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타고라스의 세계에서 생각하기

- 디지털과 하이퍼텍스트 -




‘찍기’에서 ‘굽기’로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가 처음 만들어 냈던 인쇄기의 원형은 포도 짜는 기계였다고 한다. 그 기계 속에다 포도만 누를 것이 아니라 종이도 눌러보자는 발상의 전환으로 책이 찍혀 나온 것, 바로 이것이 맥루안에 따르면 인류 “최초의 대량 생산”1)이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대량 생산은 단순히 많이 만든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단순히 많아서만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많은 것들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똑같은 형태와 구조를 지녀야 한다. 즉 둘을 섞어 놓으면 둘 중의 하나를 구분할 수 없어야 한다. 즉 인쇄기의 목적은 카피(copy)이어야 한다. 따라서 이제 글을 쓰는 이는 자기가 쓴 글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글의 카피에 대해 권리를 가진다(copyright).

그런데 이 찍기(pressing)의 반복성, 정형성에 사람들이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생각은 한없이 자유롭건만 그 생각에 책이라는 대량 생산의 굴레가 씌어지면서 목차가 발명되었고 일사불란(一絲不亂)함이 미덕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제 그 일사불란함의 미덕이 도전을 받고 있다. 하나의 실에 모든 것을 꿰는 것은 단지 불가능한 것으로 그칠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생각에 가하는 폭력이기도 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찍기’에 찍혀 눌려 온 생각이 이제 다시 본연의 자유로운 공간을 모색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공간 한 자락을 디지털이 열어 보이고 있다. 디지털의 세계에서는 생각은 더 이상 찍힘으로써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여기에는 찍기 대신에 (하드디스크에의) ‘저장’(saving)과 (CD나 DVD로의) ‘굽기’(burning)가 있다. 구워진 생각들은 언제 어디서든 원저자의 최초의 글쓰기 상태로 환원 가능하며, 따라서 언제든지 누구에 의해서든 다시 ‘불리어져서’(open) 수정, 변형, 편집, 첨부가 가능하다. 그 때문에 이제까지 저자들이 외쳤던 권리인 저작권(copyright)은 이 디지털의 세계에서는 설자리를 찾지 못해 허둥대기에 여념이 없다. 그렇지만 이 같은 파괴만 있는 것도 아니다. 갈갈이 찢어진 책의 목차들은 이제 다른 방식으로 서로 이어지고 있다. 이 이음에는 여러 개의 실이 쓰인다. 이 새로운 이음은 디지털이라는 터전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 새로운 이음인 ‘하이퍼텍스트’, 이것이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글이라는 것


글을 쓰기 위해 원고지를 펼치는 사람은 이제 나이 지긋한 분들을 빼고는 거의 없으리라. 지금 이 글을 쓰기 위해 나는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그리고 컴퓨터가 있는 책상 주위의 책장에는 책들이 빼곡이 쌓여 있다. 그렇지만 내 손은 그 책들로 가질 않고 오히려 컴퓨터 속의 파일들을 뒤지고 있다. 옛날 같았으면 나는 다시 또 책장으로 몸을 향하던지, 도서관으로 가서 백과사전을 뒤졌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의자에서 조금도 몸을 떼지 않는다. 윈도우에서 익스플로러를 열고서 검색 사이트로 들어간다. 그리고 ‘디지털’이라고 쳐 넣고 검색을 시작한다. 무수히 많은 관련된 정보와 사이트가 불려 들어온다. 두산 백과사전에는 디지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나는 그 내용을 몇 번의 마우스 조작으로 그대로 복사해서 이 글로 옮긴다.


  디지털 [ digital ] 

