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험성(Aprioricity)과 필연성(Necessity)
- 퍼트남과 크립키를 중심으로 -

 

1. 들어가는말

우리는 참된 지식을 가지기를 원한다. 그리고 단순히 참일뿐만 아니라 내용이 있는 참된 지식을 가지기를 원한다. 첫째, 우리가 가진 지식이 참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때와 장소에 따라서 변하지 않는 것이여야 하며 따라서 그것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 즉 필연적으로 참이어야 한다. 둘째, 우리가 가진 지식이 내용이 있기 위해서는 단순히 의미를 분석함으로서 참이 되는 분석적 지식이어서는 안되고 새로운 내용이 덧붙여지는 종합적 지식이어야 한다.

경험적 지식이 새로운 내용이 부가되는 지식이다. 그러나 경험적 지식은 흄의 귀납에 대한 회의적인 주장이래 그 필연성을 의심받아 왔다. 이에 따라 필연적 지식은 자신의 원인이나 근거를 경험 아닌 다른 것에서부터 찾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여기서 바로 참된 지식의 근거로서 선험적 지식이 등장하게 된다.

선험적, 후험적이라는 말은 인식론적인 구분이다. 즉 어떤 지식의 참의 근거와 관련된 물음에서 제기되는 구분이다. 우리는 선험적 지식(내지 참)을 후험적 지식(내지 참)이 아닌 지식이라고 소극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선험적 지식이란 자신의 정당화를 감각경험으로부터 오는 증거에 의해 확보하지 않는 지식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이러한 선험적 지식은 필연적인 명제와 밀접한 연관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두가지 종류의 진리가 있다. 하나는 이성의 진리이고 하나는 사실의 진리이다. 이성의 진리는 필연적이고 그 반대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사실의 진리는 우연적이고 그 반대가 가능하다. 하나의 진리가 필연적이라면 그 이유는 분석에 의해, 즉 우리가 원초적인 개념들과 진리들에 도달할 때까지 그 필연적 진리를 보다 단순한 개념들과 진리들에로 분해함에 의해 발견할 수 있다."라고 한 라이프니츠의 주장이나, "선험적으로 취해질 수 있는 지식은 모두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라고 한 칸트의 주장이 그 대표적인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선험성과 필연성을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이러한 전통적인 견해의 밑바탕에는 '참된 지식의 근거는 이성 내지 지성의 직관 내지 사변적 능력이다'라고 하는 입장이 깔려 있다. 즉 선험성과 필연성을 모두 경험을 벗어난 지적인 사유능력에 공통적으로 정초지움으로써 이 양자를(즉 인식론적 용어와 형이상학적 용어를)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험적 지식을 이성의 능력과 관련시키지 않고서 설명하려는 입장들이 있다. 이러한 입장들은 선험적이고 필연적인 지식의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는 수학과 논리학의 법칙들을 이성의 능력이 아닌 다른 것에 의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데 그 성패가 달려있다고 할 것이다.

여기에는 첫째, 수학이나 논리학의 법칙들을 경험과 관련시키는 방법이 있다. 이를 위한 탁월한 전략으로 우리는 콰인의 전략을 들 수 있다. 즉 선험-후험의 구분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선험적이고 필연적인 지식의 독자적 성립 자체를 거부하는 입장, 즉 경험과 무관한 지식을 거부하는 입장이 그것이다.

