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책, 책 읽기

배식한 (서울대 강사, 철학)

(이글은 "2001 여름방학 우리교육 교사 아카데미"에서 강연한 내용입니다.)

지금의 글쓰기

글을 쓰기 위해 원고지를 펼치는 사람은 나이 지긋한 분들을 빼고는 이제 거의 없으리라. 지금 이 글을 쓰기 위해 나는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그리고 컴퓨터가 있는 책상 주위의 책장에는 책들이 빼곡이 쌓여 있다. 그렇지만 내 손은 그 책들로 가질 않고 오히려 컴퓨터 속의 파일들을 뒤지고 있다. 어디 이미 내가 썼던 글들 중에서 오려 붙일 만한 것이 없나 워드 프로세서를 열고 여기저기 스크롤을 반복한다.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 나갈까? 그래! 디지털 시대의 책읽기니까 디지털(digital)부터 시작하자. 그런데 디지털이 뭐지? 디지털을 어디 잘, 그리고 재미있게 설명해 놓은 것 없나? 백과사전에서는 디지털을 뭐라고 정의했을까?

여기에 이르면 옛날 같았으면 나는 다시 또 책장으로 몸을 향하던지, 도서관으로 가서 백과사전을 뒤졌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의자에서 조금도 몸을 떼지 않는다. 윈도우에서 익스플로러를 열고서 검색 사이트로 들어간다. 그리고 '디지털'이라고 쳐 넣고 검색을 시작한다. 무수히 많은 관련된 정보와 사이트가 불려 들어온다. 두산 백과사전에는 디지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나는 그 내용을 그대로 복사해서 이 글로 옮긴다. 마우스 한번의 클릭으로.

이것이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과도기를 살고 있는 나의 글쓰기이다. 그리고 이 글쓰기의 끝에는 책이 있다. 즉 글쓰기의 최종 결과물은 책이다. 이 책에 대해 나는 이야기해야 한다. 사실 책과 글쓰기는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뱀처럼 서로 맞물려 있다. 글을 쓰기 위해 나는 책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글쓰기의 결과물은 책이다. 즉 책 - 읽기 - 쓰기 - 책 - 읽기....의 과정이 되풀이 되는 것이 바로 글의 자연스런 순환과정이다. 이 순환과정을 바퀴로 해서 문명은 계속 앞으로 진행한다.

그런데 나는 지금 글쓰기를 위해서 책읽기를 다르게 하고 있다. 아마도 내가 쓴 글은 종이 위의 까만 화학약품의 형태로 바뀌어 종이책의 한 부분을 이루겠지만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앞에서 내가 읽은 글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글은 종이 위에 찍혀 있지 않고 모니터에 찍혀 있었다. 그것은 잉크를 필요로 하지 않고 전기를 필요로 한다. 내가 읽은 글과 내가 쓴 글의 종착역이 다른 이 현실은 바로 우리가 과도기적 시대에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글의 자연스런 순환과정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내가 쓴 글과 내가 읽은 글의 '자리'가 같아져야 한다. 그렇다면 그 자리는 어디일까? 예전에는 그 자리가 종이였다. 이제 그 자리는 모니터이다. 그리고 이 모니터의 뒤에는 1과 0, on과 off로만 이루어진 세계, 즉 디지털의 세계가 있다.

디지털

그리스의 제논이 제기한 역설 중에 이런 것이 있다. "토끼와 거북이가 100미터 경주를 한다. 그런데 토끼는 거북이보다 걸음이 빠르므로 공정한 경기를 위해 거북이는 토끼보다 10미터 앞에서 출발한다. 그러면 토끼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왜? 왜냐하면 토끼가 거북이가 처음 있었던 10미터까지 가면 거북이는 비록 느리지만 처음 자리에서부터 조금 앞으로 나갔을 것이다. 다시 토끼가 거북이가 나간만큼 따라가면 거북이는 그 사이 또 조금 앞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이 과정은 무한히 계속된다. 따라서 토끼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1과 100 사이에 있는 수 중 1에 가장 가까이 있는 수는? 먼저 떠오르는 수는 2이다. 그러나 2가 답이려면 요구되는 수가 자연수라야만 한다. 만약 실수 가운데서 찾는다면? 우리는 답을 말할 수 없다. 쪼개도 쪼개도 계속 수가 나오기 때문이다. 쪼개도 쪼개도 여전히 수가 남아있는 이 세계가 바로 아날로그의 세계이며, 연속체(continuum)의 세계이다. 그에 비하면 자연수의 세계는 디지털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즉 불연속체의 세계이다.