요약  : 데이터를 수치로 바꾸어 처리하거나 숫자로 나타내는 일.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디지트(digit)는 사람의 손가락이나 동물의 발가락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말이다. 아날로그와 대응하며, 임의의 시간에서의 값이 최소값의 정수배로 되어 있고 그 이외의 중간 값을 취하지 않는 양을 가리킨다. ... 따라서, 디지털이란 일반적으로 데이터를 한 자리씩 끊어서 다루는 방식이라 할 수 있으며, 애매모호한 점이 없고, 정밀도를 높일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것이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과도기를 살고 있는 나의 글쓰기이다. 그리고 이 글쓰기의 끝에는 쓰여진 글이 있다. 즉 글쓰기란 ‘.... 글 - 읽기 - 쓰기 - 글 - 읽기 - 쓰기 ....’의 순환 과정이다. 여기서 읽기와 쓰기는 당연히 ‘생각’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리고 글의 자리에는 당연히 책이 들어갈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면 앞으로는? 앞쪽의 글에는 책이 들어가겠지만 뒤쪽의 글에는 책, 특히 종이책의 자리는 점점 좁아질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앞의 글과 뒤의 글이 결국은 같아질 것이다. 내가 읽은 글과 내가 쓴 글의 종착역이 다른 지금의 현실은 바로 우리가 과도기적 시대에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글의 자연스런 순환과정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내가 쓴 글과 내가 읽은 글의 ‘자리’가 같아져야 한다. 그렇다면 그 자리는 어디일까? 예전에는 그 자리가 종이였다. 이제 그 자리는 모니터이다. 그리고 이 모니터의 뒤에는 1과 0, on과 off로만 이루어진 세계, 즉 디지털의 세계가 있다.  

  

연속적인 세계와 불연속적인 인간 인식


그리스의 제논이 제기한 역설 중에 이런 것이 있다. “토끼와 거북이가 100미터 경주를 한다. 그런데 토끼는 거북이보다 걸음이 빠르므로 공정한 경기를 위해 거북이는 토끼보다 10미터 앞에서 출발한다. 그러면 토끼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왜? 왜냐하면 토끼가 거북이가 처음 있었던 10미터까지 가면 거북이는 비록 느리지만 처음 자리에서부터 조금 앞으로 나갔을 것이다. 다시 토끼가 거북이가 나간만큼 따라가면 거북이는 그 사이 또 조금 앞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이 과정은 무한히 계속된다. 따라서 토끼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1과 3 사이에 있는 수는? 당연히 2이다. 그러나 2가 답이려면 요구되는 수가 자연수라야만 한다. 만약 실수 가운데서 찾는다면? 우리는 답을 말할 수 없다. 쪼개도 쪼개도 계속 수가 나오기 때문이다. 쪼개도 쪼개도 여전히 수가 남아있는 이 세계가 바로 아날로그의 세계이며, 연속체(continuum)의 세계이다. 그에 비하면 자연수의 세계는 불연속체의 세계이다. 그런데 이 불연속체의 세계가 바로 디지털의 세계다.

이렇게 보면 디지털화는 연속적인 것을 인위적으로 끊어서 불연속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디지털의 이 불연속성은 세계의 모습을 완벽하게 옮기는데는 한계를 가지지만 제한된 목적과 용도 내에서는 아주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시간은 연속적으로 흐른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을 연속적으로 파악할 필요는 없다. 즉 시간을 알기 위해 실수는 필요 없다. 우리는 목적에 따라 다양한 디지털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어떤 시계에는 초침이 없는 것도 있다. 일상적 삶에서 몇 초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시간은 5분단위로 분절된다. 하지만 올림픽에서 100미터 달리기 기록을 잴 경우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여기서는 0.1초, 또는 0.01초가 중요하므로 시간을 1/100초로 쪼갤 필요가 있다. 우리의 목적과 용도에 따라 자연은 다양한 방식과 정밀도로 쪼개져야 한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우리의 움직임을 1/24초에 한번씩만 찍어 저장한다. 우리가 실제로 그렇게 움직이는가? 마치 로보캅이 움직이는 것처럼? 그렇지 않을 것이다. 1/24초와 2/24초 사이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 사이까지 찍을 필요가 없다. 왜? 1/24초에 한 번씩만 찍어도 우리 눈은 그 사이가 비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음악도 그렇다. 우리 귀가 듣기에 전혀 거슬리는 것이 없을 정도로만 음의 연속적인 파장을 세밀히 계단식으로 디지털화하면 된다.2)


피타고라스의 부활


사실 어떻게 보면 디지털은 매우 간단한 것이다. 디지털의 등장으로 기존 매체들 예컨대 책, 그림, 전화, 텔레비전, 영화 등에서 바뀐 것이란 단지 이 매체들에서 전달되는 정보들이 비트, 즉 1과 0의 조합으로 변환되어 전달된다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1과 0으로의 변환’이 뭐길래 사람들은 여기서 ‘첨단’의 냄새를 느끼는가?

