바뀌면서 같이 바뀌게 된다. 따라서 사고는 지시체가 될 수 없다. 이리하여 프레게는 지시체가 바뀌지 않는 것으로 그 문자의 진위치를 들고서 이를 문장에 대한 지시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 문장에 대한 프레게의 기본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는 말한다.

"... 누군가가 사유 이상의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는 의미로 만족할 것이다. 문장의 의미 즉 사유만이 문제가 된다면, 그 문장의 부분들의 지시체를 가지고 골치를 썩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부분의 지시체가 아니라 부분의 의미만이 전체 문장의 의미와 관계한다. '오딧세이'가 지시체를 가지든 않든 사유는 동일하게 남아있다. 우리가 문장의 부분들의 지시체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는 사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문장 자체에 대한 지시체를 인지하고 또 기대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문장의 부분등 중 하나의 지시체가 사라졌다는 것을 인정하자마자 사유는 우리에게서 가치(진리값)을 상실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문장의 의미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의 지시체를 물어간다는 것이 여기서 정당화된다. 그러나 우리는 왜 모든 고유명사가 의미 뿐 아니라 지시체를 가지기를 원하는가? 왜 사유만으로 우리에게 충분하지 않은가? 왜냐하면 그만큼 우리가 그것의 진리치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 진리에 대한 추구가 항상 우리를 의미로부터 지시체로 인도한다."(7)

프레게를 문장의 구조 분석에로 인도하는 것은 바로 진리에 대한 추구이다. 따라서 그가 한 문장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그 문장의 의미 즉 사유라기 보다는 그것의 지시체로서의 참 또는 거짓이라는 진리치이다. 한 문장의 지시체 즉 참 거짓의 조건을 그 문장을 이루는 낱말들의 지시체들과의 관련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하며 그러기 위해서 그는 문장을 주어-술어가 아닌 개념과 대상이라는 구조로 분석한다.

지시체에 대한 그의 선호는 다음 귀절에서도 잘 드러난다.

"관념론자나 회의주의자가 아마 곧바로 다음과 같이 반박할지도 모른다: '너는 아무런 꺼리낌없이 달을 대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달'이라는 이름이 어떤 지시체를 가지는지를 너는 어떻게 아느냐? 어떤 것이든 지시체를 가진다는 것을 너는 어떻게 아느냐?' 나는 대답하겠다: 우리가 '달'이라고 말했을 때 달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말하고자 했던 것도 아니고 의미만으로 만족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지시체를 전제한다. .... 한 기호의 지시체를 언급하는 것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말하거나 생각함에 있어서의 우리의 의도를 지적하는(point out our intention) 것으로 충분하다."(8)

지시체는 우리의 언어사용에서 이미 전제되고 있는 것이다. 인용의 마지막 구절에 주의하라. 지시체는 말하거나 생각함에 있어서의 우리의 의도 속에 이미 전제되어 있다. 이미 전제되어 있는 바로 이것의 구조를 가장 잘 드러내는 구조가 바로 대상-개념의 구조이다. 이 구조를 통해 프레게는 지시체 위주의 논리체계, 즉 외연논리체계를 건립한다. 프레게의 생각으로는 이것만이 주관의 영향을 배제하는 엄밀한 논리체계를 구축하는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후설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말하거나 생각함에 있어서의 우리의 의도를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의 의도의 구조를 더 깊이 분석함으로써만 한 표현, 즉 한 문장의 본래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정초할 수 있다. 후설도 프레게와 마찬가지로 의미와 대상을 나눈다.(9) 프레게와 마찬가지로 후설도 의미를 객관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10) 그러나 이러한 구분 이후에 탐구가 진행하는 방향은 프레게와 반대방향이다. 그 다른 방향을 살펴보고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살펴보자.