이렇게 보면 디지털화는 연속적인 것을 인위적으로 끊어서 불연속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디지털의 이 불연속성은 세계의 모습을 완벽하게 옮기는데는 한계를 가지지만 제한된 목적과 용도 내에서는 아주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시간은 연속적으로 흐른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을 연속적으로 파악할 필요는 없다. 즉 시간을 알기 위해 실수는 필요 없다. 우리는 목적에 따라 다양한 디지털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보통 시계에는 초침이 없는 것도 있다. 일상적 삶에서 몇 초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시간이 1분단위로 분절된다. 하지만 올림픽에서 100미터 달리기 기록을 잴 경우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여기서는 0.1초, 또는 0.01초가 중요하므로 시간을 1/100초로 쪼갤 필요가 있다. 우리의 목적과 용도에 따라 자연은 다양한 방식과 정밀도로 쪼개져야 한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우리의 움직임을 1/24초에 한번씩만 찍어 저장한다. 우리가 실제로 그렇게 움직이는가? 마치 로보캅이 움직이는 것처럼? 그렇지 않을 것이다. 1/24초와 2/24초 사이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 사이까지 찍을 필요가 없다. 왜? 1/24초에 한 번씩만 찍어도 우리 눈은 그 사이가 비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음악도 그렇다. 우리 귀가 듣기에 전혀 거슬리는 것이 없을 정도로만 음의 연속적인 파장을 세밀히 계단식으로 디지털화하면 된다.

디지털 = 번호 붙이기

사물들을 필요한 만큼 쪼개어서 본다는 이 디지털적 사고는 세계의 중요한 현상들을 잘게 쪼개고 그 쪼개진 것들에 일정한 값을 매길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하여 모든 것들은 수로 환원된다. 색깔도 그렇고, 소리도 그렇고, 문자도 그렇다. 예를들어 색은 RGB(Red, Green, Blue) 각각의 값을 28=256단계로 나누어 이를 조합하여 만들어 낸다.(총 가짓수= 28x28x28) 소리는 mp3의 경우 1초를 녹음하기 위해 128 kilobit를 필요로 한다.(그것도 압축해서) 문자의 경우, 전 세계의 모든 문자를 표시하기 위해서 4 Byte 즉 32bit가 필요하다. 모니터에 나타나는 문자, 색, 소리에만 숫자가 붙는 것이 아니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이제는 네트워크로 연결된 모든 컴퓨터에 자기의 고유번호가 할당된다. IP 어드레스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인터넷이 처음 만들 때 IP 주소는 32비트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32비트 주소이면 전체 개수는 232=4,294,967,296개, 약 43억 개이다. 이 주소는 편의상 8비트마다 사이에 점을 찍어 네 개의 단위로 나누어 표시한다. 8비트이면 28=256이므로 10진법으로 나타내면 0.0.0.0에서 255.255.255.255까지의 주소로 표시할 수 있다. 하지만 인터넷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아직은 43억 개의 주소로 버틸 수 있지만 인터넷의 팽창 비율을 생각한다면 주소가 고갈될 날이 머지 않았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고 그리하여 새로운 주소 체계를 모색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훗날 누군가가 인터넷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인 빈트 서퍼에게 인터넷의 지난날을 생각하면 가장 아쉬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도 바로 이것이었다. '인터넷 주소를 32 비트로 정한 것.'