디지털에서 사실 중요한 것은 1(on) 또는 0(off)의 자리값을 가지는 비트(bit)가 아니다. 네그로폰테는 비트를 아톰(atom)과 대비시키며 강조했지만3) 비트가 대접받는 진정한 이유는 그것이 수를 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보가 비트로 바뀐다는 말은 정보가 수로, 그 중에서도 자연수로 바뀐다는 말이다. ‘만물은 수’라고 했던 피타고라스의 말이 적어도 디지털의 세계에서는 존재의 근본 법칙이다. 디지털 존재의 조건은 바로 수이다. 디지털로 된다는 말은 곧 수로 표현될 수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물론 여기서의 수는 피타고라스가 그렇게도 감추고자 했던 √2와 같은 무리수가 허용되지 않는 수이다. 즉 연속적인 수(실수)가 아니라 단절적인 수(자연수)이다.4)

그리하여 모든 것은 디지털의 처소인 컴퓨터에서 수로 환원된다. 색은 빛의 3원색인 RGB, 즉 빨강(Red), 녹색(Green), 파랑(Blue)으로 분해되고 각 색은 그 농도에 의해 최저 0에서 최고 255번까지의 번호를 받는다.5) 소리의 연속적 파장 역시 잘게 쪼개진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를 표현하는데는 44kHz, 16bit로 충분하다고 알려져 있다. 소리를 하나의 파로 나타내면, 여기서 44kHz는 이 파의 가로, 즉 시간을 쪼개는 수치이고, 16bit는 이 파의 세로, 즉 음량을 쪼개는 수치이다. 물론 이 수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연속적인 파는 더 정교하게 쪼개질 것이고 그만큼 자연적인 소리에 더 가까워질 것이다. 문자의 경우에는, 전 세계의 모든 문자들에 다른 수를 부여하기 위해서 문자 하나 당 4 Byte 즉 32bit가 필요하다.6) 모니터에 나타나는 문자, 색, 소리에만 숫자가 붙는 것이 아니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이제는 네트워크로 연결된 모든 컴퓨터에 자기의 고유번호가 할당된다. IP 어드레스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인터넷을 처음 만들 때 IP 주소는 32비트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32비트 주소이면 전체 개수는 232=4,294,967,296개, 약 43억 개이다. 이 주소는 편의상 8비트마다 사이에 점을 찍어 네 개의 단위로 나누어 표시한다. 8비트이면 28=256이므로 10진법으로 나타내면 0.0.0.0에서 255.255.255.255까지의 주소로 표시할 수 있다. 하지만 인터넷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아직은 43억 개의 주소로 버틸 수 있지만 인터넷의 팽창 비율을 생각한다면 주소가 고갈될 날이 머지 않았다는 염려가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주소 체계가 조만간 등장하리라 생각되는데, 훗날 누군가가 인터넷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인 빈트 서퍼에게 인터넷의 지난날을 생각하면 가장 아쉬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도 바로 이것이었다. ‘인터넷 주소를 32 비트로 정한 것.’

현재 논의되고 있는 새로운 인터넷 주소 체계는 보통 IpV6(IP 버전 6)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128비트 주소 체계를 주장한다. 32비트에서 33비트로 자리수가 하나만 더 늘어도 주소는 43억개에서 86억개로 2배가 되는데 32비트보다 96자리가 더 늘어나니 그 숫자는 어마어마하다. 이 주소 체계가 도입되면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 각각에게 1000개씩의 IP 주소를 줄 수 있다. 또 앞으로는 모든 전자 제품들도 다 네트워크로 연결될 것이므로, 각 개인 뿐만 아니라 모든 가정의 모든 가전제품들, 예컨대 냉장고, TV, 세탁기 등도 각자 하나씩의 IP주소를 가지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자기 고유의 번호를 가질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마치 사람들에게 고유의 주민등록번호가 있는 것처럼. 존재하는 것은 오직 수들의 계속된 나열뿐이다.