3. 후설에 있어서 의미(Sinn, Bedeutung)와 대상(Gegenstand)

후설에 있어서의 의미와 대상은 표현(Ausdruck)이 표현된 것 즉 표현의 내용들이다. 즉 표현의 내용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두 계기이다. 프레게처럼 기호(sign)라고 말하지 않고 표현(aus-drücken)이라고 말한 것에서 이미 가면 갈수록 갈라지게 될 출발점의 미묘한 뒤틀림을 발견하게 되는 것 같다. 표현의 내용인 의미와 대상의 본성을 알고자 하면 우선 표현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1) 표현(작용)의 세 계기

우리가 뭔가를 표현할 때 이 작용은 보통 알리는(kundgeben) 작용, 의미부여작용(sinnverleihende Akt), 의미충족작용(sinnerfüllende Akt)의 세 계기로 분석될 수 있다. 표현은 의미있는 기호이다. 표현을 표현이게 하는 것은 그 표현이 가지고 있는 의미이다. 따라서 표현이라는 행위에는 반드시 의미를 산출하는 의미부여작용이 본질적 구성요소로서 성립해야 한다. 위에서 말한 표현작용의 세 계기도 마찬가지로 의미부여작용을 그 본질적 계기로 밑바탕에 깔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바로 이런 점에서 표현은 표시(Anzeichen)와 구별된다. 어떤 것의 현존에 대한 확신이 어떤 다른 것의 현존에 대한 확신이나 추측에 대한 동기로서 체험될 때 우리는 전자를 후자에 대한 표시라고 부른다. 표현이 표시라고 한다면 표현의 현존에 대한 확신이 그 표현이 표현하는 바인 의미의 현존에 대한 확신을 동기지워야 한다. 그러나 혼자하는 생각에서 보듯이 표현이 현존하지 않아도 충분히 표현활동이 가능하다.

첫째, 일상적으로 우리는 표현을 알리는 작용으로 생각하고 그리하여 표현의 내용 즉 의미도 알려지는 내용을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알려지는 내용을 형성하는 것은 바로 알려지는 심리적 체험들이다. 이것은 의사소통의 표현행위에서 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우리는 서로 말하면서 서로의 심적인 체험들을 알리면서 또 알아챈다. 그러나 우리는 알려주는(bekunden) 것(즉 심리적 체험들)과 의미하는(bedeuten) 것을 구분해야할 필요가 있다. 표현을 표시와 다른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표현이 지니는 알려주는 작용이 아니다. 알려주는 작용은 표현의 부수적인 작용일 뿐이다. 이 알려주는 작용의 근저에서 이 알림을 가능케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표현의 본질적인 작용인 의미부여작용이다.

둘째, 이 표현의 의미부여작용의 본질은 혼자만의 사고에서 매우 잘 드러난다. 혼자만의 정신적 삶에서 이루어지는 표현작용에서는 의사소통에서 표현작용이 지녔던 표시의 기능이 상실된다. 그리고 고유하게 의미부여작용이 그 본질적 성격을 드러낸다. 여기서 바로 표현과 의미 사이에 표시(Anzeichen) 관계가 아닌 지시(Hinzeigen) 관계가 드러난다.

세째, 표현이 지니는 의미부여작용은 의미를 부여하는 작용임과 동시에 대상적인 것과의 관계가 구성되게 되는 작용이다. 의미부여작용은 그 상관자로서 반드시 대상적인 것을 가진다. 그 대상이 현존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표현은 어떤 것을 생각하며(meinen), 어떤 것을 생각하는 동안 표현은 대상적인 것과 관계한다."(11) 후설의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대상이 직관적으로 현존하지 않는다면, 따라서 지칭되는 것으로서(즉 생각되는 것으로서) 현존하지 않는다면, 이름은 단순한 생각으로 그친다. 우선 공허한 의미지향이 충족될 때 대상적인 관계가 현실화되고, 명명(Nennung)은 이름과 지칭된 것 사이의 실제적으로 의식된 관계로 된다."(12)

바로 여기서 표현이 표현임을 가능케하는 본질적인 작용인 의미부여작용 이외에 표현에 본질외적인 작용으로서 의미충족작용이 생각될 수 있다. 보통 '표현'이라는 말로 우리는 의미가 살아있는 표현을 생각한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의 표현에 어울리는 표현 작용은 의미충족작용으로서의 표현작용이다.