현재 논의되고 있는 새로운 인터넷 주소 체계는 보통 IpV6(IP 버전 6)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128비트 주소 체계를 주장한다. 32비트에서 33비트로 자리수가 하나만 더 늘어도 주소는 43억개에서 86억개로 2배가 되는데 32비트보다 96자리가 더 늘어나니 그 숫자는 어마어마하다. 이 주소 체계가 도입되면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 각각에게 1000개씩의 IP 주소를 줄 수 있다. 또 앞으로는 모든 전자 제품들도 다 네트워크로 연결될 것이므로, 각 개인 뿐만 아니라 모든 가정의 모든 가전제품들, 예컨대 냉장고, TV, 세탁기 등도 각자 하나씩의 IP주소를 가지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자기 고유의 번호를 가질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마치 사람들에게 고유의 주민등록번호가 있는 것처럼.

디지털의 장점

무수한 반도체의 집적인 컴퓨터는 아날로그로 된 신호들에 고유의 숫자를 붙이고 이를 1과 0만이 값을 가지는 비트(bit)의 무수한 배열에 저장한다. 따라서 컴퓨터 속에는 1과 0값의 무수한 배열과 그것의 변화가 있을 뿐이다. 컴퓨터는 이렇게 변환된 1과 0의 배열로만 이루어진 디지털 정보를 가공, 결합, 전송, 저장, 배포한다. 디지털에서는 처리되는 정보가 1과 0, 둘 뿐이므로 단순할 뿐만 아니라 분절되어 있다. 따라서 이 분절된 정보 형태가 유지되는 한, 가공, 전송, 저장, 재생 과정에서 비디오 테이프처럼 그 내용이 흐려지거나 질이 저하될 염려가 없다.

게다가 디지털 부호는 책에 인쇄된 글자와는 달리 놀랄 정도로 손쉽게 검색, 복제, 변형, 수정, 이동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책과 컴퓨터에 똑같이 '아버지'란 글자가 기록되어 있다고 하자. 우선 책에서 '아버지'와 동일한 글자를 찾으려고 하면 우리 눈으로 일일이 책장을 넘기며 찾아야 한다. 하지만 컴퓨터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아버지'란 문자는 컴퓨터에서 동일한 디지털 부호로 변형되어서 저장된다. 그 부호가 예컨대 '10000011111000'이라고 하자. 그러면 1과 0이 동일한 순서로 배열된 것이 있는지를 확인함으로써 '아버지'란 글자를 찾을 수 있다. 게다가 이 작업은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에 의해 행해진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디지털 정보의 이런 특성 때문에 문서와 문서의 연결, 단어와 단어의 연결이 아주 손쉽게 이루어진다.

또한 컴퓨터를 통한 디지털화는 이제까지 따로 놀던 음성, 문자, 동영상, 그림의 완전한 통합을 가능케 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멀티미디어를 만들어 냈다. 왜냐하면 디지털에서는 음성이든 문자든 동영상이든 그림이든 모두가 1과 0의 조합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서로 이질적이어서 결합이 불가능할 것 같던 음성, 문자, 동영상, 그림이 모두 하나의 수단에 의해 표현 가능해짐으로 인해 그들의 결합도 그만큼 손쉬워진 것이다.

책의 역사

요즘 전자책, 소리나는 책, 입체 책 등 다양한 형태의 책들이 나오면서 책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책의 개념이 새롭게 문제가 되고 있다. 책의 의미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책은 '글이 쓰여지거나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겹쳐서 한쪽을 꿰맨 물건'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형태의 책의 시조는 코덱스(筆寫本, codex)라 불리는 양피지조각의 묶음이었다. 우리가 보고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친숙한 책의 형태는 이 코덱스의 양피지가 종이로 바뀌고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하여 책을 대량 생산하게 되는 오랜 과정을 거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물론 코덱스 이전에도 정보의 전달과 보존을 담당한 것이 있었다. 파피루스 두루말이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6-8미터의 가로로 길쭉한 한 면에 글을 쓰는 두루말이와 작은 조각들을 하나로 묶은 코덱스에는 무시 못할 차이가 존재한다. 어떻게 보면 둘 사이에는 연속적인 측면보다 단절적인 측면이 더 강하다. 코덱스는 두루말이가 가지지 못한 상당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코덱스는 첫째, 글의 어느 지점이든 바로 열어 볼 수 있기 때문에 중간의 어떤 구절을 찾기가 쉬웠다. 둘째, 종이나 양피지의 양쪽을 다 쓸 수 있었다. 셋째 필요한 만큼 쪽을 계속 추가함으로써 매우 긴 글도 실을 수 있었다. 코덱스가 인기였던 것은 그것으로 성경 전부를 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루말이로는 마태복음 하나만으로도 꽉 차는 반면, 코덱스는 성경 전부를 한 묶음 안에 다 실을 수 있다. 그리하여 기독교의 확산과 함께 두루말이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그 자리를 코덱스가 대신했다.