디지털의 용광로


디지털 세계의 모든 일원은 모두 수로 변환된 것들이다. 우리가 컴퓨터로 보고 즐기는 음성, 문자, 그림, 음악, 동영상 등도 그런 점에서 수로 변환된 것들이다. 다시 말해 이들 모두는 1과 0의 조합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수의 용광로 속에서 이들은 하나이다. 매체의 통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서로 이질적이어서 결합이 불가능할 것 같던 음성, 문자, 동영상, 그림이 모두 수를 매개로 해서 하나의 세계 속에 포섭된 것이다.

수의 세계로의 이러한 포섭은 크게 세 가지 중요한 의미를 함축한다. 첫째, 수치로 저장되는 디지털 정보는 분절되어 있다. 따라서 이 분절된 정보 형태가 유지되는 한, 가공, 전송, 저장, 재생 과정에서 비디오 테이프처럼 그 내용이 흐려지거나 질이 저하될 염려가 없다.

둘째, 분절된 정보가 각기 고유의 값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매우 손쉽게 정보의 검색, 복제, 변형, 수정이 가능하다. 따라서 정보의 수집, 정리, 재배열, 가공, 첨삭이 간단한 절차만으로 가능하다. 예를 들어 책과 컴퓨터에 똑같이 ‘아버지’란 글자가 기록되어 있다고 하자. 책에서 ‘아버지’와 동일한 글자를 찾으려고 하면 우리는 눈으로 일일이 책장을 넘기며 찾아야 한다. 하지만 컴퓨터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아버지’란 문자는 컴퓨터에서 동일한 디지털 수치로 변형되어서 저장된다. 그 수치가 예컨대 ‘10000011111000’이라고 하자. 그러면 1과 0이 동일한 순서로 배열된 것이 있는지를 확인함으로써 ‘아버지’란 글자를 찾을 수 있다. 굳이 사람이 일일이 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를 통해,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마지막으로,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고유의 값을 가진 디지털 정보들은 한편으로는 분절되어 있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매우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다. 디지털 정보들은 그 정보의 형태와 내용에 상관없이 필요에 따라 문서와 문서, 문서와 단어, 단어와 단어, 문자와 영상, 영상과 소리, 문자와 소리 등 온갖 가능한 방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바로 이것을 구현하는 것이 하이퍼텍스트이다. 하이퍼텍스트는 두 겹으로 이루어진 텍스트이다. 눈에 보이는 텍스트와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서로 이어주는 텍스트. 따라서 하이퍼텍스트는 우리에게 ‘두 겹으로 생각’할 것을 재촉한다. ‘한 줄타기’를 강요하던 책은 이제 커다란 도전에 직면한다. 이 도전을 살피기 전에 먼저 지금의 책이 있기까지의 이력을 살펴보자. 책의 역사는 우리가 지금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책의 모습 역시 지속적으로 변화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변화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책의 역사


책의 의미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책은 ‘글이 쓰여지거나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겹쳐서 한쪽을 꿰맨 물건’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형태의 책의 시조는 코덱스(codex, 筆寫本)라 불리는 양피지조각의 묶음이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친숙한 책의 형태는 이 코덱스의 양피지가 종이로 바뀌고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하여 책을 대량 생산하게 되는 오랜 과정을 거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물론 코덱스 이전에도 정보의 전달과 보존을 담당한 것이 있었다. 파피루스 두루말이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6-8미터의 가로로 길쭉한 한 면에 글을 쓰는 두루말이와 작은 조각들을 하나로 묶은 코덱스에는 무시 못할 차이가 존재한다. 어떻게 보면 둘 사이에는 연속적인 측면보다 단절적인 측면이 더 강하다. 코덱스는 두루말이가 가지지 못한 상당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코덱스는 첫째, 글의 어느 지점이든 바로 열어 볼 수 있기 때문에 중간의 어떤 구절을 찾기가 쉬웠다. 둘째, 종이나 양피지의 양쪽을 다 쓸 수 있었다. 셋째 필요한 만큼 쪽을 계속 추가함으로써 매우 긴 글도 실을 수 있었다. 코덱스가 인기였던 것은 그것으로 성경 전부를 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루말이로는 마태복음 하나만으로도 꽉 차는 반면, 코덱스는 성경 전부를 한 묶음 안에 다 실을 수 있다. 그리하여 기독교의 확산과 함께 두루말이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그 자리를 코덱스가 대신했다.