둘째, 수학과 논리학의 필연성을 일종의 언어습관 내지 규약(convention)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여기서는 규약에 의해 선험성은 확보될 수 있을지 모르나, 필연성은 단순히 주관적인 필연성에 그칠뿐 규약에 의해 상대화되는 운명을 면할 길이 없어 보인다. 따라서 여기서 필연성이 구제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규약성이 아닌 다른 것에 의해 그 실마리가 찾아지지 않으면 안된다.(1) 그것은 바로 이 규약성을 뒷받침해주는 보다 저층에 있는 새로운 근거를 제시하거나, 선험성과 필연성을 서로 다른 차원의 것으로 완전히 분리해내 버리는 것이다. 전자에 해당되는 것으로 규약의 근거로 합리성을 내세우거나(퍼트남)(합리적 존재에게만 고유한 필연성), 인간의 소질적 특징내지 '자연사적 사실'을 근거로 내세울수가 있을 것이다.(B. 스트로드)(인간에게만 고유한 필연성) 그리고 후자의 입장은 크립키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선험성을 인식론적인 것으로, 필연성을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엄격히 분리하고서 이 둘은 서로 독자적인 것이므로 서로 혼동해서는 안됨을 강조하고 있다. 크립키의 전략은 선험성과 필연성을 분리함으로써 선험적인 것은 규약적일 수 있지만 필연적인 것은 규약적이지 않음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선험성과 필연성 사이의 연관을 맺어주는 방식에 일어난 커다란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종래의 라이프니츠나 칸트 등의 이성주의적 입장에서는 선험적인 것은 이성의 능력을 매개로 해서 곧바로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는 선험적인 것은 오히려 관습적이고 규약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서(2) 상대주의의 주요한 근거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필연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 규약성(특히 언어의 규약성)을 나름대로 새롭게 해석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다음에서 우리는 이렇게 언어 및 언어의 본질적 구조를 규정하는 논리적 법칙 그리고 수학의 법칙의 규약성이라는 도전 앞에서 필연성을 살려보려는 대표적인 두 입장인 퍼트남과 크립키의 입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2. 퍼트남에 있어서의 필연성의 근거

퍼트남은 비트겐슈타인이 온건한 규약주의(conventionalism)로부터 출발해서 극단적 규약주의로 간 반면 콰인은 온건한 규약주의로부터 출발해서 경험주의로 갔다고 보고 이 양자를 비판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수학과 논리학의 수정불가능성을 과대평가하고 콰인은 이것을 과소평가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퍼트남은 이들의 수정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선험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논리적 법칙이 있음을 합리성 개념에 근거해서 밝혀내고자 한다.

(1) 퍼트남의 비트겐슈타인 비판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우리로 하여금 어떤 증명들을 증명으로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을 비트겐슈타인이 <규약> 내지 <입법화(legislation)>로 보았든(3) 아니면 <삶의 양식> 즉 생물학적이고 문화적인 역사에 의해 결정되는 우리 인간의 본성으로 보았든(4) 이러한 입장에는 공통적으로 수학적 진리와 필연성은 <우리에게서 생겨나고> 수학적 진리와 필연성을 <설명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 삶의 양식이라는 주장이 함축되어 있다. 어떤 정신적 표상이나 기호도 자기 자신을 해석할 수는 없으며, <해석>을 고정시키는 것은 규칙을 따르는 실천이라고 하는 점에서 퍼트남은 비트겐슈타인에 동의한다. 즉 수학적 진리도 그것의 <내용>이 우리의 실제로 존재하는 본성과 성향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관점의존적'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퍼트남도 실재를 '모사'하는 표상이라는 형이상학적인 언급의 무의미함을 주장하면서 모든 진리가 다 '관점의존적'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관점의존적 사실도 역시 사실(fact)의 일종이지 이것을 인공물(artefact)로 보아서는 안된다.

"한 판단의 진리는 우리의 본성에 의존한다. 그렇지만 또한 마찬가지로 우리의 본성 이상의 것에 의존한다. 진리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사실들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진리는 <우리에게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5)

