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스페이스의 꿈과 현실
- 하이퍼텍스트와 포스트모더니즘 -

0. 들어가는 말

1. 하이퍼텍스트란?

2. 하이퍼텍스트적 기호 교환의 역사적 위치

3. 하이퍼텍스트의 탄생에서 월드와이드웹까지

4.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하이퍼텍스트적 텍스트 이해

5. 하이퍼텍스트와 리좀(rhizome) 구조

6. 하이퍼텍스트와 포스트모더니즘

7. 비판적 고찰

8. 맺는 말

참고문헌, 관련사이트, 하이퍼텍스트의 3가지 황금율

 

맥루한은 '미디어는 메시지'라고 주장한다. 미디어는 그 자체로 무의식적인 영향력, 즉 최면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나르시스처럼 사람들은 최면에 걸려서 새로운 기술적인 형태 속에서 그것에 맞게 자신을 한편으로는 잘라내고 한편으로는 잡아늘이고 있다. ... 왜냐하면 미디어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떠넘기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1) 또한 그는 미디어를 인간의 손이나 발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부른다. 미디어도 손과 발처럼 인간에게 달라붙어서 인간의 사고와 감정, 판단을 확장시키면서 또한 제한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미디어를 단순히 메시지나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 정도로 여겨서는 안 된다. 미디어라는 형식에 의해 그 내용이 규정된다. 새로운 미디어는 사고와 감정의 새로운 구조, 새로운 방식의 지각을 불러일으킨다

하이퍼미디어는 이제까지 인간이 경험에 온 것과는 다른 독특한 정보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것과 구별되는 미디어이다. 이것은 이음(link)과 마디(node)에 의해 이루어져 있으며, 컴퓨터에 의해 수행되며, 상호작용적이며, 항해적인(navigational) 미디어이다. 이것은 또한 이제까지 별도의 존재 영역을 확보하고 있던 텍스트, 그래픽, 사진, 소리, 비디오가 하나로 합쳐지는 자리이다. 이러한 부분들의 합침은 "단순한 합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 합의 '이상'도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이전 요소들의 합과는 단적으로 '다른 것'이다."(2) 이 다름을 만드는 것은 바로 이 각각의 요소들이 합쳐지는 구조에 있으며 그 구조는 바로 하이퍼텍스트적 구조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이퍼미디어에서 새로운 것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 하이퍼미디어의 조직원리인 하이퍼텍스트이며 그것의 가능성과 한계이다.

우리는 맥루한의 말에 따라 이 하이퍼텍스트라는 미디어가 가지는 메시지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는 메시지는 미디어의 형식과 관계되는 것, 즉 미디어 그 자체로부터 파생되는 것이므로 하이퍼텍스트로 표현되는 구체적인 내용들과는 별개의 것이다. 그런데 이 형식 자체가 담고 있는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메시지의 가능성에 대해 가장 많은 관심을 표명하고 거기에서 새로운 희망까지도 엿보고자 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기 때문이다.

하이퍼텍스트가 가지는 몇 가지 구조적 특징들을 살펴본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의 그러한 희망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 첫 번째 실마리는 바로 하이퍼텍스트의 비선형성(nonlinearity)이다. 순차적 질서나 위계적(hierarchial), 조직적인 구조를 결여한 채 혼란스럽기(chaotic)까지 한 것이 하이퍼텍스트의 구조이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의 사고 과정을 닮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이퍼텍스트의 이러한 특성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탈-이야기, 탈-중심, 탈-주체, 탈-로고스의 논의와 그 맥이 이어진다. 특히나 들뢰즈와 가타리의 리좀(rhizome)에 대한 논의와 연결지어보면 그 유사성은 더더욱 두드러진다. 이 유사성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기대를 가지게 한다.

리좀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탈주체, 탈중심, 탈로고스의 이념을 실현하는 어떤 시스템을 보여주기 위한 비유라면, 하이퍼텍스트는 그러한 시스템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현실적 도구가 아닌가?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표피적 유사성에 속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또는 그 유사성에 너무 많은 기대를 걸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하이퍼텍스트가 뿜어내는 메시지의 강도는 어느 정도이며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스트의 기대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것인가? 그것 역시 하나의 신화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특히 오늘날 모든 사회적 유토피아와 사회적 기획들이 실패로 끝난 뒤, 아직도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은 테크놀로지와 미디어를 향해 그들의 발길을 더더욱 빠르게 재촉하고 있다. 생태학적 기술들, 재창조와 심리학적 기술들, 신체와 감성 기술들을 향해. .... 기계의 시대가 기계를 생산의 보편적 도구로 노래하면서 다양한 신화를 만들어 낸데 반해, 포스트모던 시대는 보편적 네트웍의 신화를 전파하고 있다. 텔레마틱(3) 테크놀로지는 해방과 증식, 풍부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약속한다. 메시지가 별빛처럼 사방으로 흐르는 열린 네트웍의 사회 체계. 이제 신화는 "미디어는 메시지다!"가 아니라 "미디어는 네트웍이다!"이다."(4)

네트웍으로 표현되는 이 신화(5) 역시 물거품처럼 사라질 하나의 유토피아인가?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염두에 두고 하이퍼텍스트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접합점을 건드려 보고자 한다.

1. 하이퍼텍스트란?

전통적인 텍스트는 기본적으로 선형적(linear)이고 순차적인(sequential) 형태를 취한다. 글을 쓰면서 우리는 우리가 앞에서 말했던 것을 다음에 말하고자 하는 것과 연결시키고자 한다. 텍스트를 조직화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들인 "그러므로", "한편으로, 다른 한편으로", "1, 2, 3, 4장", "서론, 요약, 결론" 등은 이러한 의도를 구현하는 장치들이다. 이렇게 쓰여진 글에서 독자는 저자에 의해 생각된 순서, 스타일, 짜임새에 의해 구조화된 그대로 정보를 만난다. 그 이야기 속에서 다른 텍스트들이 참조되기는 하지만 이러한 자료들은 문서의 본문, 즉 기본 텍스트의 바깥쪽에 존재한다.

전통적인 텍스트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는 책이다. 책은 장(章)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책은 정점과 결말을 갖는다. 책은 물리적으로 독립적인 단위로 존재한다. 책은 자기의 시작과 끝을 자신의 두께를 통해 독자에게 알려준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리가 읽은 양과 읽어야할 양을 비교함으로써 그 책 속에서 우리가 처한 위치를 가늠한다.

반면에 하이퍼텍스트는 "마디들"의 집합이며, 그 마디들 속에 산발적으로 퍼져있는 "이음"에 의해 연결된다. 각각의 마디들은 하나의 단어나 하나의 조각만큼 작을 수도 있고, 하나의 책이나 다른 완성된 작품만큼 클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마디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하이퍼텍스트는 끝과 경계가 없으며 어디서든 시작이 가능하다. 여기에는 어떤 정해진 중심도 없고 따라서 가장자리도 없다. 이것은 컴퓨터 환경에서, 특히 웹 환경에서 하나의 출발점에서 마우스 클릭 하나로, 누가 쓴 것이든 또 어디에 있든, 바로 다른 정보 원천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한다.

하이퍼텍스트에서는 같은 문장(또는 같은 장)이 같은 "책"으로부터 읽혀질 필요가 없다. 한 페이지 내의 물리적 근접성에 의해 순서가 정해지지도 않고 또 페이지나 장마다 어떤 번호가 매겨지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한 텍스트의 서론에서 인용 부분으로, 거기서 인용문을 쓴 사람의 전기로, 거기서 그 글을 쓸 시기의 역사적 상황으로 옮겨간다면 나는 단순히 새로운 정보만을 얻는 것이 아니라 본래 논문의 의도와는 완전히 독립적인 방식으로 "마디들"을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무엇과 연결시키며 어떤 생각이 다른 생각의 앞에 나오거나 뒤따라오는지를 결정하는데 독자의 자유가 훨씬 더 많이 보장된다. 하이퍼텍스트의 저자와 독자는 말하자면 공저자(co-writer), 공학습자(co-learner)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텍스트를 구성하는 구성요소들을 계속해서 지도화(mapping)하고 그걸 또 다시 지도화하는 동반 여행자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로버트 쿠버(Robert Coover)는 '선(line)의 횡포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소설의 힘의 많은 부분은 선, 즉, 문장의 시작으로부터 마침표까지, 페이지의 꼭대기부터 맨 밑까지,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저자의 감독 하에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그 운동 속에 구현되어 있다. 물론 인쇄의 긴 역사 동안 이 선의 힘에 맞서기 위한 많은 전략들이 있어 왔다. .... 그 선의 횡포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은 마침내 하이퍼텍스트의 도래와 함께 이제 실질적으로 가능한 것으로 인식된다. .... 이 하이퍼텍스트에서는 우리가 그 텍스트 내에서 꾸며내거나 심어 넣지 않는 이상, 선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6)

2. 하이퍼텍스트적 기호 교환의 역사적 위치

마크 포스터(Mark Poster)는 각 시대마다 각기 다른 내적, 외적 구조를 가지는 기호 교환을 형태를 채택하고 있다고 하면서, 정보의 형태를 다음의 네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1. 대면(face-to-face) 교환
  2. 말에 의해 매개되는 교환(orally mediated exchange)
  3. 인쇄물에 의해 매개되는 글의 교환(written exchanges mediated by print)
  4. 전자적으로 매개되는 교환(electronically mediated exchange)(7)

이에 대해 버네트(Kathleen Burnett)는 이 네 가지 구분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이야기하면서 구분을 좀더 세분화한다. 우선 그녀는 대량 생산이 사회구조에 미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손으로 글을 쓰던 시기'(manuscript period)를 3) 앞에 추가하여 이를 인쇄를 통해 글을 대량 생산하던 시기와 구분한다. 인쇄기가 발명되면서 읽을거리가 대량으로 생산될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글이 엘리트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이 종교 개혁 등, 근세의 혁명적 변화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그녀는 3)과 4) 사이에 또 한 시기를 추가하고 이를 '비컴퓨터 정보 형태'의 시기라고 부른다. 컴퓨터의 등장은 곧 정보의 디지털화를 의미하며, 이 디지털 정보의 분절성이 하이퍼텍스트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컴퓨터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컴퓨터의 등장 이전에 20세기를 주름잡았던 정보 양태로 그녀는 소리미디어(라디오, 전화), 시각미디어(시각예술매체(그림, 조각), 사진), 복합미디어(TV, 영화, 비디오)를 들고 있다.(8)

전자적으로 매개되는 교환은 정도의 차이는 있다고 하더라고 기본적으로 하이퍼텍스트와 관계한다. 전자적으로 이루어진 정보는 그것이 어떤 것과 '이어진 마디'(linked node)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하이퍼텍스트적이다. 디지털 정보에서는 그것이 명령어들의 집합으로 되어있든, 마우스로 클릭할 수 있는 아이콘으로 되어있든, 아니면 풀다운 메뉴로 되어있든, 어쨌든 하나의 마디가 다른 마디와 연결될 수 있는 이음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하이퍼텍스트적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전자적으로 매개되는 교환을 다른 정보 형태, 그 중에서도 특히 단순히 전기적인 성질을 이용하는 20세기의 여타의 미디어(TV, 비디오) 등과 구별되는 점이다.