책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 이해의 밑바닥을 이루는 것은 바로 이 코덱스에서 시작되어 구텐베르크에 의해 혁명을 이룬 ‘인쇄된 책’이다. 물론 코덱스가 두루말이를 몰아낸 5세기경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책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고대에는 책은 큰소리로 읽혀지기 위해 쓰여졌다. 이때에는 띄어쓰기도 되지 않았으며 마침표, 쉼표, 콜론, 세미콜론 등과 같은 구두점들도 없었다. 따라서 단어들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큰소리로 소리내어 읽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때의 작문은 받아쓰기를 통해 이루어졌다. 띄어쓰기가 일반화된 것은 11세기에 이르러서이다. 처음 띄어쓰기는 읽기의 보조수단으로 시작되었지만 이는 ‘속으로 읽기’의 발전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스콜라 철학과 복잡한 지적 사유가 등장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가속되었다. 속으로 읽기는 정보를 훨씬 빠르게 습득할 수 있도록 해 줌으로써 복잡한 개념들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를 증대시켰다. 그리하여 저자들은 받아쓰기를 시키는 것이 아니라 직접 양피지나 종이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고딕 필기체가 이 시기에 등장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필체는 빨리 쓸 수 있으면서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씨체였다. 스콜라 학자들의 글이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책은 이를 체계적인 디자인과 지면 배치를 통해 반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리하여 등장한 것이 바로 장, 절, 그리고 목차, 주제에 대한 알파벳 분류, 머리말이다. 이 밖에도 방주, 인용부호 등도 등장하게 되는데 이것들은 모두 시각적인 장치들로서 듣는 사람이 아닌 읽는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하기 전까지 책의 복제는 수도원의 차가운 필사실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15세기에 구텐베르크에 의한 인쇄기의 발명은 사유와 학문에 혁명을 가져왔다. 인쇄기는 같은 필체의 책을 손쉽게 대량 복사했으며, 완결된 편집을 가능케 했다. 그리고 맥루안이 지적하는 것처럼 인쇄기는 구술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을 시각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바꾸었다. 소리내어 읽는 것은 이제 금지되어야 할 습관이 되었다. 인쇄기를 통한 대량생산으로 인해 정보량과 정보의 보급 속도가 급격하게 늘어났으며 이는 사회,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다 알다시피 종교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다. 글을 읽는 속도도 그렇다. 고대의 지식인들이 지금의 지식인들의 글 읽는 속도를 보면 혀를 내 두르리라. 


전자책


최근 이 인쇄된 종이책이 디지털의 도전을 받고 있다. 종이책의 대량생산 가능성, 휴대성, 영구성은 지금까지 지식과 정보를 사람들에게 공표, 해설, 전파, 보존하는 책의 기본 목적을 수행하는 가장 좋은 도구였다. 그런데 이런 책의 기본 목적을 더 잘 달성할 수 있는 길을 디지털로 통칭되는 새로운 정보통신기술이 열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요즘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디지털 책은 전자책이다. 사람들은 전자책이 더 이상 종이를 필요로 하지 않고, 잉크도 필요 없으며, 굳이 서점을 찾아갈 필요도 없이,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우편비용 한 푼 들이지 않고 독자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점에 열광한다. 단 하나 문제가 있다면 디지털화로 인해 너무 쉽게 원본과 똑같이 복제 전파될 수 있기 때문에 저작권 보호와 관리가 어렵다는 점 정도라고 할까?

하지만 전자책은 디지털의 힘과 정신을 제대로 살리는 책이 아니다. 전자책은 단지 책의 주 재료가 종이에서 전자적인 장치, 특히 컴퓨터의 디지털 장치로 바뀐 것일 뿐이다. 지금 사람들이 열광하는 전자책은 인쇄된 종이책의 기능을 모니터로 옮겨 놓은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종이를 넘기며 책을 읽는 지금의 방식과 전자책을 읽는 방식에 큰 차이가 없다. 지금의 전자책은 비록 종이의 한계를 약간 벗어나기는 하지만 그 외의 다른 부분에서는 종이책을 그대로 모방한다. 따라서 전자책은 인쇄 기술에 의해 규정된 글쓰기 공간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책의 쪽 순서는 책이 묶이면서 고정된다. 그리고 독자를 그 순서를 따라 움직이게 한다.