비트겐슈타인은 또한 우리의 규칙을 따라 수행되는 우리의 언어활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더이상 의심할 수 없는 지점이 있음을 강조한다. 비트겐슈타인도 받아들이듯이 논리적 명제와 경험적 명제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을 일단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이 지점에 있는 명제들을 논리적 명제 내지 말놀이를 서술하는 명제들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퍼트남은 이러한 명제들(예컨데 2+2=4)을 '반례로 간주할 수 있는 상황을 결코 만나지 못하는 명제'로 해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하에서 퍼트남은 수학의 명제가 꼭 그러한 명제가 아님을 주장한다. 즉 수학이나 논리학의 명제를 모두를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동어반복적 명제라고 주장하는 에이어난 카르납을 비판하면서 경험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도 아니며 또 개정이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비록 <모든> 수학적 진리들이 '형이상학적으로 필연적'이라고 하더라도, 즉 수학의 진리를 어기는 어떤 것도 '가능세계'의 <記述>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단순한 이유로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수학적 진리는 '인식론적으로 우연적'이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정신적 이미지나 어떤 물리적 표상속에 구체화되는 것을 보는 것 이외에는 달리 우리가 어떤 추상적인 구조가 일관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없다."(6)

모든 사실들은 나의 개념적 렌즈에 의존적이만 어떤 사실도 이러한 렌즈의 인공물(artefact)은 아님을 퍼트남은 분명히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알려지는 '형이상학적 필연성'의 담보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모든 것이 개정의 가능성 속에 있음을 인정하는 퍼트남에게서 '불변하는 것'으로서 포기할 수 없는 선험적이고 필연적인 것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서 확보할 수 있을까? 이를 퍼트남은 콰인의 경험주의를 비판하면서 적극적으로 드러내보이고 있다.

(2) 콰인의 견해에 따르면 수학적 진술의 수정불가능성은 에너지보존의 법칙 같은 물리학의 법칙보다 다만 정도에 있어서만 더 크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고 따라서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수학의 진리는 부분적으로 경험적이고 부분적으로 '규약적'이며 이런 점에서 다른 모든 진리와 마찬가지이다. 다만 수학은 더 잘 '보호받을' 뿐이다. 분석-종합의 구분을 의문시한 콰인에게 있어서는 단적으로 경험적인 것이나 단적으로 개념적인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하나의 독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선험적 지식이나 진리라는 것은 콰인에게는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퍼트남은 콰인의 이러한 경험주의를 비판한다.

합리적인 존재라면 거부할 수 없는 문장이 있음을 퍼트남은 종래의 모순율의 약화된 형태를 통해 주장한다. <어떤 문장도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일 수는 없다>와 같은 문장이 그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거부할 수 밖에 없는 명제가 있다. <모든 진술이 다 옳다>라는 명제가 그것인데 이것을 믿는 것은 합리성 개념을 가지지 않는 것이 된다. 즉 적어도 하나의 진술은 선험적이다. 또한 <절대적으로 비정합적인 규칙>(AIR)으로 명명한 <모든 전제들과 공집합을 포함한 전제들의 모든 집합으로부터 모든 진술을 추론한다>는 규칙을 살펴보더라도, AIR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곧 합리성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것이 합리성의 개념으로부터 분명하다고 퍼트남은 주장한다. 간단히 말해서 AIR은 선험적으로 거부가능하다. 또한 퍼트남은 이러한 선험적인 명제가 분석적이라고도 주장하지 않는다. 위의 선험적인 명제들은 합리성에 근거하여 주어진 것이지 의미의 분석에 근거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의해야 할 점은 퍼트남이 선험성을 이야기할 때 이는 <類>적인 진리 개념의 범위내에서의 이야기이지 특정한 철학적 개념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수학이나 논리학의 법칙들은 그 자체로 선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인식론적으로 우리는 그것의 선험성과 필연성을 확보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은 오류가능성에 열려져 있다. 합리성 개념에 대한 부분적인 기술조차도 우리의 세계에 대한 경험이 증가함에따라 계속해서 수정되어오고 있는 형편이라고 퍼트남은 말한다. 퍼트남은 오류가능성 및 논리학의 개정가능성과 합리성을 양립시킴으로써 규약주의가 가지는 전적인 상대주의로의 전락을 방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퍼트남에 있어서 선험성과 필연성의 마지막 보루는 바로 합리성이라고 할 수 있다.