우리는 이러한 구분 위에 추가로 또 하나의 구분을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전자적으로 매개되는 교환을 둘로 나누는 일이다. 이것을 둘로 나누는 기준은 바로 네트웍이다. 즉 컴퓨터가 '네트웍과 결합되기 이전'과 '네트웍과 결합된 이후'이다. 이러한 구분은 그 자체로 중요할 뿐만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의와 관련하여서도 중요하다. 그 자체로는, 컴퓨터가 네트웍과 특히 TCP/IP라는 인터넷 프로토콜과 결합하여 월드와이드웹(World-Wide-Web)이라는 20세기말을 특징짓는, 그 속도의 변화에 있어 역사상 전례가 없는 현상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중요하고,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해서는, 웹이 공동의 지적 공간을 마련해준다는 점, 즉 지적 활동이 한 개인의 차원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공동 공간에서도 가능하며, 이것이 한 개인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 유아론적 주체를 극복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3. 하이퍼텍스트의 탄생에서 월드와이드웹까지

하이퍼텍스트의 기원을 우리는 보통 배네버 부시(Vannevar Bush)가 1945년 7월에 Atlantic Monthly에 실은 "As we may think"라는 논문으로 삼는다. 그가 거기서 하이퍼텍스트라는 이름을 쓴 것은 아니지만 그 글 속에서 그가 memex, 즉 Memory Extender(기억 확장기)라고 부른 것에서 하이퍼텍스트의 본질적인 의미가 최초로 분명하게 문자의 형태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술의 급속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고를 창조적으로 운영하고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기술은 "돛단배를 타던 시절에 사용하던 것과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고 지적한다. 물론 기계적 장치가 가지는 저장 능력만큼은 마음의 한계를 넘어서는 발전을 거듭해 왔다. 기억한 것을 쉽게 잊어버리거나 또는 그 내용이 흐려지는 우리의 마음과 달리 기계적 저장 장치는 그것을 한번 저장하기만 하면 그 장치의 물리적 수명만큼 오래 그 내용을 명료하게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의 내용으로부터 다른 내용으로 넘어가는 마음의 연상 능력에 대해서는 이를 도와줄 어떤 기술도 발전된 것이 없었다. 부시는 이러한 상황에서 물론 마음이 연상의 궤적을 따라가는 속도와 유연성만큼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마음보다 나은 저장 능력을 기반으로 여기에다 이러한 연상 능력을 가미할 수 있는 기계적 장치를 만들 수만 있다면 그것은 역사적으로 획기적인 장치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시스템은 자유롭게 연관된 주제들을 연결시킬 수가 있어서, 유사한 내용을 가진 것들을 서로 연결시켜 보여주어야 한다.

"개인이 사용하는 미래의 어떤 기계를 생각해보자. 그 기계는 일종의 기계화된 사적인 서류 더미 또는 도서관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이름이 필요한데, 언뜻 드는 생각은 'memex'가 좋을 것 같다. memex는 한 개인이 자기의 모든 책들, 기록들, 대화들을 저장하는 어떤 장치이다. 그것은 기계적으로 잘 처리되기 때문에 매우 빠른 속도와 유연성을 가지고 그 개인은 그것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각 개인의 기억을 확장시켜주는 그 개인의 친밀한 보충 장치이다." (9)

이러한 시스템을 통해 각 개인은 자기에게 이용 가능한 자료들의 미궁을 통과하는 자신의 관심의 족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상호작용적 백과사전 또는 도서관'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이것은 이것을 이용하는 사람의 관심에 따라 다양한 지점에서 시작될 수 있으며 다양한 순서로 읽혀질 수 있다.

부시의 이러한 개념은 20년이나 지난 1965년에야 넬슨(Nelson)에 의해 'Hypertext'란 개념으로 공식적으로 태어나게 된다. 그 또한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어떻게 하면 더 잘 조직화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그는 하이퍼텍스트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하이퍼텍스트란 비순차적인 글쓰기를 말한다. 가지를 치고 독자들에게 선택을 허용하는 텍스트. 상호작용적 스크린에서 가장 잘 읽히는 것. 쉽게 말해서 이음들에 의해 연결된 일련의 텍스트의 덩어리들로서 독자에게 다른 경로를 제공하는 것."(10)

그는 이 개념을 그가 수행하고 있는 제나두(Xenadu) 프로젝트에서 구현하고자 하였는데, 여기서 구현될 제나두 시스템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써오고 앞으로 써 갈 모든 것들의 저장소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은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며 따라서 온라인 상에서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제나두 시스템은 실현되진 않았지만 그것의 기본 개념은 이제 웹을 통해 그 실현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웹은 그 전까지 하나의 컴퓨터 안에서 구현되고 있던 하이퍼텍스트 시스템을 공통의 프로토콜을 기반으로 서로 떨어진 곳에 있는 다른 컴퓨터들과 연결시킴으로써 세상의 모든 정보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다. 게다가 이 연결은 컴퓨터와 컴퓨터의 연결이 아니라 각 사이트에 있는 문서들 간의 연결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문서의 실제 위치는 한국과 미국의 컴퓨터에 따로 파일로 저장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음을 통해 아무런 장애나 통과 절차 없이 바로 이동할 수가 있다. 정보 검색과 관련한 한, 웹은 말 그대로 전 지구를 우리의 손가락 끝에 올려놓았다.

4.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하이퍼텍스트적 텍스트 이해

Memex에서 월드와이드웹에 이르기까지의 이러한 발전과는 다른 맥락에서, 이와는 전혀 교류가 없었던 문학 이론 쪽에서 기존의 텍스트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하이퍼텍스트와 놀랄만한 일치는 보이는 논의가 있어왔다.(11)

S/Z에서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이음, 노드, 네트웍, 경로 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지금의 컴퓨터 하이퍼텍스트와 딱 들어맞는 이상적인 텍스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즉 그는 다중의 경로, 사슬, 자국들에 의해 전자적으로 연결된 단어나 이미지들의 덩어리들(그의 말로는 lexia)로 구성된 텍스트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이 이상적인 텍스트에서는 네트웍은 다양하고 상호작용적이며, 그들 중의 어떤 것도 다른 나머지를 초월할 수 없다. 이 텍스트는 기표(signifier)들의 거대한 별무리이지 기의(signified)들의 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시작도 없다. 그것은 뒤집을 수 있다. 우리는 그것에 여러 입구에서 접근할 수 있다.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자기가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다. 그것이 동원하는 부호들은 눈이 미치는 한 확장된다. 그 부호들은 결정 불가능하다."(12)

독자쪽 텍스트(readerly text)와 저자쪽 텍스트(writerly text)를 구별하고서 저자쪽 텍스트를 강조하는 바르트의 다음 논의 역시 하이퍼텍스트의 정신과 너무나 유사하다.

"문학작품의 목표는 독자를 더 이상 하나의 소비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생산자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문학은, 문학단체들이 텍스트의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를, 그것의 소유자와 소비자 사이를, 저자와 독자 사이를 무자비하게 갈라놓은 것에서 그 특징이 잘 드러난다. 독자는 여기서는 따라서 일종의 게으름 상태에 빠져 있다. - 그는 비이행적(intransitive)이다. 그는 간단히 말해 따분하다(serious). 스스로 기능하는 대신에, 다시 말해 기표의 마술 즉, 글쓰기의 즐거움에 접근하는 대신에, 그에게는 단지 텍스트를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거부하든지 둘 중의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을 뿐이다. 읽기는 국민투표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저자쪽 텍스트 반대쪽에는 그 반대의 가치, 그것의 부정적, 반동적이 가치가 있다. 읽혀질 수는 있지만 쓰여질 수는 없는 것. 독자쪽 텍스트. 우리는 모든 독자쪽 텍스트를 고전적 텍스트라고 부른다."(13)

이를 현재 개발된 가장 발전된 하이퍼텍스트 시스템의 하나인 인터미디어(Intermedia) 시스템을 개발한 사람의 다음 말과 비교해 보라.