책 = 백과사전 = 도서관


디지털은 종이책의 단순한 개량에 그치지 않고, 책의 본래 이념을 되돌아보게 한다. 전자책은 팩시밀리와 비슷하다. 디지털의 세계에서 여전히 아날로그의 형태를 고집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우리는 인쇄된 책의 편협한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보다 폭넓고 열린 마음으로 미래의 책의 모습을 그려보아야 한다. 우리는 책이 처음 만들어질 때의 근본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책은 언어적인 생각들을 담는 그릇 또는 자리이다. 책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모든 언어적인 생각들을 한꺼번에 담을 수 있는 큰 그릇, ‘위대한 책’(Great Book)을 생각하게 된다. 사실 이 위대한 책의 꿈은 두 가지 형태로 구현되어 왔다. 도서관과 백과사전이 그것이다. 그런데 도서관과 백과사전은 서로 상반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즉 도서관은 가능한 한 많은 책들을 한 곳에 모으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고, 백과사전은 책의 내용을 가능한 한 하나의 책에 압축해 넣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 도서관은 양을 늘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고 백과사전은 양을 줄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도서관과 백과사전의 이 기능이 하나로 통합될 때 사실 ‘위대한 책’이 실현될 수 있을 터인데 그것이 종이책에서는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 불가능했던 일이 이제 디지털이라는 도구 위에서 실현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바로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다름 아닌 디지털의 정신을 가장 잘 실현해 보이는 하이퍼텍스트이다. 


디지털 시대의 책 = 하이퍼텍스트


‘하이퍼텍스트’가 뭔지를 알려면 인터넷의 ‘월드와이드웹’을 생각하면 된다. 사실 인터넷이 전 세계인의 필수적인 네트워크로 발전하게 된 데에는 월드와이드웹의 절대적 공헌이 있었음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웹의 등장과 함께 인터넷은 마치 기름에 불붙듯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월드와이드웹은 인터넷을 대학교나 컴퓨터 관련 종사자들의 전유물에서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는 보편적인 도구로 탈바꿈시켰다. 왜냐하면 월드와이드웹에서는 마우스 하나만 있으면 어디로든 돌아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복잡한 키보드의 자판을 외울 필요도 없다. ‘링크’라고 부르는 ‘파란 줄그어진 글자’를 마우스로 클릭하기만 하면 바로 그와 관련된 다른 문서로 넘어간다.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하이퍼텍스트이다. 월드와이드웹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도 문서 내의 어느 부분을 클릭하면 다른 문서로 이동한다는 바로 이 점이다. 이는 책에서 책장을 넘기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책장은 위에서 아래로 한 페이지의 글을 다 읽었을 때 넘기는 것이다. 책에서는 책장을 넘기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웹의 한 문서 안에는 다른 문서로의 넘어가는 다양한 통로가 마련되어 있다. 어느 경로를 선택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독자의 판단에 맡겨져 있다. 이처럼 다른 문서로의 다양한 경로를 마련해 놓은 텍스트, 이를 하이퍼텍스트라고 한다. 하이퍼텍스트에는 독자들을 여러 방향으로 이끄는 ‘보이지 않는 끈’이 있다. 이런 하이퍼텍스트에서는 각주가 본문보다 더 중요하다. 책에서는 각주를 읽은 후에는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야 하지만 하이퍼텍스트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각주 이외에 따로 본문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각주에서 각주로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슬이 존재할 뿐이다.

로버트 쿠버는 이러한 상황을 ‘선(線)의 횡포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이야기한다. “소설의 힘의 많은 부분은 선, 즉, 문장의 시작으로부터 마침표까지, 페이지의 꼭대기부터 맨 밑까지,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저자의 감독 하에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그 운동 속에 구현되어 있다. 물론 인쇄의 긴 역사 동안 이 선의 힘에 맞서기 위한 많은 전략들이 있어 왔다. ... 그 선의 횡포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이 마침내 하이퍼텍스트의 도래와 함께 이제 정말 가능한 것으로 인식된다.”7)


하이퍼텍스트의 세 가지 특성


종이의 묶음인 책으로부터 컴퓨터라는 전자적인 공간에 펼쳐지는 하이퍼텍스트로의 이 이동이 그렇다면 과연 우리에게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인가? 우리의 관심사는 저변의 기술적 변화가 가져다 줄 글쓰기와 글읽기의 변화된 모습,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끈’의 위력이다. 하이퍼텍스트 문서들에는 우리가 책과 비교해서 그냥 지나쳐서는 안되는 부분이 세 가지 있다. 첫째는 하이퍼텍스트 문서 구성 성분의 복합성이고, 둘째는 하이퍼텍스트가 만드는 경로의 다양성이며, 셋째는 하이퍼텍스트 문서의 불확정성이다.

