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퍼텍스트와 책의 종말

이글은 경향신문 주간지 <뉴스메이커>397호(2000년 11월 2일)에 실린 글입니다.

요즘 전자책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실제로 시중에 전자책이 판매되기도 하고 또 인터넷에서도 여러 곳에서 전자책 서비스를 시작했다. 전자책이 대신하는 것은 바로 종이책이다. 책의 주 재료가 종이에서 전자적인 디지털 장치로 바뀐다는 말이다. 물론 거기에는 그럴만한 대단한 이득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책이란게 무엇인가? 책의 의미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책은 '글 또는 그림이 새겨진 종이를 겹쳐서 한쪽을 꿰맨 물건'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종이도 실도 없는 전자책이 어떻게 책이라 불릴 수 있단 말인가? 전자책을 책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읽는 방식이 종이를 넘기며 책을 읽는 지금의 방식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전자책은 비록 종이의 제약을 넘어서기는 하지만 그 외의 다른 부분에서는 인쇄된 종이책의 기능을 그대로 모방한다. 이것은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하여 책을 대량 생산하게 되었을 때에도 비슷했다. 인쇄기를 통해 찍혀 나온 책의 모양은 기존에 있었던 코덱스(codex), 즉 필사본을 그대로 본 뜬 것이었다. 손으로 쓰던 것을 활자로 찍었다는 것이 그 둘의 차이였다. 그렇게 보자면 책의 뿌리는 코덱스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코덱스 이전에도 정보의 전달과 보존을 담당한 것이 있었다. 바로 파피루스 두루말이였다. 하지만 가로로 길쭉한 한 면에 글을 쓰는 두루말이와 작은 조각들을 하나로 묶은 코덱스에는 무시 못할 차이가 존재했다. 코덱스는 두루말이에는 없는 상당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코덱스는 첫째, 글의 어느 지점이든 바로 열어 볼 수 있었다. 둘째, 종이나 양피지의 양쪽을 다 쓸 수 있었다. 셋째, 필요한 만큼 쪽을 추가함으로써 매우 긴 글도 실을 수 있었다. 코덱스가 인기였던 것은 그것으로 성경 전부를 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루말이는 마태복음 하나만으로도 꽉 차는 반면, 코덱스는 성경 전부를 한 묶음 안에 다 실을 수 있다. 그 때문에 기독교의 확산과 함께 두루말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그 자리를 코덱스가 차지했다.

책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 이해의 밑바닥을 이루는 것은 바로 이 코덱스에서 시작되어 구텐베르크에 의해 혁명을 이룬 '인쇄된 책'이다. 물론 코덱스가 두루말이를 몰아낸 5세기경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책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책은 처음에는 읽혀지기 위해 쓰여졌다. 이때는 마침표, 쉼표와 같은 구두점도 띄어쓰기도 없었다. 그 후 띄어쓰기의 등장과 함께 책은 '속으로 읽기'의 대상으로 변해갔으며, 이후 전문적인 스콜라 학자들의 등장과 함께 복잡한 사유를 표현해야 한다는 요구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요구에 따라 책의 지면을 체계적으로 활용하려는 시도가 행해지고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장, 절, 목차, 방주, 인용부호 등이 도입되었다.

인쇄기의 발명은 이를 더욱 부채질했다. 읽을 자료가 많아지면서 빨리 읽힐 수 있도록 책에 많은 시각적 장치가 도입되었으며, 소리내어 읽는 것은 금지되었다.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인쇄 기술에 의해 규정된 글쓰기 공간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책의 쪽 순서는 책이 묶이면서 고정된다. 그리고 독자를 그 순서를 따라 움직이게 한다. 우리에게 책은 영구 불변의 표상이었다. 책은 '시간을 초월하는' 가치를 가지며, 인류에게 영원한 진리를 전해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책은 세계의 질서를 보여주는 것이며 따라서 '1,2,3장', '서론, 본론, 결론' 등의 목차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정리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책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인쇄기의 발명과 함께 생겨난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똑같은 모양으로 대량생산되며, 또, 한번 찍혀 나오면 다시는 고칠 수 없는 인쇄된 책의 특성에 현혹되어, 책에 대한 지금의 신화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제 이 신화가 월드와이드웹(이하 '웹')의 등장과 함께 깨어지고 있다. 그런데 인터넷의 대명사가 된 이 웹이 책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 대답은 우리가 책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있다. 우리는 책을 앞에서 말한 인쇄된 책이라는 좁은 의미로 뿐만 아니라 그보다 넓은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브리태니커에 따라 넓은 의미의 책의 정의를 내려보면, 책은 "상당한 정도의 분량을 가지며, 공적인 유통을 의도로 하며, 비교적 쉽게 들고 다닐 수 있을 만큼 가벼우면서도 견고한 물질 위에 쓰여진 메시지"라고 정의된다. 이렇게 보면 웹도 어디서나 손쉽게 접근 가능한 엄청나게 많은 정보가 전 세계에 공개되어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 조건을 충족시킨다. 따라서 웹은 책이다. 하지만 웹은 좁은 의미의 책과는 다른 책이다. 이는 단지 종이에서 컴퓨터로의 외형적 변화만을 두고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외형적인 차이보다 더 근본적인 차이가 둘 사이에는 존재한다.