"저자의 도구이면서 독자의 매체인 하이퍼텍스트 문서 시스템은 저자들 또는 저자들의 집단들이 정보를 서로 이을(link) 수 있도록 하며, 관련된 자료들 전체를 통과하는 경로들을 산출할 수 있도록 하며, 기존의 텍스트에 주석을 달 수 있도록(annotate) 하며, 독자에게 문헌정보나 참조된 텍스트의 본문을 가리키는 간단한 글들을 만들 수 있도록 한다. 독자는 이어진, 서로 교차하며 참조된, 주석이 달린 텍스트들을 어떤 규칙에 따라, 그러나 비순차적인 방법으로 찾아 나갈 수 있다."(14)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미셀 푸코(Michel Foucault)도 네트웍과 이음 개념을 가지고 텍스트를 생각하고 있다. {지식의 고고학}에서 그는 "책의 경계는 결코 분명하게 잘라지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책은 다른 책들, 다른 텍스트들, 다른 문장들과의 어떤 참조 시스템 속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책은 하나의 네트웍, ... 참조의 네트웍 속에 있는 하나의 마디이다."(15)

데리다 역시 계속해서 이음(liaison), 웹(toile), 네트웍(rseau)과 같은 말을 사용한다. 하지만 텍스트의 비선형성을 강조하는 바르트와는 달리 데리다는 텍스트의 개방성, 텍스트간의 관련성(intextuality), 특정 텍스트 안과 밖 사이의 구분의 부적절성을 강조한다. 특히 데리다의 책 {弔鐘}(Glas)은 그 형식 자체부터 기존의 책과는 다르다. 각 페이지가 다른 글자체를 가진 두 개의 단으로 나뉘어져서 각기 다른 글이 진행된다. 게다가 글 중간 중간에 또 다른 글자체의 짧은 글들이 삽입되어 있다. 데리다는 이 책에서 이 책과 이 책의 스타일의 대상을 'mourceau'라고 부른다. 이 mourceau는 '한 입거리', '한 조각'을 뜻하는 불어 'morceau'에 'u'가 추가된 말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이 mourceau는 그 이름이 나타내는 것처럼, 언제나 이빨로 쪼개지는 것이다. 이 이빨을 얼머(Ulmer)는 "인용부호, 꺽쇠묶음([ ]), 괄호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이 인용되면(인용부호 안으로 집어넣어지면) 거기서는 그때까지 쥐고 있던 어떤 지배적인 문맥을 놓아버리는 효과를 가져온다."(16) 이러한 불연속성에 대한 강조는 데리다가 채용한 아쌍블라주(assamblage) 개념에서도 잘 드러난다.

"여기서 제기된 이러한 종류의 모임은 서로 얽혔거나, 짜여진 것이거나 거미줄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의미의 다른 실들과 다른 선들을 허용하며 또한, 다른 것들과 결합될 준비가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 다시 분리될 것을 강요한다. 아마도 '아쌍블라주'란 단어가 이러한 뜻을 가장 잘 함축하는 말인 것 같다."(17)

5. 하이퍼텍스트와 리좀(rhizome) 구조

들뢰즈와 가타리는 텍스트의 이러한 구조를 표현하기 위해 하나의 강력한 은유를 제안하는데 그것은 바로 리좀이다. 리좀, 즉 뿌리줄기식물(박하나무, 풀들)은 사방으로 펼쳐지는, 중심이 없는 뿌리를 말한다. 그에 반해, 나무와 같은 식물 구조는 중간의 곧은 뿌리를 중심으로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위계적으로 조직화된 뿌리들을 말한다. 뿌리나 나무와 대비되는 이러한 리좀적 구조를 제시하면서 그들이 의도하는 것은 새로운 글쓰기의 모습, 책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다.

"글쓰기는 의미작용(signifying)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영역을 측량하고 그곳의 지도를 만드는 것과 관계한다."(4-5).(18)

이러한 그들의 의도는 그들이 쓴 책 {천 개의 고원}의 형식 그 자체에도 드러난다. 이 책의 서언에는 이 책의 형식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혀놓고 있다.

"이 책은 장(章)이 아니라 "고원들"(plateaus)로 이루어져 있다. ..... 맨 마지막에 읽어야만 하는 결론을 제외하고는, 이 고원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서로 독립적으로 읽힐 수 있다."(서언)

들뢰즈와 가타리는 먼저 책을 세 가지 종류로 구분하고 있다. 첫째는 '뿌리-책'(root-book)이다.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듯이 여기서의 책은 세계를 모방한다. 그러나 그 모방의 절차는 자연이 할 수 없거나, 더 이상 할 수 없는 것을 해내는 절차로서, 책이 가지는 고유한 절차일 뿐이다. 그것은 곧 둘이 되는 하나, 넷이 되는 둘..... 이라는 법칙을 끊임없이 전개하는 이항논리의 절차이다. 이 사유체계는 결코 다양체를 이해했던 적이 없다. 유기적이고, 의미작용을 하며, 주체에 의해 이루어지는 고전적인 책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둘째는 곁뿌리 체계(radicle-system)로서의 책이다. "여기서는 본 뿌리가 유산(流産)되거나 그 끄트머리가 망가진다. 그 본 뿌리 위에 직접적으로 무한히 다양한 곁뿌리들이 접목되어 번성한다."(5) 이것은 하나의 전집이나 작품집과 같은 것으로서, 여전히 하나의 통일성이 존속하고 있다. 이 체계는 진정으로 이원론과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다. 대상 속에서 통일성은 끊임없이 방해받고 훼방 당하지만, 새로운 유형의 통일성이 주체 안에서 승리를 거둔다. 세계는 중심 축을 잃어버렸고 주체는 더 이상 이분법을 행할 수조차 없지만, 언제나 그 대상의 차원을 보충하는 어떤 차원 속에서 양면적 가치(ambivalence) 또는 다층적 결정(overdetermination)이라는 보다 높은 통일성에 접근한다. 세계는 카오스가 되었지만, 책은 여전히 세계의 이미지로 남는다. 뿌리-코스모스(root-cosmos) 대신 곁뿌리-카오스모스(radicle-chaosmos)라는 이미지로 말이다.

세 번째 유형의 책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리좀이다.

"땅 밑 줄기인 리좀은 뿌리나 곁뿌리와 전적으로 다르다. 구근(球根, bulbs)이나 덩이줄기(tubers)가 리좀이다. 뿌리나 곁뿌리를 가진 식물들도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보면 리좀 형태를 하고 있을 수 있다. .... 두더쥐 굴 같은 것도 그것이 가진 서식, 식량조달, 이동, 은신, 출몰하는 기능에서 보자면 리좀이다. ... 리좀 그 자체는 매우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 감자나 개밀(couchgrass)에서 잡초에 이르기까지 리좀은 가장 좋은 것에서 가장 나쁜 것까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6-7)

이러한 리좀의 특성을 보여주는 여섯 가지 원리는 다음과 같다.

<원리 1, 원리 2> 연결과 이질성의 원리

"리좀 체계 내의 어떤 점이든 다른 점과 연결될 수 있고 연결되어야 한다."(7) 즉 리좀은 구조상 위계적이지 않다.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나중이라고 할 수도 없고, 어떤 점은 다른 어떤 점과만 연결되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모든 점들은 연결되어 있고 또 연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연결은 이질적인 것들간의 연결이다.

"리좀은 기호학적 연결 고리들, 권력 조직들, 예술들·학문들·사회적 투쟁들과 관련된 상황들 사이를 끊임없이 연결시킨다. 기호학적 연결 고리는 덩이줄기와도 같아서, 언어학적인 행위들은 물론이고, 지각, 모방, 몸짓, 인지적 행위들 같은 매우 다양한 행위들을 한 덩어리로 모은다."(7)

하이퍼텍스트를 이루고 있는 마디들은 다양한 종류의 미디어들을 포괄한다. 문자, 그래픽, 사진, 음악, 비디오, 그 외에 상호작용이나 의사소통이 가능한 다양한 수단들이 각각의 마디 전체 또는 일부를 차지한다. 이러한 마디들은 각각이 사방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이음 고리들을 가지고 있다. 각각의 마디들은 이어짐으로써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보하며 또한 자신을 다른 마디들과 이어줌으로써만 자신의 생명력을 유지한다. 어떻게 존재하느냐는 어떻게 이어지느냐에 의해 많은 부분 결정된다.

그리고 이 이질적 연결은 어느 하나에 헤게모니가 주어지는 연결이 아니다. 많은 멀티미디어 데이터베이스들은 이질적인 미디어들의 결합에서는 리좀의 원칙을 일부분 따르고 있지만 그것을 검색한다거나 그것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결국 언어적 장치의 도움을 빌지 않으면 안되었고 따라서 여러 미디어들을 관통하는 언어적 위계가 존재한다. 어쩌면 언어 그 자체가 바로 위계의 창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하이퍼텍스트에서는 이어짐에 어떤 체계적 위계도 없다. 언어가 여러 미디어를 관통하는 상위의 것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그래픽, 소리 등과 대등하게 마디를 이루는 하나의 구성 요소일 뿐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어떤 정해진 중심도 없고 따라서 가장자리도 없다.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줄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는 어디서든 시작이 가능하다. 연결의 감각은 전적으로 이용자의 몫으로 남아있다. 하이퍼텍스트 구조의 '중심'은 그 순간에 그 구조와 관계하고 있는 개개인의 위치일 뿐이다. 하이퍼텍스트가 만들어 놓은 하이퍼 공간을 통과하는 모든 경로들은 개개의 여행자들에게 똑같이 타당하다. 독자는 기존의 경로를 여행하는 항해자이기도 하며, 새로운 노선을 찾는 탐험가이기도 하며, 미답의 땅을 찾아가는 모험가이기도 하며, 미지의 것에 대한 새로운 모습을 그려내는 예언가이기도 하다.