3. 크립키에 있어서의 필연성의 근거

퍼트남에 있어서의 필연성의 확보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이성 개념을 완화한 형태인 합리성 개념을 토대로 삼음으써 가능했다. 전통적으로 선험성과 필연성이 연결되는 통로가 바로 이성의 능력이었듯이 퍼트남에서도 선험성과 필연성이 연결되는 통로가 바로 합리성이었다.

그에 반해 크립키는 선험성은 인식론적인 것으로, 필연성은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분명히 구분하고, 이러한 토대위에서 우리의 문장을 성립시키는 명명(naming)의 구조를 분석하고 그리하여 선험성과 필연성의 독립성을 해명한다.

우선 크립키가 제시하는 우연과 필연의 구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어떤 것이 거짓이라면 분명히 그것은 필연적으로 참이 아니다. 그것이 참이라면 그것이 그렇지 않게 될 수도 있는가? 이런 관점에서 세계가 현재 있는 방식과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라는 것이 가능한가? 만약 그 대답이 '아니오'라면 세계에 대한 이 사실은 필연적인 사실이다. 만약 '그렇다'라면 세계에 대한 이 사실은 우연적 사실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는 어떤 것에 대한 누구의 인식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것은 분명히 철학적인 테제다"(7)

크립키에 따르면 수학의 명제들, 예를들면 '2보다 큰 모든 짝수 n은 n보다 작은 두개의 솟수 p1과 p2의 합이다'와 같은 명제들은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선험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참이라면 필연적으로 참이고 그것이 거짓이라면 필연적으로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필연성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것인가? 크립키는 이름에 대한 특유의 해석을 통해서 이를 근거지운다. 크립키는 <고정지시어>와 <비고정지시어>를 나눈다. 고정지시어는 그것이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고 비고정지시어 내지 우연적 지시어는 동일한 것을 지시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지시되는 대상이 모든 가능세계에 실제로 존재할 필요는 없다. 크립키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이름들 중에서 어떤 대상을 고정적으로 지시할 목적으로 도입되는 이름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름은 기술에 의해 도입된다고 하는 프레게나 러셀의 입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이름이나 사물을 순수히 질적으로 규정하려는 이러한 입장은 바로 인식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 그리고 선험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을 혼동하는데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크립키는 본다. 반사실적 상황들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사물들은 '발견되는'(find out) 것이 아니라 규정되는(stipulate) 것이다. 사물을 규정하는 우리의 정의, 예를들어 '시간t에서 막대기 S는 1미터이다.'와 같은 정의는 '1미터'라 부르는 것의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지시체를 고정>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1미터'와 '시간 t에서의 S의 길이'라는 두 구절에는 차이가 있다. '1미터'는 현실세계에서 우연히 시간t에서의 S의 길이로 나타난 특정 길이를 모든 가능세계에서 고정적으로 지시하고 있지만 '시간 t에서의 S의 길이'라는 구절은 그렇지가 않다. 크립키는 말한다.

".... '정의'가 말하는 것은 '1미터'가 '시간 t에서의 S의 길이'와 (반사실적 상황에서 조차도) <동의의>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1미터'가 사실상 시간 t에서의 S의 길이인 특정 길이의 <고정> 지시어라고 규정함으로써 우리가 '1미터'라는 구절의 <지시체를 결정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S는 시간t에서 1미터라는 것을 필연적인 진리로 만들지 않는다. ..... 그 이유는 하나는 고정지시어이고 다른 하나는 아니기 때문이다."(8)

위의 정의는 이 정의를 통해 지시체를 고정시킨 사람에게는 인식론적으로는 선험적이겠지만 그러나 형이상학적으로는 우연적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적으로 필연적인 진리를 찾기 위해서는 고정지시어간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는 문장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 두드러진 예가 바로 이름들간의 동일성에 관한 명제라고 할 수 있다. 예를들어 '금성은 개밥바라기다'라는 문장이 참인지 아닌지를 우리는 선험적으로 알지 못하지만(우리는 경험이외에는 대답을 발견할 위치에 있지 않다) 일단 '금성'과 '개밥바라기'가 하나의 동일한 것이기만 하면 어떤 가능세계에서도 그 둘이 다를 수는 없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동일하다.