우리의 언어활동의 상당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전달하는(mitteilen) 말의 경우에는 위에서 말한 세 계기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즉 의미부여작용과 의미충족작용이 함께 알리는 작용에 속해 있으면서 알리적 작용의 본질적인 핵을 형성한다. 이들은 내적으로 융합되어 나름의 고유한 성격을 지닌 통일체를 형성한다. 실제적인 언어활동 과정에 대해 후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단어표상과 의미부여작용 양자는 체험된다; 그러나 단어표상을 체험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전혀 단어를 표상하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단어의 뜻, 단어의 의미를 수행하면서 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하는 동안, 즉 우리가 의미지향 내지 경우에 따라서는 의미 충족의 수행에 몰두하는 동안, 우리의 모든 관심은 의미지향 속에서 지향되고 의미지향을 통해 지칭되는 대상에 속하게 된다.(자세히 보면, 앞에 것과 뒤에 것은 동일한 것이다.) 단어의 (아니 오히려 직관적인 단어표상의) 기능은 바로, 우리의 의미부여작용을 자극하고, 그 의미부여작용 "속에서" 의도(지향)되고 또 충족하는 직관을 통해서 주어지기도 하는 것을 지시하고(hinzeigen), 우리의 관심을 오로지 이러한 방향으로 몰입시키는 것이다."(13)

이러한 몰입속에서는 위의 세가지 계기 및 다른 복잡한 계기들은 반성적으로 의식되지 않은채 하나의 통일된 체험으로 의식될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향적인 작용을 반성하기 위해서는 현상학적인 고찰방식을 통해 살펴보아야 한다. 바로 이러한 현상학적인 고찰에서 존재하는 것은 오직 그러한 지향적 작용들의 조직망(Gewebe) 뿐이다. 바로 표현이 지니는 이러한 지향적 작용들의 조직망에 대한 깊은 고찰만이 표현의 내용을 구성하는 의미와 대상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를 도모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표현이 지니는 세가지 작용들을 분석하고 그 본질적인 부분이 무엇인가를 예비적으로 고찰해 본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표현의 내용을 구성하는 의미와 대상에 대해 살펴보자.

(2) 표현의 객관적 내용으로서의 의미와 대상

표현의 내용에 대한 고찰은 표현 작용의 실제적 관계로부터 그 작용의 대상들 내지 내용들의 이념적 관계에로 탐구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즉 주관적 고찰이 객관적 고찰에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표현의 객관적 내용은 크게 표현의 의미(Bedeutung)와 그 대상(Gegenstand)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의미는 지향적인 의미와 충족적인 의미로 나누어질 수 있다.

첫째, 표현과 의미의 관계에 대한 이념적 고찰에 있어 고찰의 대상이 되는 표현과 의미는 모두 種的인 것으로서의 표현과 의미이고 따라서 누가 언제 표현해내든 동일한 표현과 그 의미를 말한다. 한 표현(예들들어 진술)의 내용은 따라서 그 표현이 알려주는 바 - 여기에는 심리적 주관적 요소가 개입해 있다 - 가 아니다. 한 표현의 내용은 그것을 주장하든 안하든, 또 어떤 상황에서 하든 동일하다. 이 동일한 의미속에는 판단작용과 판단주체에 관해서 어떤 것도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사정(판단작용은 경우에 따라 변하더라도 판단작용이 판단하는 바의 것은 어디서나 동일하다는 사정)은 모든 진술들에서 - 비록 진술이 말하는 것이 거짓이거나 전적으로 불합리하더라도 -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불합리한 경우에도 우리는 참을 고집하는 것이나 진술의 일시적인 체험들로부터 이러한 체험들이 이념적인 내용, 즉 다양한 것들 속에 있는 통일적인 것으로서의 진술의 의미를 구별할 수 있다. 명증적인 반성속에서 우리는, 의미를 그때그때마다 지향하는 바 동일한 것으로서 인식한다; 우리는 의미를 진술속에 자의적으로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발견한다."(14)

그러나 동일성을 유지하는 이 의미는 단적인 지향적 의미와 충족적 의미(15) 두가지로 나뉘어진다.