<원리 3> 다양체의 원리

"다양체는 주체도 객체도 갖지 않는다. 다양체는 결정들(determinations), 크기들, 그리고 차원들만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차원은 그 단계가 높아지기 위해 다양체의 본성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 하나의 모임(assemblage)은 정확히, 그 연결이 증가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본성상의 변화를 겪는 다양체의 차원들의 이러한 성장이다. 리좀에는 구조, 나무, 뿌리 속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점들이나 위치들(positions)이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선들만이 존재한다."(8)

꼭두각시 인형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자. 여기에서 우리가 리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꼭두각시 인형의 팔다리와 그 팔다리를 조종하는 나무틀 사이를 연결하는 "줄들"이다. 혹자는 이 줄들의 다양체를 조종하는 것이 그것을 조종하는 사람의 의지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조종자 역시 자신의 팔과 다리가 신경 섬유들의 다양체에 매여있다. 조종자 역시 이 신경 섬유들의 다양체의 꼭두각시일 뿐이다. 그리고 이 신경 섬유들은 또다시 뇌의 회백질과 격자를 거쳐 미분화된 것들 속으로 떨어진다...... 이러한 과정은 수직의 위계를 세우는 과정이 아니다. 이것은 수직의 위계를 수평의 평평한 판에 펼쳐 놓는 일이다. "책의 이상은 이러한 종류의 바깥의 판 위에, 단 한 페이지 위에, 단 한 장 위에 모든 것을, 즉 체험된 사건들, 역사적 결정들, 개념들, 개인들, 집단들, 사회적 구성체들을 펼쳐 놓는 것이다."(9)

하이퍼텍스트 구조의 핵심 요소는 이음이다. 통상 우리는 텍스트적 점들이라 할 수 있는 마디들을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이음들은 단지 선호나 편의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음들의 편리한 용도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단축키 정도로만 생각한다.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사용자들을 데리고 가는 그 속도의 빠름 때문에 그 이동 순간은 매번 반성의 대상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눈에 보이는 익숙함의 기만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뒤집어 이음을 중심으로 마디들을 보아야 한다. 이음이 마디의 부산물이 아니라 마디가 이음의 부산물이다. 즉 이음에 의해 이루어지는 선들에 의해 마디는 항상 새롭게 태어난다.

하이퍼텍스트의 이음들은 항상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웹의 경우를 예로 들면 밑줄 그어진 푸른색 글자를 마우스로 째깍하면 새로운 화면이 나타나는 동일한 과정이 되풀이된다. 하지만 이러한 외견상의 동일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음들은 동일하지 않다. 즉 동일한 의미 관계를 함축하지 않는다. 이음을 따라 가는 과정은 추론과 해석의 과정이다. 따라서 이음은 주어진 둘을 단순히 잇는 것이 아니라 두 점이 읽히고 이해되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청소년 약물 중독에 관한 통계가 실린 페이지에서 록음악에 관한 페이지로 넘어가는 경우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페이지로부터 록음악에 관한 페이지로 넘어가는 경우, 이 록음악 페이지는 읽히는 방식은 다르지 않겠는가?(19) 위계적 구조가 강요하는 각각의 마디에 대한 고정된 해석, 즉 고정된 점과 고정된 위치를 거부하고 하이퍼텍스트는 하나의 마디를 관통하는 다양한 선들을 허용한다.

<원리 4> 의미작용 없는 단절의 원리

우리는 개미떼를 근절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리좀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리좀은 어느 한 지점에서 끊어지거나 산산히 부서지더라도 예전의 선들 중의 하나나 또는 새로운 선들 위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9) 모든 리좀은 층을 만들고, 영토를 만들고, 의미작용을 수행하는 '나누는 선들'(lines of segmentarity)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또한 끊임없이 달아나는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고 있다. 나누는 선들이 '달아나는 어떤 선'(a line of flight)에로 파열할 때마다 리좀 안에는 단절(rupture)이 있게 된다. 하지만 달아나는 선은 리좀의 일부이다.

예를 들어 말벌과 서양란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자. 서양란은 말벌의 이미지를 본떠, 말벌의 모양을 함으로써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되지만, 또한 이 이미지 위에서 말벌을 재영토화(reterritorialization)한다. 말벌은 그 자신이 서양란의 생식 장치의 한 부분이 됨으로써 탈영토화되기도 하지만, 서양란의 꽃가루를 옮겨줌으로써 서양란을 재영토화한다. 이질적인 요소들인 말벌과 서양란은 하나의 리좀을 형성한다. 하지만 나누는 선은 이 둘 사이의 관계를 평행 관계로 만들어 버린다. 이러한 평행 관계에서는 하나는 다른 하나를 모방하는 것으로, 즉 그것에 대해 의미작용을 수행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 층에 있는 식물 조직이 다른 층에 있는 동물 조직을 모방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모방 이상의 어떤 것이 있다. 즉 서양란의 말벌이-됨, 말벌의 서양란이-됨이 있다. 여기에 모방이나 유사성(resemblance)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두 이질적인 계열이 공통의 리좀에 의해 구성된 달아나는 선 위에서 파열할 뿐이다. 레미 쇼뱅(Rémy Chauvin)의 말을 따르자면 "서로 관련된 것이 전혀 없는 두 존재의 비평행적 진화(aparallel evolution)."(10)

동일한 것이 책과 세계에도 적용된다. 뿌리깊은 믿음과는 반대로, 책은 세계의 이미지가 아니다. 이러한 생각에는 책과 세계가 평행한 이항을 이루고 있다는 이항 논리가 그 저변에 깔려 있다. 반대로 책은 세계와 리좀을 형성한다. 책과 세계의 비평행적 진화가 있다. 악어의 겉가죽은 나무 둥치를 복제한 것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카멜레온의 변신도 자기 주위의 색깔을 복제한 것이 아니다. 세상에다 자기의 색깔을 칠한 것뿐이다. 바로 이것이 의미작용 없는 단절이 일어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식물들이 예컨대 바람, 동물, 사람과 리좀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식물의 지혜이다.

개미떼를 근절하지 못하는 그 이유가 네트웍과 인터넷이 만들어진 중요한 하나의 이유라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다. 컴퓨터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네트웍의 개념이 싹트기 시작한 주요한 동기 중의 하나는 핵전쟁에서도 견딜 수 있는 정보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어느 한 컴퓨터가 완전히 망가지더라도 다른 경로를 거쳐 정보를 찾아갈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것이다. 각각의 컴퓨터마다 고유의 주소를 할당하고 그 주소를 찾아가는 여러 경로를 제공하는 현재의 인터넷 프로토콜은 확실히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컴퓨터간의 관계인 네트웍과 문서간의 관계인 하이퍼텍스트는 그 차원이 다르다. 물론 컴퓨터간의 네트웍에 기반해서 이루어진 하이퍼텍스트 시스템이 바로 월드와이드웹이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하이퍼텍스트에서도 우리는 의미작용 없는 단절의 원칙을 볼 수 있다. 웹을 예로 들면, 마치 카멜레온이 주변의 환경에 적응하듯이 하나의 홈페이지는 주변의 다른 홈페이지들과 한편으로는 연결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단절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하자면 다른 것들과 어울려야 한다. 홈페이지의 이러한 어울림은 바람과 어울리는 식물의 지혜와도 같다. 각각의 홈페이지는 다른 홈페이지와 평행관계에 있을 수 없다. 끊임없이 다른 것들과 교차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으로 스스로를 내어주면서 다른 한편으로 다른 것들을 자기의 것으로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의미이다.

<원리 5, 원리 6> 지도 제작과 전사의 원리

리좀은 본뜸(tracing)이 아니라 지도(map)이다. 어떤 그림 위에 반투명 용지(tracing paper)를 얹고 그 그림을 그대로 본뜨는 것에서 보는 것처럼, 본뜸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예전의 것을 재현하고, 이미 완성된 채로 주어진 어떤 선을 따르는 것이다. 그에 반해 지도는 스스로의 내부에 갇혀 있는 무의식을 복제(reproduce)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성해 낸다. 지도를 본뜸과 구별해주는 것은, 지도는 전적으로 실재와의 접촉 실험에로 향해 있다는 점이다. 구조적 모델이나 생성 모델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발생 축'이나 '심층구조'와 같은 관념들이 이러한 본뜸의 원리에 기반하고 있다. 본뜸이 능력(competence)의 문제인데 반해 지도는 수행(performance)의 문제이다. 지도를 갖고 길을 찾아가는 경우를 상상해 보라. 우리는 지도를 찢어서 다닐 수도 있고, 거꾸로 뒤집어서 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자기에게 필요한 새로운 정보나 기호를 그 위에 덧붙여 기록해 넣을 수도 있다. 여기서 지도는 실제 세계와 계속해서 맞닿는다. 지도는 그 자체가 리좀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다양한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이 리좀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이다. 지도는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와 맞닿아 있다. 지도는 벽에 그려질 수도 있고, 예술 작품처럼 구상될 수도 있고, 정치적 행동이나 명상의 일환으로 구성될 수도 있다.

"본뜸은 지도를 하나의 이미지로 번역해 버린다. 본뜸은 리좀을 뿌리나 곁뿌리로 변형시킨다. 본뜸은 자신의 의미화와 주체화의 축을 따라 다양체들을 조직하고, 고정시키고, 중성화한다. ..... 리좀이 틀어 막히고 나무처럼 되면, 모든 것은 끝이고, 더 이상 어떠한 욕망도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욕망은 언제나 리좀에 의해서만 꿈틀거리고 생겨나기 때문이다. 욕망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면, 내적 반향에 의해 욕망은 넘어지고 결국 죽음에 이른다. 반면에 리좀은 외적이고 생산적인 성장에 의해서 욕망에 따라 활동한다."(14)