첫째로 하이퍼텍스트 문서의 구성 성분부터 살펴보자. 하이퍼텍스트로 된 홈페이지들은 단순히 글자들의 나열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거기에는 글자뿐만 아니라 그림, 사진, 동영상까지도 어우러져 있다. 이는 하이퍼텍스트가 디지털 기술의 구현체인 컴퓨터에 기반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하이퍼텍스트를 이루는 구성 성분은 또 있다. 홈페이지에는 기본적으로 게시판, 방명록이 마련되어 있다. 그 외에도 독자의 참여를 가능케 하는 많은 입력 장치들이 제공된다. 심지어는 실시간 채팅도 가능하다. 따라서 이제 저자는 단순히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게시판을 관리하고 답장을 게시하는 등 독자와 직접 대화를 나눌 방법을 찾고 고민해야 하며, 독자는 단순히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 공간에 참여하여야 한다.

둘째로 하이퍼텍스트에는 다양한 경로가 마련되어 있다. 하나의 문서에는 다른 문서로 넘어가는 다양한 통로가 사방으로 열려 있다. 또 그 통로는 안팎을 가리지도 않는다. 한 사이트 안의 문서와 밖의 문서로 이동하는 것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다른 사람이 쓴 다른 사이트의 문서라 하더라도 내 문서에서 연결되면 내 글의 한 부분으로 포섭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 문서에는 명확한 경계가 없다. 경계 없이 맞물린 공동의 공간을 독자는 자기가 선택한 경로를 따라 항해한다. 따라서 똑같은 사이트를 돌아다녀도 독자는 자기만의 선택에 따라 다른 경험을 한다. 예를 들어 최초의 상업적 하이퍼텍스트 소설인 마이클 조이스의 ?오후?8)를 보면, 주인공인 피터가 사장과 점심을 먹는 장면은 다른 장면으로의 세 가지 경로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사장의 아내를 생각하는 장면이고 둘째는 동료와의 정사를 생각하는 장면이고 셋째는 자기가 맡은 골치 아픈 업무를 생각하는 장면이다. 어느 경로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피터의 점심의 의미는 다르게 해석된다. 모든 마디는 그것이 어디로부터 왔으며 또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또 설령 모든 마디, 즉 모든 에피소드를 다 방문해 보았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거기에는 새롭게 읽을 방법이 남아 있다. 예전과는 다른 경로를 선택해서 읽으면 그것은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인터넷이란 정보의 바다에는 무한의 바닷길이 펼쳐져 있다. 누구든지 그 바닷길 위에 원하는 대로 배를 몰아갈 수 있다. 배가 지나가면 수면은 다시 언제 배가 지나갔냐는 듯 매끄럽게 펼쳐져 있다. 각자는 각자의 필요와 관심에 따라 바다 표면에 다른 길을 낼 수 있다. 고정된 위치가 있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변화시킴으로써 다르게 읽힐 수 있는 정보, 이것이 하이퍼텍스트이다.

셋째로 하이퍼텍스트 문서는 인쇄된 책처럼 한번 찍혀 나오면 영영 고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하이퍼텍스트는 언제나 미완(未完)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세 가지 측면에서 미완이다. 첫째, 쉽게 수정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완이다. 워드프로세서로 써서 파일로 저장해 놓은 글은 언제든지 다시 불러서 고치고 지우고 순서를 바꾸고 내용을 덧붙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인터넷상에 올라와 있는 글들도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고치고 지우고 순서나 배치를 바꿀 수 있다. 둘째, 계속 성장을 한다는 점에서 미완이다. 인터넷 정보는 끊임없이 갱신되고 추가된다. 홈페이지를 만든 사람들에 의해서도 수정, 추가, 갱신되고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참여를 보장함에 의해서도 내용이 늘어난다. 셋째, 하이퍼텍스트는 정보의 거대한 네트워크라는 점에서 미완이다. 네트워크의 한 부분으로서 부분은 전체의 변화에 함께 연동한다. 하이퍼텍스트에서는 우리 모두가 정보의 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 하나의 거대한 책을 함께 써 나가고 있는 셈이다. 하이퍼텍스트는 완결되지 않은, 끝이 열려 있는 책이다.