월드와이드웹이 기존의 책과 가장 다른 점은, 문서 내에 '링크'라고 불리는 '밑줄 그어진 파란 글자들'이 있어서 이를 클릭하면 바로 다른 문서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이는 책장을 넘기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책장은 위에서 아래로 한 페이지의 글을 다 읽었을 때 넘기는 것이다. 책에서는 책장을 넘기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웹에서는 한 문서 안에 다른 문서로 넘어가는 다양한 통로가 마련되어 있다. 통로의 선택은 전적으로 독자의 판단에 맡겨져 있다. 이처럼 다양한 경로를 마련해 놓은 텍스트, 이를 하이퍼텍스트라고 한다. 하이퍼텍스트에서는 각주가 본문보다 더 중요하다, 거기에는 각주에서 각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슬이 존재할 뿐이다. 이를 로버트 쿠버는 책이 강요하는 '선(線)의 횡포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말한다.

하이퍼텍스트는 미완(未完)의 글쓰기 공간이다. 그것은 명확한 경계가 없다, 쉽게 수정 보완 갱신될 수 있다, 독자의 선택에 맡겨져 있다는 점에서 미완이다. 그것은 완결되지 않은, 끝이 열려있는 책이다. 예를 들어 대표적 하이퍼텍스트 소설인 마이클 조이스의 {오후}를 보면, 주인공 피터와 사장의 점심 장면은 세 가지 다른 경로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사장 아내를 생각하는 장면, 둘째는 여자 동료를 생각하는 장면, 셋째는 골치 아픈 업무를 생각하는 장면이다. 어느 경로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피터의 점심의 의미는 다르게 해석된다.

하이퍼텍스트도 책이라 한다면 이제 책은 '읽는 것'이 아니라 '돌아다니는 곳'이다. 그것은 마당이다. 이러한 하이퍼텍스트는 지금까지의 책에 대한 태도 변화를 요구한다. 선형적, 순차적인 질서를 강요하고, 두꺼운 표지에 싸여 독자적인 유기체로 취급되던 책은 이제 해체된다. 인쇄문화가 만들어 놓은 전통은 뒤집히고 망가진다. 하이퍼텍스트는 이 해체된 책의 자리를 메꿀 새로운 글쓰기이다. 하이퍼텍스트 글쓰기는 종이를 종착역으로 삼지 않는 글쓰기이다. 그런 점에서 이는 종이로의 인쇄를 목표로 하는 워드프로세서와도 다르다. 하이퍼텍스트 글쓰기에서는 일직선으로 연속해서 써내려 가는 글이 아니라 토막 글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글들이 하나의 네트워크를 이룬다. 이 네트워크는 종이로 인쇄가 불가능하다. 종이로 인쇄하면 이 네트워크는 사라져버린다. 하이퍼텍스트 글쓰기의 목적지는 전자적인 공간이다. 여기에는 목차가 아니라 글들이 읽혀질 지도가 만들어진다. 이 지도 위를 독자는 자기가 원하는 길을 따라 간다. 지도를 따라가는 각자의 궤적에 따라 서로 다른 글들이 만들어진다. 이것이 책이라면 이것은 인쇄된 책의 종말이며 새로운 책의 시작이다.

참고: 뉴스메이커에서는 자기들 기사의 논지에 맞추기 위해서 '하이퍼텍스트는 책의 종말이 아니다'라고 제가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의 제목을 달고서, 제 입장과는 반대되는 결론을 첨가해서 기사화했더군요. 기자들에게 글을 맡기실 때는 이점 염두에 두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