하이퍼텍스트는 쫓아 가야할 하나의 경로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여기에는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여행의 의미가 강조된다. 하이퍼텍스트는 하나의 공간이다. 그것은 세계를 모사한다거나 어떤 정리된 정보를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하이퍼텍스트는 실세계와 맞닿아 있는 하나의 가상 공간(cyberspace)이다. 이 공간은 실세계와 다양한 방식으로 맞닿아 있다. 쇼핑을 위해, 정보를 찾기 위해, 친구를 만나기 위해, 잠시 지루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실세계와 하이퍼텍스트의 가상 공간은 서로 맞닿는다. 실세계와 가상 세계는 하나의 리좀을 형성한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복제하거나 또는 다른 하나의 의미가 되지 않는다. 하나의 평면에서 말벌과 서양란이 맞닿은 것처럼, 그 둘은 다양한 입구에서 서로 맞닿은 채로 펼쳐진 하나의 리좀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이퍼텍스트는 여러 특성에서 리좀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하이퍼텍스트의 힘은 그것이 지니는 유연성과 다양성, 즉 전통적인 도구나 구조를 통합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부터 온다. 리좀처럼 하이퍼텍스트도 어떤 정해진 형태가 없으며, 이것은 우리를 위축시킨다.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위계적 체계들은 경계가 분명하다. 그 체계들은 권력의 중심이다. 위계에 대한 앎은 권위를 낳고, 부패한 권위는 폭정을 기른다. 하나의 전체로서의 리좀에 대한 앎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전체'란 그리고 다른 어떤 절대적인 것도 리좀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리좀은 리좀에 접근하는 개인들만큼 개인적이다. 그것은 개인의 지각이요, 개인의 지도이며, 개인의 이해이다. 그것은 또한 동시에 또 다른 개인의 지각이요, 지도요, 이해이다. 그것은 공통의 이해를 위한 어떤 구조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의 한 상태요, 전체가 고원들로 이루어진 어떤 영역 속에 있는 하나의 고원이다.(20)

"고원은 시작이나 끝이 아니라 언제나 중간에 있다. 리좀은 고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은 특별한 어떤 것, 즉 어떤 정점이나 외적인 목적을 향하기를 피하면서 전개되는, 연속적이며, 스스로 진동하는, 응축된 것들(intensities)의 어떤 영역을 지시하기 위해서 "고원"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21-22)

6. 하이퍼텍스트와 포스트모더니즘

위에서 우리는 하이퍼텍스트와 포스트모더니즘의 구조적 유사성을 리좀 개념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제 이 장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대변하는 주된 입장들이 하이퍼텍스트에서 어떻게 이야기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존슨-에이올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21)

  1. "웅대한 이야기"(대서사(大敍事), grand narratives)에 대한 믿음의 상실
  2. 토대주의(foundationalism)의 포기
  3. 하나로 고정되어 있던 자기 신분(identity)의 파편화

1) "웅대한 이야기"에 대한 믿음의 상실

웅대한 이야기란 우리를 순수하고 순결하게 만들어 줄 어떤 분명한 운명을 향해 인류가 진보해나가고 있다고 하는 믿음을 말한다. 웅대한 이야기는 중앙의 큰 몸통으로부터 밖으로 퍼져나가면서 점차 가늘어져 잔가지에 이르는 통일된 위계 속에 모든 구성 요소들 각각의 위치를 부여한다. 여기서 각각의 구성 요소들은 자기보다 상위의 것에 의해 그 의미를 획득한다. 모든 구성 요소들은 미래에 실현될 것이든, 과거의 것이 거짓에 가려져 있는 것이든 간에 지금 완성되지 않고 있는 어떤 중심을 향해 운동한다.

하지만 "옛날 옛적에"라고 시작하는 할머니의 이야기는 이제 사라진지 오래이다. 오늘날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는 하루를 마치면서 나누는 작은 이야기들 밖에 없다. 데리다가 비판하는 것처럼, 음성, 즉, 우리를 안내해주는 내면의 음성은 없다. 언어란 무엇을 들려주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 어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은 나무가 어떤 정령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만큼이나 의인화된 사고 방식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언어를 언어 '위'의 어떤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살펴보아야 한다. 언어 역시 기계(machine)인 것이다. 언어는 단어들을 부품으로 해서 돌아가는 하나의 기계이다.

기계로서의 언어란 무엇인가? 거기서 문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랜도우는 프랑스 정치인 미라보(Mirabeau)의 정치적 연설에 대한 클라이스트(Heinlich von Kleist)의 해석에 반기를 든 밀러(J. Hillis Miller)의 해석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클라이스트가 말하길, 어떻게 문장을 끝맺을지 생각도 않은 채" 연설자는 "구문론적으로 완결되지 않은 문장 한 조각을" 내뱉었다. "[그리고] 생각이 점차 '완성되어졌다'(fabricated); 그리고 클라이스트는 연설자의 느낌과 일반적인 상황이 어떤 방식으로 그가 그러한 주장을 하게끔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와는 달리 밀러는, 바르트처럼, 미라보의 혁명적인 "생각은" 클라이스트의 주장처럼, "상황이나 연설자의 느낌에 의해서 그렇게 완성되어진 것이 아니라, 그가 무작정 시작했던 문장의 문법과 구문을 완성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22)

여기서 우리는 언어라는 기계를 돌리는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본다. 언어는 의미나 주체의 의지에 의해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기계 자체의 메카니즘에 의해 돌아간다. 수직적 사고가 수평적 사고로 전환된다. 이러한 상황을 푸꼬는 '역사'에서 '공간'으로의 이동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19세기를 짓눌렀던 거대한 망상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역사였다. .... 19세기는 자신의 본질적인 신화적 원천을 열역학 제2법칙에서 찾았다. 지금 이 시대는 아마도 무엇보다도 공간의 시대가 될 것이다. 우리는 동시성(simultaneity)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병렬(juxtaposition)의 시대, 가깝고 먼 것의 시대, 나란한 것의 시대, 흩어진 것의 시대 속에 있다."(23)

하이퍼텍스트를 이루는 마디들은 동시적으로 그리고 나란히 존재한다. 거기에는 그것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어떤 경계도 없다. 여기서는 구성 요소들을 하나의 "단일한" 텍스트로 묶어주는 관습적인 접착제가 해체된다. 각각의 마디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또한 모든 곳에 속한다. 하나의 하이퍼 문서에 있는 "텍스트는 구성 요소들(렉시아(lexia) 또는 텍스트의 벽돌들)로 쪼개지고 조각나고 원자화되어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읽기의 단위들은 이들이 보다 더 자기 충족적이 되고, 선형적 계열에서 앞뒤에 오는 것에 덜 의존적이 됨에 따라 자기 자신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24) 이 각각의 마디들은 어디에도 자신의 생명을 구걸하지 않는다. 이 마디는 사방으로 펼쳐지는 길목으로서 다른 마디들과 나란히 서서 함께 공명한다.

2) 토대주의의 포기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는 토대를 찾고 만들고자 하는 노력, 즉 중심의 역사이다. 불확실한 미래와 끊임없는 선택을 강요받는 우리에게 우리가 믿고 따를 굳건한 토대가 주어진다는 것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다. 이 토대를 중심으로 우리는 좋은 것과 나쁜 것,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쉽게 구분하고, 쉽게 판단을 내린다. 중심은 서양 사상사에서 기원, 목적, 아르케(arche), 텔로스(telos), 이념 등의 이름으로 등장해 왔다. 중심은 유기적 균형과 일관된 방향을 제공함으로써 구조를 만들어내는 구조의 기원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중심은 자신이 만든 구조의 논리가 통용되는 지점 너머에 있다. 중심은 구조를 폐쇄하거나 봉합하는 지점이며, 구조를 지배하면서도 구조성을 피해 가는 어떤 것이다. 중심은 역설적으로 구조 '안'에 있으면서, 구조 '밖'에 있다. 그러므로 오히려 문제는 바로 이러한 중심의 역설적 성격을 해명하는 일이다. 그것은 곧 중심이 구조의 기원이 아니라 단지 구조의 일부일 뿐이며, 중심이 다른 무엇, 즉 근원적 구조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중심은 현전적 존재자의 형태로 사유될 수 없다는 것, 중심은 자연적 장소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 중심은 고정된 장소라기보다 어떤 기능이며 기호의 대체가 무한히 일어나는 일종의 비장소라는 것"(25)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중심 해체, 중심 부재의 의미를 새기는 일이다 중심이 부재한다는 것은 중심으로 간주될 수 있는 어떤 곳에서도 여전히 어떤 교환과 대체의 유희, 변형과 이동의 운동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한다. 중심이 없다는 것은 중심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구조가 성립하기 위해서 설정해야 하는 중심을 규정하거나 고정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중심과 기원이 물러가 버린 자리, 즉 최종적 기의가 사라진 자리는 기표를 유인하지만 기표는 임시적으로만 거기에 머무를 수 있다. 따라서 대리적 보충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그런 가운데 기호는 무한히 증식해 간다. 폐쇄적 구조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이 기호의 증식, 이 의미 작용의 증산은 상징적 사유의 조건이다.(26)

하이퍼텍스트는 "본문"(primary text)이라는 생각을 흐릿하게 만든다. 하이퍼텍스트에서는 본문이 바로 접근이 가능한 각주, 참고 문헌, 비평, 부록들의 거미줄 속에 함께 존재한다. 본문은 훨씬 더 크고 복잡한 참고자료의 네트웍을 탐험해 나가기 위한 하나의 출입구일 뿐이다. 하이퍼텍스트의 모든 마디들은 "평준화"된다. 어떤 것도 다른 것보다도 더 우선적이거나 중요하거나 중심적이지 않다. 또 다른 것들과 예측 불허의 상황으로 이어지는 조각이나 단편들의 무한한 브리꼴라즈(bricolage).(27)

"하이퍼텍스트는 어떤 중심도 없다.... 이는 즉, 하이퍼텍스트를 사용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관심을, 그 순간에 항해를 하기 위한 사실상의 조직원리(즉 중심)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이퍼텍스트를 무한히 탈중심화와 재중심화할 수 있는 체계로 경험한다."(28)

이 중심 없는 구조의 무한한 증식을 우리는 월드와이드웹에서 본다. 중심을 채우고, 중심을 차지하고, 스스로 중심이 되려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참여로 웹은 무한히 증식하고 있다. 그렇지만 빈자리는 아직도 도처에 널려 있다. 그 빈자리는 모두가 기존의 중심을 위축시키고 중심의 자리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만큼 또한 주변으로 전락할 잠재력도 가지고 있다.

