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퍼텍스트란 무엇인가?


컴퓨터를 숫자 계산이 아닌 문자 처리 기계로 보는 사고의 전환 이후 컴퓨터는 정보기기로서의 길을 걸어왔다. 그런 컴퓨터가 정보 기기로서의 꽃망울을 활짝 피운 것은 우리가 지금 인터넷이라 부르는 월드와이드웹에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정보들의 명실상부한 네트워크를 처음으로 이루었다 할 이 웹의 배우에는 두 겹으로 된 새로운 형태의 텍스트인 ‘하이퍼텍스트’가 있다.

 

하이퍼텍스트의 흔적은 웹 여기저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인터넷 주소를 보면 예컨대, ‘http://cogitio.pe.kr’과 같이 쓰는데, 여기서 머리에 붙은 ‘http’가 ‘HyperText Transfer Protocol’의 약자이다. 또 웹 문서 ‘index.html’에서 쓰이는 확장자 ‘html’도 ‘HyperText Markup Language’의 약자이다. 이는 곧 웹이 하이퍼텍스트로 씌어진 문서를 전송, 전달, 검색하는 정보 장치임을 의미한다.

 

‘하이퍼텍스트’란 말은 테오도르 넬슨이 1965년에 처음 썼다. 그가 의미한 하이퍼텍스트는 “끈들에 의해 연결된 일련의 텍스트들의 덩어리로서 독자들에게 다른 경로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는 겹겹이 포개진 종이의 한쪽을 묶은 책과는 다른 것이다. 책에서는 쪽을 넘기는 단순한 길만 있을 뿐이다. 반면에 하이퍼텍스트는 쪽에 해당되는 마디(node)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고 이것들이 끈(link)들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이퍼텍스트에는 독자들을 여러 방향으로 이끄는 ‘보이지 않는 끈’이 있다. 어느 끈을 선택할지는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책으로 말하자면 하이퍼텍스트에서는 각주 이외에 따로 본문이 없고 오직 각주에서 각주로의 끊임없는 사슬만이 존재할 뿐이다.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을 보라. 그 책들은 하나같이 단단한 표지에 쌓여 다른 책들과의 교류와 소통은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하지만 속은 그렇지 않다. 많은 책들은 각주나 참고 문헌 등을 통해 다른 책들과 서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상상을 해보라. 그 연결의 끈들이 우리 눈에 보이면 어떨까? 한 책의 어느 부분을 읽다가 거기에 붙어 있는 끈을 따라 다른 책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면 어떨까? 또 그 끈이 다른 도서관, 다른 나라, 지구 반대편의 책에까지 연결되어 있다면 어떨까? 아마도 도서관의 서가는 무수히 많은 끈들의 거미줄로 하얗게 덮일 것이다. 만약 그런 거미줄이 있다면 검색에 걸리지 않아서 사장되는 외톨이 정보의 양은 엄청나게 줄어들 것이다. 하이퍼텍스트는 책의 경계를 넘어 전 세계의 정보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끈들을 가진 텍스트이다. 이는 다큐버스(docuverse), 즉 모든 문서들이 리좀처럼 연결된 문서들의 우주이다.

 

물론 이를 마냥 좋게만 볼 수 없는 측면도 있다. 목차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정돈된 체계적 지식을 제공하는 책의 선형적, 순차적 구조와는 달리 하이퍼텍스트는 사용자의 선택을 보장한다는 미명하에 우리를 자꾸 미로에 빠트림으로써 초보자나 입문자에게는 과도한 부담을 줄 수도 있다. 또 밑도 끝도 없는 횡설과 수설의 단편들로 이루어지는 그런 구조는 단지 얕고, 간단하고, 쉬운 내용들을 조장할 뿐, 심오한 전문가적 식견과 깊이 있는 사고를 저해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다시 일사불란함의 안락 속에 자기를 묻어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심 없음을 중심의 상실이 아닌 다른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이 하이퍼텍스트에서 세계의 진리가 아닌 세계의 놀이에 대한 유쾌한 긍정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개인의 시대, 다양성의 시대이다. 개인들이 자기들만의 사소한 일상 속에서 순간순간 즐거움을 찾으며 살아가는 시대이다. 아직도 국가나 사회나 역사가 영웅들의 탄생을 부추기며 우리에게 자기 희생을 권하기는 하지만 그런 영웅은 있지도 또 필요하지도 않다. 이제 우리에게는 인내와 고통, 역경의 극복으로 점철된 긴 시간에 걸친 장대한 이야기는 먹히지 않는다. 우리의 시간 템포는 이것보다는 훨씬 더 빠르고 경쾌하다. 인생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로 엮을 만큼 우리는 그렇게 비장할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시대에는 원형적 역사관이 어울린다. 기독교적 직선사관에서는 모든 일은 끝에서야 완결된다. 따라서 나 개인의 삶은 내 생애 속에서 완결을 보지 못하고 끝날 수 있다. 우리는 결국 세례 요한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주입받는다. 반면에 원형적 역사관은 일견 목적의 상실로 인한 허무를 유포할 수도 있지만, 다르게 보면 매년, 매일, 매순간 모든 일이 완결된다고 가르친다. 하이퍼텍스트는 그런 점에서 영원회귀의 사고와 상통한다. 정리가 안 되어 있고 흐트러져 있는 것을 못 견디는 이들에게는 하이퍼텍스트가 성에 차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미의 기본 단위를 가능한 한 짧게 가져가면서 매 순간순간에서 ‘우연히 뭔가를 찾아내는 것’(serendipity)을 즐길 수 있는 이들에게는 이는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