여기서 우리는 선험적으로 알지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필연적인 진리를 보게 된다.

이제 크립키의 필연성 개념의 성격을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크립키는 필연성 개념을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라고 못박고 논의를 출발하고 있다. 그리하여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인 필연적 진리를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것을 가리키는 고정지시어를 통해 해명하고 한다. 그리하여 고정지시어의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는 이름들을 경험을 통해 질적으로 기술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즉 이름이나 이름에 의해 지시되는 대상은 (경험을 통해) 발견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규정되는(stipulated) 것이다. 이러한 규정(stipulation)은 크립키의 논의에 충실하게 따르면 모든 경험적 발견에 우선되는 것이다. 경험적 발견과 비교의 근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규정이라는 말에서 이 규정의 주체가 누구 또는 무엇인지를 묻고 싶어진다. 적어도 경험에 앞서는 것임은 분명하다. 규정이 명명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규정의 주체는 곧 명명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주체는 무엇일까? 인간의 기본적인 언어사용능력일까? 아니면 퍼트남의 합리성일까? 아니면 세계자체의 질서인가? 명명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규정>과 앞에서 '1미터'의 정의할 때의 <정의>는 크립키에 따르면 전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차이는 인식론적으로 분명히 될 수 있는 것일까? 이는 물론 고정지시어와 비고정지시어의 구분의 문제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크립키가 말한 규정이란 개념이 인간의 주관적 언어사용 능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만약 그렇다면 크립키가 말하는 필연성이란 인간의 언어가 본질적으로 지닌 구조에 기인한 필연성일 것이다. 크립키에 따르면 필연성과 관련하여 우리가 선험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동일성 진술과 같은 진술이 참이면 그것이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진술이 필연적으로 참인 진술인지는 선험적으로 알 수가 없다. 그것은 경험의 문제가 된다. 결국 참,거짓을 확정짓는 것은 경험이기 때문이다.

4. 맺 는 말

이상에서 우리는 퍼트남과 크립키에 있어서의 필연성의 근거 및 그것과 선험성과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첫째, 우리는 이성적 지식으로 대표되어 불변적이고 참된 지식의 대명사로 간주되던 선험적 지식이 언어적, 규약적, 정의적 지식으로 바뀌면서 오히려 상대화되고 시대와 역사에 따라 변화되는 지식으로 변해버렸음을 보았으며 이러한 상대화의 와중에서도 필연성의 건져내려는 노력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살펴보았다.

둘째, 선험성과 필연성의 연구에 있어서도 그 실마리를 우리의 인식틀을 구성하는 언어의 전체적 구조에서 찾는 것이 오늘날에 와서 두드러지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언어사용의 본질적인 구조를 보는 시각의 차이가 결국 선험성과 필연성의 해명의 차이를 유발하는 만큼, 언어의 구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또한 선험성, 필연성 등의 문제에 새로운 시각을 가져오리라 생각된다.


1) 그러나 C.I.루이스는 이 규약성의 근거를 프라그마틱한 것에서 찾음으로써 규약 외적인 필연성은 포기한다. 즉 규약에 따라서 논리나 수학의 법칙들도 변화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규약 내적으로는 우리가 아무런 강제없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나 수학의 법칙이 있다는 점에서 규약의 선험성과 이것의 필연성을 인정하고 있다.

2) 이는 여러개의 상이한 논리법칙이나 개념틀이 있다는 개념틀 상대주의와도 연관이 있다.

3) 더미트의 해석

4) 스트로드의 입장

5) P.K. Moser, A Priori Knowledge, p.91

6) P. Moser, 같은책, p.95

7) P. Moser, 같은책, pp.146-147

8) P. Moser, 같은책, p.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