3) 하나로 고정되어 있던 자기 신분의 파편화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노예나 주인이나 왕일 수 없다. 이들은 자신의 신분을 평생 운명으로 지니고 살았지만, 지금의 우리는 다중적으로 구성된다. 학자이면서, 좌익운동가이며, 자본주의자이며, 중상류층이며, X세대이며, 보수주의자이며, 아버지이며, 남편이며, 선생이다. 우리의 정체는 다른 이들의 정체가 변화하는 맥락에 맞추어 역동적으로 구성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현대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을 연결시키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각각의 신분이 고정된 이러한 세계는 객관화된 점의 세계이다. 여기에는 실체의 법칙이 적용된다. 이 곳은 엔지니어의 데카르트적 공간 또는 경찰관이 순찰하는 도시의 격자식 구역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를 줄그어진 공간(striated space)이라고 부른다. 줄그어진 공간은 모든 것이 낱낱이 명시됨으로써만 존재하는, 틀에 박힌 영역이며, 순서와 인과의 영역이다.

"현상학적으로 이는 좌표의 눈금이나 다른 어떤 기하학적 구조에 의해 각각의 개체가 처리되는 지각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사회적으로는, 줄그어진 공간은 위계적인, 그리고 엄격한 규칙의 문화로 나타난다. 군대, 기업, 대학 같은 것이 그 예이다. 맥루한이 지적했듯이 이러한 문화에서의 지배적인 커뮤니케이션 매체, 즉 인쇄물은 객관화되고 파편화된 지식관을 양성한다. 줄그어진 공간은 책에 의해 규정되고 지지된다. 이 공간의 점유자는 질서와 목적과 통치에서 이긴자들이며, 로고스와 법률의 옹호자이다."(29)

들뢰즈와 가타리가 꿈꾸는 새로운 문화는 이러한 로고스로부터가 아니라 노모스(nomos), 즉 장소(places)나 상황(occasions)을 가리키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이와 공명하는 여러 다른 개념들, 즉 유목주의(nomadism), 탈영토화, 달아나는 선(lines of flight), 전쟁기계(war machines), 리좀 등은 적극적인 가로지름(traversal)이나 맞부딪침(encounter)에 의해 정의되는 사회질서에 의해 생성된다. 이러한 질서에 대한 비유로 우리는 항해자의 바다, 유목민의 사막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공간을 그들은 매끄러운 공간(smooth space)이라 부른다.

"매끄러운 공간에서는 반대로 "점들은 彈道(trajectory)에 종속된다."(들뢰즈와 가타리, 478) 매끄러운 공간은 본질이 아니라 변형에 의해 역동적으로 규정된다. 따라서 어떤 것의 순간적인 위치는 그것의 계속적인 움직임 또는 달아나는 선에 비해 덜 중요하다. 이 공간은 정의상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위한 구조이다. 매끄러운 사회적 구조는 임시방편(ad hoc), 인민당원의 정치적 운동, 협동조합, ..... 하부문화, 열성 팬들, 언더그라운드 등을 포함하고 있다. 매끄러운 사회는 발명과 기업가 정신, 합의를 통한 의사결정을 선호하고 명령, 전체주의적이고 평행선적 인식을 반대한다"(30)

하이퍼텍스트에서는 모든 정보점(information point)들은 하나의 고립된 "사실"이 아니라 다중으로 횡단 가능한 정보의 선들 가운데 있는 하나의 "마디"로 보여져야 한다. "이를 관계적으로 생각해보면 예를 들면 1492년은 더 이상 단순히 "콜럼부스의 미국 발견"으로 읽혀서는 안된다. 그것은 또한 "유태인의 스페인 추방", "미켈란젤로의 초창기 조각 중의 하나인 '켄타우르스의 전쟁' 완성", 그 외 중요한 것에서 사소한 것에 이르는 많은 사건들로 읽혀져야 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신선한 느낌을 주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경이감을 불러일으킨다. 미국의 콜럼부스가 1492년에서 스페인의 유태인이나 미켈란젤로의 켄타우르스 보다 더 "중심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콜럼부스는 미국을 "발견"했는가 "침략"했는가? 왜 1493년이 아니고 1492년인가? 왜 모두가 여기는 서양에서 일어난 사건들뿐인가? 누가 이런 결정을 했는가?"(31)

웹을 돌아다니는 것을 우리는 항해한다(navigate)한다고 말하며, 웹을 '정보의 바다'라고 이야기한다. 이 바다 또는 사막을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매끄러운 공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바닷길이나 사막 길을 상상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다. 배가 다니는 바닷길이나 낙타가 다니는 사막의 길은 금새 지워진다. 잠시 배가 지나가면서 길이 생겼다가 다시 수평의 평평한 바다로 되돌아온다. 사막 길도 마찬가지이다. 낙타가 지나간 발자국은 곧바로 모래 바람에 덮히고 쓸려 사라진다. 이음으로 사방으로 연결된 하이퍼텍스트의 마디들도 마찬가지이다. 거기에는 어떤 족적도 남지 않는다. 수많은 발자국이 그 위를 지나갔어도 언제나 새로운 경로를 기다리며 그 자리에 있다.

7. 비판적 고찰

우리는 하이퍼텍스트의 특성 중 하나로 비선형성을 들었는데 이점은 유념해서 볼 필요가 있다. 하이퍼텍스트의 전체 구조는 비선형적일지 모르지만 이를 통과하는 모든 개별적인 경로는 물론 선형적이다. 독자는 여전히 순서를 따라, 다시 말해 하나씩 하나씩 일직선을 따라 각각의 항목을 읽거나 보거나 듣는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하이퍼텍스트를 하이퍼텍스트로 만드는 것은 비선형성이 아니라 '선택'이다. 즉 이용 가능한 정보들을 통과하는 몇몇 또는 많은 경로들 중의 어느 것이 그 때에 맞는 선택인지를 결정하기 위한 독자의 반응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하이퍼텍스트는 우리의 실생활과 매우 닮았다. 나는 나의 매일의 생활을 순간 순간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지는 어떤 경로 위에서 꾸려나간다. 이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여러 종류의 상품들이 진열된 구멍가게에 있다고 상상해 보라. 거기에는 온갖 종류의 과자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 중에서 당신은 어떤 종류의 과자를, 그리고 어느 회사의 제품을 사야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하이퍼텍스트의 독자들도 비슷한 선택을 한다. 텍스트의 어떤 지점에서 독자에게 선택지가 주어진다. '다음에는 무엇을 읽으시겠습니까?'는 하이퍼텍스트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묻는 질문이다.

물론 다른 독자들은 이 반복되는 질문에 다른 방식으로 대답을 할 것이고, 각각은 각기 나름의 경로를 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이퍼텍스트를 비선형적이라고 부를 때의 그 의미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와 같은 텍스트를 읽는 어떤 하나의 선형적인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 '다음에는 무엇을 읽으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독자가 내리는 각자의 결정에 따라 자료들을 관통하여 짜여지는 '거미줄들'(webs)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하이퍼텍스트적 상황과 실생활과의 일치는 우리에게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함께 비춰준다. 언어의 기본 목적은 무질서하게 병렬적으로 주어진 주변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다. 거기에 어떤 선을 주고, 질서를 주기 위해서 언어의 개념들이 만들어졌다. 선택이 요구되는 상황은 이미 일상에서 충분히 주어져 있고, 우리는 그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속에 놓여 있다. 언어 및 언어로 표현되는 각종 학문적 성과들은 그러한 선택의 폭을 최대한 줄여보자는 노력의 산물이다. 학문과 과학적인 성과들을 통해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어떤 선택이 효율적인 선택인지를 미리 배운다. 선택을 위한 우리의 고민은 좀더 이제까지의 성과를 기반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간 것에로 할애되어야 한다.

그런데 하이퍼텍스트는 무작정 우리를 다시 선택의 상황으로 내몬다. 우리는 어느 회사의 어떤 아이스크림이 맛이 좋다는 것을 이미 책이나 신문 등 다른 경로를 통해서 알고 있고 그래서 나는 가게에서 그것을 선택한다. 그렇다면 하이퍼텍스트적 상황에서는 나는 무엇을 지침으로 삼아서 여러 갈래의 경로들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가? 이를 위해 메타-하이퍼텍스트적 지침이 다시 필요하게 되는 것인가? 버블즈(Burbules)와 칼리스터(Callister, Jr.)는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은 역설로 표현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 하나의 역설을 보기 시작한다: 만약 하이퍼텍스트가 이어지는 다른 점들로 마디들의 다중의 이음을 가능하게 한다면, 그것들은 또한 각각의 마디들을 단편화하고, 맥락에서 벗어나게 하고, 본래의 이야기나 일련의 논증에서 차지하고 있던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측면으로" 이어놓기(association)가 어떤 맥락에서는 본래의 "선형적인" 것보다 더 유용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하나에 "특권"을 부여함이 없이 이어놓은 모든 것을 평준화하는 것은 이어놓은 모든 것들을 임의적인(arbitrary) 것으로 보이게 할 수도 있다. - 그러나 예를 들면 정보 "마디들"을 연결시키는 여러 방법들 중의 하나인, 역사적 순서나 문학의 어떤 이야기 선 또는 논리적 설명 등에 "특권을 부여"하게 되면 그러한 연결은 임의적이지 않다. (비록 똑같은 정보를 조직화하는 다른 방법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비록 잠정적인 것이라고 할 지라도, 그러한 시작점이 없다면, 리좀 체계를 탐색하는 것은 단순히 무정부적인 어떤 것에 그쳐버릴 수도 있다 - 최첨단의 문학 해석을 위한 멋있는 그림일 수는 있겠지만 초보 학습자에서는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기존의 이야기들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과 그를 대신할 읽기를 제안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하지만 중심 없는 읽기가 왜 읽기가 아닌지를 설명해 주는 것 역시 이러한 것들을 장려하는 바로 그 구성주의자의 이론이다."(32)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무엇엔가 "특권"을 부여하려는 그러한 지침에의 강박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선택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할 것이다. 자기에 지침을 주는 어떤 음성을 기대하고, 그러한 음성을 하이퍼텍스트에서 찾고자 하는 것 그것 자체가 편협한 사고라는 것이다. 책이 세상의 지침이 되듯이 하이퍼텍스트도 실세계의 지침이 될 것이라는 수직적 사고 자체를 뒤집어야 한다. 책이 세상의 이미지로서 세상과 수직의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하이퍼텍스트 역시 실세계와 수직의 다른 차원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수평의 차원에 인접해 있는 다른 공간이다. 책, 신문, 방송, 학교, 하이퍼텍스트 어느 것도 중심에 또는 다른 것보다 더 높은 곳에 있지 않다. 이들은 모두 수평의 판 위에서 자기의 일부를 떼어주고 다른 것의 일부를 이양 받는 공유 결합의 방식으로 다양하게 결합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수평적 하이퍼텍스트 이해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의미는 의심스러운 개념이므로 다시 묻자. 그것은 어떤 효용이 있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생산적인 결과를 가져다주는가?