"의미부여작용의 지향적 본질에 대한 이념적 파악이, 지향적 의미를 이데아로서 산출하는 것처럼, 의미충족작용이라는 상관적인 본질에 대한 이념적 파악도 충족적 의미를 마찬가지로 이데아로서 산출한다. 이 충족적 의미를 지각에서 살펴보면, 이것은 동일한 대상을 실제로 동일한 것으로 지각하는(in wahrnehmender Weise meinen) 가능한 지각작용 모두에 포함되어 있는 동일한 내용이다. 이 내용은 따라서 하나의 대상에 대한 이념적 상관자이다. 게다가 이 하나의 대상은 전적으로 허구적일 수도 있다."(16)

둘째, 표현의 객관적 내용을 이루는 또하나는 바로 대상이다. 대상적인 것은 의미속에서 생각되고 의미를 매개로 해서 표현된다. 모든 표현은 어떤 것을 말할 뿐 아니라 어떤 것에 관하여 말한다. 표현은 자신의 의미를 가질 뿐 아니라 모종의 대상들과 관계한다. 의미와 대상은 의미를 부여하는 작용에 의해서만 표현에 속한다. 그렇지만 의미와 대상은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 의미와 대상의 구분이 필요한 까닭은 둘이상의 표현들이 서로 동일한 의미를 가지면서 상이한 대상을 가지거나 반대로 상이한 의미를 가지면서 동일한 대상을 가지는 많은 예들을 볼 수 있는데서 알 수 있다.

(3) 의미와 대상 사이의 관계

표현의 의미와 그것이 지니는 지칭적 속성 즉 대상이 구분되는 것은 확실하지만 또한 이 양자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하나의 표현은 오직 그것이 의미하는 한에서만 대상적인 것과의 관계를 획득하며 따라서 표현은 자신의 의미를 매개로 해서 대상을 지시한다. 의미함이라는 작용은 그때그때의 대상을 생각하는(meinen) 특정한 방식이다. 여기서 '생각하는'(meinen)이라는 말에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프레게에 따르면 의미란 대상이 주어지는(gegeben) 방식이다. '주어지는'과 '생각하는'이 의미와 대상(지시체)간의 관계와 의미와 대상의 선호에 대한 두사람의 태도를 대변하고 있다. 프레게의 개념과 대상, 의미와 지시체 간의 구분이 대상의 고유한 위치를 확보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면 후설은 오히려 대상의 근거로서의 의미, 특히 의미부여작용을 파고들어가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표현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도 표현의 객관적 내용에 대한 분석이 바로 시작되지 않고 표현작용에 대한 현상학적 구조분석이 먼저 이루어진것도 바로 이런 맥락이라 할 것이다. 작용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것이 일어나게 된 근거를 파고드는 것, 바로 이것이 후설 현상학의 근본 방법론인지도 모르겠다. 의미와 대상 간의 관계에 대한 현상학적 해명과 관련하여 후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미와 대상 간의) 이러한 관계에 대한 보다 깊은 현상학적 해명은 표현과 표현의 의미지향이 지니는 인식기능을 연구함으로써만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각각의 표현에서 구분되어야 할 <두 측면>이라는 말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서는 안되며, 오히려 표현의 본질은 오직 의미에만 놓여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될 것이다."(17)