하이퍼텍스트로 생각하기


하이퍼텍스트가 책과 다른 것은 변화하고 성장하며 저자와 독자가 함께 만들어 간다는 점이다. 하이퍼텍스트도 책이라 한다면 이제 책은 ‘읽는 것’이 아니라 ‘돌아다니는 곳’이다. 그것은 마당이다. 이러한 하이퍼텍스트는 지금까지의 책에 대한 태도 변화를 요구한다. 지금까지의 책은 영구 불변의 표상이었다. 책은 ‘시간을 초월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믿으며, 역사를 초월해서 인류 모두에게 영원한 진리를 이야기해 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책은 세계의 질서를 보여주는 것이며 따라서 “1,2,3장”, “서론, 본론, 결론” 등의 목차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정리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책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인쇄기의 발명과 함께 생겨난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똑같은 모양으로 대량생산되며, 또 한번 찍혀 나오면 더 이상 고칠 수 없는 인쇄된 책의 특성에 현혹되어 책에 대한 지금의 신화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제 선형적이고 순차적인 질서를 강요하고, 두꺼운 표지에 싸여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유기체로 취급되던 책은 해체된다. 인쇄문화가 만들어 놓은 전통은 뒤집고 망가뜨려진다. 하이퍼텍스트는 이 해체된 책의 자리를 메꿀 새로운 글쓰기이다. ‘해체’를 넘어 하이퍼텍스트는 ‘창조’로 우리 곁에 다가오고 있다. 하이퍼텍스트란 새로운 책에는 예전의 독자를 당황케 하는 다양한 가능성들과 길들이 펼쳐져 있다. 새롭게 설정되는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신하는 마디들이 있다. 불후의 업적으로서의 책이 아닌 수정, 변화를 거듭하는 책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따라서 ‘불변의 것에의 의지’가 아니라 ‘자기 극복의 의지’일 것이다.

횡설수설(橫說竪說)이란 말이 있다. 기존의 책은 사람들의 횡설수설을 막기 위해 질서를 잡아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이퍼텍스트는 독자에게 제공되는 자유만큼 밑도 끝도 없이 횡설과 수설을 조장한다. 이 자유의 대가는 초보자나 입문자에게는 과도한 부담일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다시 일사불란함의 안락 속에 자기를 묻어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심 없음을 중심의 상실이 아닌 다른 것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들에게는 이 하이퍼텍스트에서 세계의 진리가 아닌 세계의 놀이에 대한 유쾌한 긍정의 길을 찾을 있을 것이다.9) ‘우연히 뭔가를 잘 찾아내는 능력’(serendipity), 이것이 이 세계의 덕목이다.


1) M. McLuhan, The Gutenberg Galaxy: The Making of Typographic Man(Univ. of Toronto Press, 1972), 124


2) 배식한, ?인터넷, 하이퍼텍스트 그리고 책의 종말? (책세상, 2000), 157-8


3) N. Negroponte, Being Digital (New York: Alfred A. Knopf, 1995), 11-13


4) 그리고 이 단절적인 수가 우리에게는 가장 자연스러운 수, 즉 자연수이다.


5) 256=28이므로 R, G, B 각각 8bit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R, G, B가 모여 성립되는 하나의 색은 8x3=24bit가 필요하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색의 총 가짓수=28x28x28. 좀 더 설명하면, 흰색은 R=255, G=255, B=255. 검은색은 R=0, G=0, B=0


6) 이렇게 32bit로 만든 코드가 바로 유니코드(Unicode)이다.


7) Robert Coover, "The End of Books", New York Times Book Review(June 21, 1992), 23


8) Michael Joyce, Afternoon, a story, 1987


9) Jacques Derrida, (trans.) Alan Bass, "Structure, Sign and Play", Writing and Difference(The Univ. of Chicago Press, 1978), 2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