흥미롭게도 우리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에서 포스트모던적 하이퍼텍스트 이해 및 그 활용이 가져온 효용성의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제랄드 M. 와인버그의 "자아를 내세우지 않는 프로그래밍"이 그 예이다.(33)

야구 선수가 야구공을 치는 경우, 도끼로 장작을 패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체험해 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여기서 필요한 것은 팔에 힘을 빼는 것이다. 팔에 어떤 의지가 개입하게 되면 그때에는 십중팔구 헛치거나 중간이 아닌 귀퉁이 부분을 치게 마련이다. 그렇게 본다면 제대로 된 행위, 이를 합리적 행위라고 한다면, 합리성은 자아를 소멸시키는 것에서 이루어진다. 합리성은 개인의 차원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은 오히려 불합리의 덩어리이다. 의지와 욕망에 의해 촉발되지 않는 행위란 없으며, 비록 그 행위가 합리적 계산이나 판단에 의해 조절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불합리에 뿌리를 둔 행위이다. 따라서 합리성을 한 개인에서, 그 개인의 수양이나 자기 반성에서 확보하려는 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의미 중심주의, 이야기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해 배제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 편협한 자아에 기반한 합리성(궁극적으로는 비합리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의 극단에는 어떤 종류의 합리성, 전체적 차원의 합리성조차도 없다는 주장도 있을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의도하는 바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극단적인 주장으로까지 나아간다면, 무엇 무엇을 해야 한다는 모든 종류의 당위성, 심지어는 '우리가 지금까지 고수해온 합리성을 포기해야 한다'라는 당위도 주장할 근거가 없어진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무책이 상책이다'라는 말이 얼핏 보면 어떤 긍정적 주장도 하지 않는 순수 부정인 듯이 보이지만 여기에도 어느 것이 더 좋은 것인지에 대한 나름의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즉 나름의 바람직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어떤 모종의 합리성을 상정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여기서 헤겔의 '이성의 간계'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성이란 헤겔에게는 한 개인의 사유 능력을 초월해 있는 것이다. 물론 헤겔에게는 한 개인이 자기 발전을 통해 이 자기를 초월해 있는 이성과 합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으며 또한 그것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합일의 가능성을 배제한 이성을 생각한다면 그의 '이성의 간계'란 개념은 여러모로 쓸모가 있는 개념인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이성은 물론 합리성의 화신이다. 헤겔은 합리성이란 것이 개인의 의식이나 사유의 차원에서 확보되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개개인의 행동은 너무도 불합리하고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일어나고 또 전개된다. 이들의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도대체 신이 있음을 의심할 정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들이 총체적으로 모여 나아가는 방향은 어떤 목표를 향해 있다. 이것이 헤겔이 말하는 이성의 간계가 아닌가. 이성은 개개인의 불합리를 통해서 자신의 합리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합리성에서는 명령과 순종이 아니라 이해와 공동협력이 중요시된다. 명령과 그에 따른 순종은 말하자면 한 개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순결하고 완벽한 합리성을 상정하고 이로부터 합리성이 구현된다는 생각을 기반에 두고 있다. 이에 반해 이해와 공동협력에서는 합리성이란 한 개인의 손을 떠나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합리성이란 개인이 아니라 다수 속에 존재한다.

하이퍼텍스트는 이러한 다수의 힘을 극적으로 발현시킬 수 있는 구조를 지녔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교육 현장에서, 또 사업장에서 협력(collaboration)의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하이퍼텍스트가 다방면에서 응용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서버 컴퓨터의 운영체제 프로그램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리눅스는 그러한 응용이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리눅스는 재능을 끌어올 풀(pool)로 전세계를 사용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또 성공적으로 노력한 최초의 프로젝트였다. 나는 리눅스의 태동기가 월드와이드웹의 탄생과 일치하는 것을, 그리고 리눅스가 유아기를 벗어나던 1993-1994년경에 ISP(Internet Service Provider) 산업과 인터넷에 주류의 관심이 폭발하기 시작했던 것을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리누스(Linus Torvalds)는 급속히 보급되는 인터넷을 가능하게 했던 그 규칙에 따라 어떻게 일을 진행해야 하는지 알았던 최초의 사람이다."(34)

'페치메일'(Fetchmail)이란 전자우편 프로그램의 주 프로그래머이며, 근래에는 소스 코드 공개 운동(Open Source Code Movement)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인물로서도 이름이 높은 에릭 레이먼드는 성당과 시장(The Cathedral and the Bazaar) 또는 성당과 아고라의 비유를 통해 프로그래밍의 두 가지 대조적인 방법을 소개하면서 어느 쪽이 더 효율적인지에 대한 실험을 현재 진행중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당 모델은 상업용 소프트웨어가 개발되는 과정을 기술하는 모델이고, 시장 모델은 앞에서 말한 리눅스 프로그램이 개발되는 과정을 기술하는 모델이다. 그는 이 두 가지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가장 중요한 소프트웨어(운영체제나 Emacs 같이 대단히 커다란 도구들)는 성당을 건축하듯이, 즉 찬란한 고독 속에서 일하는 몇 명의 도사 프로그래머나 작은 그룹의 뛰어난 프로그래머들에 의해 조심스럽게 만들어지고 베타버전도 필요 없이 발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리누스 토발즈의 개발 스타일, 즉 일찍, 그리고 자주 발표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위임하고, 뒤범벅이 된 부분까지 공개하는 그런 스타일은 나에게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고요하고 신성한 성당의 건축방식은 여기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리눅스 공동체는 서로 다른 의견과 접근방법이 난무하는 매우 소란스러운 시장 같았다. (리눅스 아카이브 사이트가 이것을 적절히 상징하고 있다. 이곳에는 누구나 파일을 올릴 수 있다) 이런 시장바닥에서 조리 있고 안정적인 시스템이 나온다는 것은 연속된 기적으로만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35)

이와 같이 성당 모델은 몇 사람의 탁월한 프로그래머(개인적 합리성의 화신)들이 다른 여타의 외부적 요소들에 방해됨이 없이 오직 자신의 두뇌에 의존하여 프로그램을 개발해 내는 방식인데 반해, 시장 모델은 가능한 한 빨리 각 개인이 이룬 조그만 성과들을 다름 사람들과 공유시킴으로써 더 새롭고 훌륭한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방식이다. 레이먼드는 공개 소스 프로그램인 리눅스가 이런 방식으로 성공적으로 개발되었음을 알고는 이 방식을 자신의 페치메일을 개발하는데 적용하여 또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이야기면서, 이 실험이 다시 한번 마이크로소프트와 넷스케이프사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인터넷 익스플로러(Internet Explorer)에 대항하여 넷스케이프가 인터넷 브라우저인 커뮤니케이터(Communicator)의 소스를 공개함으로써 성당 모델과 시장 모델의 대결 구도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커뮤니케이터의 향방은 단순히 넷스케이프라는 한 회사의 성공과 실패로 끝나지 않고, 닫힌 소스 코드(closed source code)와 열린 소스 코드(open source code) 중 어느 시스템이 더 효율적이냐를 보여주는 하나의 지침이 되며 더 나아가서는 위계 구조와 네트웍 구조 중 어느 것이 바람직하냐를 판단하는 지침, 더 나아가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이 과연 현실적으로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어떤 것이냐를 판단하는 지침이 된다 할 것이다. 우리는 그 결과를 신중히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8. 맺는 말

이제 처음에 물었던 질문에 대답을 할 시간인 것 같다. 과연 하이퍼텍스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념을 실현하는 현실적인 도구인가? 답은 '예'이면서 또한 '아니오'이다.

예이다. 우리는 앞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이야기하는 리좀적 이해가 하이퍼텍스트에서 얼마나 많이 관철되는지를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하이퍼텍스트는 단선적 구조 그리고 그러한 구조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관계를 해체하고, 독자에게 많은 권력을 이양하며, 경계가 모호하며, 유연하고, 포용적이다. 하이퍼텍스트는 그 무엇보다도 현실에 가까이 서 있다. 하이퍼텍스트는 정보이면서 공간이다. 메타(meta)로서 기능하기를 즐기는 책과는 달리 하이퍼텍스트는 독자를 끌고 들어와 사방으로 길을 열어 보인다. 하이퍼텍스트는 저자에게서 자신이 '위'에 서있다는 오만함을 제거한다. 독자와 저자를 수평의 공간에 함께 펼쳐 놓는다.