한 문장안에서 대상의 고유한 위치를 확보하려는 프레게의 노력에 비교해 볼때 후설의 이 결론은 너무도 대조적이다. 후설의 이 노력은 프레게가 단순히 대상을 확보한데 그친데 반해 이 대상의 근거도 또 되물어 가려는 보다 근본적인 탐구로 생각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가능하려면 프레게가 노력했던 주관적 심리적 요소의 탈색작업이 현상학적으로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지, 그리고 과연 현상학이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요소로부터 벗어나 엄밀한 정초를 마련했는지에 대해 납득할 만한 대답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4. 맺는말

의미와 대상(지시체)을 서로 분리시키는 프레게와는 달리 이들의 분리를, 표현작용을 매개로 해서, 더 정확히는 의미부여작용이라는 의식의 지향적 성격을 매개로 해서,(18) 궁극적으로는 다시 통일시켜 하나의 원리속에 포섭시키겠다는 후설의 연구방향은 오캄의 면도날 원칙에 보다 충실하다는 점에서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만큼 위험부담도 크다.

대상의 대상성의 근거가 순수 의식에 있는지 아니면 대상 그 자체에 있는지에 대한 관념론과 실재론의 논쟁이 여기서도 엿보이는 것 같다. 어쩌면 순수의식이니 대상 그 자체니 하는 구분은 가장 밑바닥에서는 무의미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어느쪽을 선호하느냐에 따라 사고를 진행시키고 발전시켜가는 방향은 판이해지는 것 같다.


<각 주>

1) Frege, Grundlagen der Arithmetik, 서문

2) 프레게의 다음의 구절을 참조하라: "(논리적 의미에서 이해된) 주어와 술어는 사유의 요소들이다; 그들은 지식에 대해 동일한 단계 위에 서 있다. 주어와 술어를 결합함에 의해 사람들은 단지 사유에 도달할 뿐, 결코 의미로부터 지시로, 결코 사유로부터 그것의 진리치로 나아가지 못한다. 사람들은 동이한 단계에서 움직일 뿐 결코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다. 태양이 사유의 부분일 수 없듯이 진리치도 결코 사유의 부분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미가 아니라 대상이기 때문이다." Frege, "Sinn und Bedeutung" p.35

3) Frege, "Function und Begriff" p.6

4) 같은 논문, p.15

5) 같은 논문, p.16-17

6) Frege, "Sinn und Bedeutung", p.30

7) 앞의 논문, p.33

8) 앞의 논문, p.31

9) 다만 용어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데 후설은 Sinn과 Bedeutung을 구별하지 않고 동일하게 프레게의 Sinn의 의미로 사용한다. 그리고 프레게의 Bedeutung에 해당되는 것이 후설에게는 Gegenstand이다. 이 Gegenstand가 프레게에는 다른 맥락에서, 즉 Begriff에 짝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10) 여기서는 논리연구에 나타나는 후설의 주장에 기반하고 있다.

11) Husserl, LU II-1, §9

12) Husserl, LU II-1, §9

13) Husserl, LU II-1, §10

14) Husserl, LU II-1, §11

15) 지향적 의미와 충족적 의미 사이의 구분은 '무의미'란 개념을 다르게 정의하는 실마리가 된다. 충족적 의미를 유의미성의 기준으로 삼으면 직관적으로 충족되지 않는 의미는 무의미한 것으로 된다. 그러나 지향적 의미를 유의미성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충족되지 않는 의미들 중에서도 의미있는 것들이 많이 있을 수 있다.

16) Husserl, LU II-1, §14

17) Husserl, LU II-1, §13

18) 표현의 본질을 표현의 작용에서 찾는다는 점에서는 후설과 하이데거는 프레게와는 달리 같은 노선을 걷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표현작용의 본질을 의미부여작용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후설은 하이데거와 다르다. 하이데거는 표현의 본질을 지시(verweisen)에서 찾으며 궁극적으로는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dasein)의 해석학적 순환구조에 정초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