하지만 또한 아니오이다. 하이퍼텍스트와 리좀의 유사성은 하이퍼텍스트의 포스트모던적 가능성을 열어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다. 하이퍼텍스트 그 자체는 비선형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매순간 각기 다른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현실 세계에서도 '웅대한 이야기'와 같은 선형적 질서가 만들어져 온 것처럼, 하이퍼텍스트 역시 그러한 선형적 질서의 뿌리칠 수 없는 욕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선형성은 인간이 일방적으로 흐르는 시간 질서의 지배하에 있는 이상 언제나 우리를 따라다닌다. 비록 우리의 사고 구조가 비선형적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시간의 계열 위에서 표현할 수밖에 없고, 또 그것을 시간의 계열 위에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문제는 시간 계열 속에 있으면서 그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선형성의 욕구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느냐에 따라 포스트모더니즘의 꿈은 다만 꿈으로 그치거나 또는 살아있는 현실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기타 관련 문헌

 


관련 사이트

 


하이퍼텍스트의 세 가지 황금율

각각의 정보는 각 정보의 성격에 따라 그에 맞는 형식과 구조가 있다. 따라서 모든 정보를 그 성격에 상관없이 하나의 구조 속에 몰아 넣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 할 수 있다. 베보 화이트(Bebo White)는 정보가 가지는 두 가지 능력인 표현력과 체계적 정리의 능력을 두 축으로 해서 정보의 네 가지 기본 조직 구조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1)

위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순차(sequence) 구조는 표현력은 낮은 대신 정리하는 능력이 강한 반면, 하이퍼텍스트가 표방하는 웹(web) 구조는 표현력은 높지만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보여주는 능력은 약하다. 각각의 정보는 그 특성에 따라서 그에 맞는 구조와 표현 양식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정보가 작거나 또는 모두가 한 덩어리이거나 사용자가 그 정보 모두를 한번에 봐야할 경우라면 그것은 전체가 한꺼번에 보여져야 할 것이다. 또 전화번호부의 전화번호들처럼 정보의 여러 부분들이 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다면, 하이퍼텍스트보다는 데이터베이스가 더 적합할 것이다. 백과사전, 박물관 전시물들, 어떤 과정에 대한 체크리스트들, 온라인 도움말 등은 하이퍼텍스트적 구조에 적합한 정보들이다. 벤 슈나이더만(Ben Shneiderman)은 하이퍼텍스트에 적합한 정보가 어떤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다음의 세 가지 하이퍼텍스트 황금율을 제안했다.

  1. 큰 덩치의 정보가 많은 수의 조각들로 짜여져 있다.
  2. 그 조각들은 서로 서로 관련되어 있다.
  3. 사용자는 언제나 조그만 부분만을 필요로 한다.2)

하이퍼텍스트에 맞지 않는 정보를 선택하기도 쉽지만, 선택된 정보를 하이퍼텍스트에 맞지 않게 잘못 디자인하기는 더 쉽다. 그렇게 되면 독자는 고공의 지식 공간을 비행하는 스릴을 맛보는 것이 아니라 하이퍼 공간에서 길을 잃는 하이퍼카오스를 맛보게 될 것이다.

-----------------------------

1) Bebo White, Web Document Engineering, (http://www5conf.inria.fr/fich_html/slides/tutorials/T14/WWW6.html)

2) Ben Shneiderman, "Reflections on authoring, editing, and managing hypertext", in Barrett, E. (ed.) The Society of Text(Cambridge, MA:MIT Press, 1989), 115-131.

 


1) Marshall McLuhan, Understanding Media : The Extensions of Man(MIT Press, 1994), 15

2) Gunnar Listl, "Wittgenstein, Genette, and the Reader's Narrative in Hypertext", in Hyper/Text/Theory, George P. Landow (ed.)(Baltimore:The Johns Hopkins Univ. Press, 1994), 118

3) 텔레마틱스(Telematics)는 프랑스에서 1970년대에 주조된 télématique에서 유래한 말로 이말은 télécommunication과 informatique를 결합한 것이다. 이는 곧 컴퓨터와 텔레커뮤니케이션이 결합되어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접근이 가능한 통합적인 정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4) Heiko Idensen, "From hypertext utopias to cooperative net-projects"(http://www.desk.nl/~nettime/zkp/hypertxt.txt), 'Media Myth'(웹에 실린 문서는 페이지가 없으므로 장의 제목에 해당되는 것을 표시함)

5) 네트웍을 둘러싼 신화는 다음의 두 가지 방향에서 생산되고 있는데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두 번째에 해당되는 것이다.

  1. 낙관적 기술론자 : 디지털 정보와 네트웍의 결합은 언제 어디서나 정보와 서비스에 접근할 있고 의사 소통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인류가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도록 해준다.
  2. 포스트모더니스트 : 지금까지와는 다른 정보처리 방식인 하이퍼텍스트적 정보 구조는 지금까지 서양의 사유를 지배해 온 이성적 억압의 질서를 해체시키고 새로운 문명의 꿈을 꿀 수 있는 실질적인 장치를 제공해주고 있다.

6) Robert Coover, "The End of Books", New York Times Book Review(June 21, 1992), 23

7) Mark Poster, The Mode of Information(Chicago: Univ. of Chicago Press, 1990), 6

8) Kathleen Burnett, "Toward a Theory of Hypertextual Design"(http://ebbs.english.vt.edu/hthl2/pards/wise/burnett.html), [4-10](웹에서는 페이지가 매겨지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는 28개의 섹션을 나누고 번호를 매겨놓았음.), Postmodern Culture V.3 n.2(Jan, 1993)에도 실려 있음.

9) Vannevar Bush, "As we may think", Endless Horizons(Washington, D.C.:Public Affairs Press, 1946), 32. 이 논문이 처음 발표된 곳은 Atlantic Monthly 176(July, 1945)이다.(http://www.ps.uni-sb.de/~duchier/pub/vbush/vbush-all.shtml에도 실려 있음)

10) Theodor H. Nelson, Literary Machines(Swarthmore, Pa.:self-published, 1981), 0/2 (각 장 또는 절별로 페이지가 다시 시작하기 때문에 이렇게 표기함. 0/2=서문 2 페이지)

11) 이와 관련된 아래의 논의는 George P. Landow, Hypertext : The Convergence of Contemporary Critical Theory and Technology(Baltimore:The Johns Hopkins Univ. Press, 1992), 2-34를 정리한 것임.

12) Roland Barthes, S/Z, trans. Richard Miller(New York: Hill and Wang, 1974), 5-6

13) 앞의 책, 4

14) Nicole Yankelovich, Norman Meyrowitz, and Andries van Dam, "Reading and Writing the Electronic Book," IEEE Computer 18(October 1985): 18.

15) Michel Foucault. The Archeology of Knowledge and the Discourse on Language. trans. A. M. Sheridan Smith(New York: Harper & Row, 1976), 23

16) Gregory L. Ulmer, Applied Grammatology : Post(e)-Pedagogy from Jacques Derrida to Joseph Beuys(Baltimore: Johns Hopkins Univ. Press, 1985), 58

17) Jacques Derrida, Speech and Phenomena and Other Essays on Husserl's Theory of Signs, trans. David B. Allison(Evanston, Ill.:Northwestern Univ. Press, 1973), 131

18) Gilles Deleuze and Flix Guattari, A Thousand Plateaus : Capitalism & Schizophrenia, trans. Brian Massumi(Minneapolis: Univ. of Minnesota Press, 1987). 이후 계속 나오는 본문의 괄호 안의 숫자는 이 책의 페이지를 나타내는 것임.

19) 이음의 특성과 종류에 관해서는 Nicholas C. Burbules, "Rhetorics of the Web : Hyperreading and Critical Literacy"(http://www.ed.uiuc.edu/facstaff/burbules/ncb/papers/rhetorics.html) 'What is a link?' 참조.

20) Kathleen Burnett, "Toward a Theory of Hypertextual Design"(http://ebbs.english.vt.edu/hthl2/pards/wise/burnett.html), [28]

21) Johndan Johnson-Eilola, "Stories and Maps : Postmodernism and Professional Communication"(http://english.ttu.edu/kairos/archives/1.1/johndan/stories_and_maps_029.html), 'Articulating a Postmodern Theory of Professional Communication'

22) George P. Landow, Hypertext : The Convergence of Contemporary Critical Theory and Technology(Baltimore:The Johns Hopkins Univ. Press, 1992), 116-7

23) Michel Foucault, "Of Other Spaces", Diacritics, trans. Jay Miskowiec(1986, Spring), 23

24) Paul Delaney and George P. Landow, "Hypertext, hypermedia and literary studies," Hypermedia and Literary Studies(Cambridge, MA: MIT Press, 1991), 10

25) J. Derrida, L'criture et la diffrence(Paris:Seuil, 1967), 411, 김상환, [해체론에서 초월론으로 - 데리다의 구조주의 비판 소고], {철학과 현실}(1998년 가을호), 24 에서 재인용

26) 김상환, [해체론에서 초월론으로 - 데리다의 구조주의 비판 소고], {철학과 현실}(1998년 가을호), 29 참조

27) 이미 주어져 있는 재료를 그때 그때의 필요에 따라 임시적 도구로 활용하는 방식. 물론 경우에 따라 재료를 바꿀 수 있고, 또 그 재료도 여러 가지 이질적 종류를 자유롭게 짜맞추어 이용할 수 있다. 김상환은 이를 '응급 수리'라고 부른다. 앞의 책, 27

28) Paul Delaney and George P. Landow, "Hypertext, hypermedia and literary studies," Hypermedia and Literary Studies(Cambridge, MA: MIT Press, 1991), 18

29) Stuart Moulthrop, "Rhizome and Resistance: Hypertext and the Dreams of a New Culture", in Hyper/Text/Theory, George P. Landow (ed.)(Baltimore:The Johns Hopkins Univ. Press, 1994), 303

30) 앞의 책, 303

31) Nicholas C. Burbules and Thomas A. Callister, Jr., "Knowledge at the Crossroads : Some Alternative Futures of Hypertext Learning Environments"(http://www.ed.uiuc.edu/coe/eps/papers/crossroads.1.html), Part One, 'Traditional Text vs. Hypertext'(Educational Theroy, Winter 1996에도 실려 있음)

32) 앞의 논문, Part One, 'Hypertext, Knowledge, and Thought'

33) Gerald Weinberg, The Psychology Of Computer Programming(New York: Van Nostrand Reinhold, 1971)

34) Eric S. Raymond, "The Cathedral and the Bazaar", (http://www.earthspace.net/~esr/writings/cathedral-bazaar/cathedral-bazaar.html#toc10), 10장

35) 앞의 논문, 1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