책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 이해의 밑바닥을 이루는 것은 바로 이 코덱스에서 시작되어 구텐베르크에 의해 혁명을 이룬 '인쇄된 책'이다. 물론 코덱스가 두루말이를 몰아낸 5세기경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책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고대에는 책은 큰소리로 읽혀지기 위해 쓰여졌다. 이때에는 띄어쓰기도 되지 않았으며 마침표, 쉼표, 콜론, 세미콜론 등과 같은 구두점들도 없었다. 따라서 단어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큰소리로 소리내어 읽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때의 작문은 받아쓰기를 통해 이루어졌다. 띄어쓰기가 일반화된 것은 11세기에 이르러서이다. 처음 띄어쓰기는 읽기의 보조수단으로 시작되었지만 이는 속으로 읽기의 발전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스콜라 철학과 복잡한 지적 사유가 등장하면서 작문은 글쓰기와 속으로 읽기가 되었다. 속으로 읽기는 정보를 훨씬 빠르게 습득할 수 있도록 해 줌으로써 복잡한 개념들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를 증대시켰다. 그리하여 저자들은 받아쓰기를 시키는 것이 아니라 직접 양피지나 종이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고딕 필기체가 이 시기에 등장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것은 빨리 쓸 수 있으면서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씨체였다. 스콜라 학자들의 글이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책은 이를 체계적인 디자인과 지면 배치를 통해 반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리하여 등장한 것이 바로 장, 절, 그리고 목차, 주제에 대한 알파ꕛ 분류, 머리말이다. 이 밖에도 방주, 인용부호 등도 등장하게 되는데 이것들은 모두 시각적인 장치들로서 듣는 사람이 아닌 읽는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하기 전까지 책의 복제는 수도원의 차가운 필사실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15세기에 구텐베르크에 의한 인쇄기의 발명은 사유와 학문에 혁명을 가져왔다. 인쇄기는 같은 필체의 책을 손쉽게 대량 복사했으며, 완결된 편집을 가능케 했다. 그리고 맥루안이 지적하는 것처럼 인쇄기는 구술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을 시각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바꾸었다. 소리내어 읽는 것은 이제 금지되어야 할 습관이 되었다. 인쇄기를 통한 대량생산으로 인해 정보량과 정보의 보급 속도가 급격하게 늘어났으며 이는 사회,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다 알다시피 종교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다. 글을 읽는 속도도 그렇다. 고대의 지식인들이 지금의 지식인들의 글 읽는 속도를 보면 혀를 내 두르리라.

책이란?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함께 책과 정보 전달 수단의 엄청난 변화를 앞에 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책의 미래를 조망하려면 우리는 책의 범위를 폭 넓게 잡을 필요가 있다. 인쇄된 책의 형태에 매몰되어 그것만 고집한다면 앞으로 닥칠 지성사의 변화를 바라볼 큰 개념적 틀을 하나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책의 역사에는 항상 이집트의 파피루스 두루말이가 제일 먼저 등장한다. 심지어는 수메르인의 점토판까지도 거론된다. 또 동양에서의 책은 책(冊)이란 한자가 보여주듯이 대나무 조각을 끈으로 이어놓은 것이었다. 이것들까지도 책이라고 한다면 책은 형태와 재료에서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재료를 보면 책은 진흙, 대나무조각, 파피루스, 양피지, 종이, 그리고 이제 전자칩으로 변화를 겪고 있고, 형태를 보면 진흙판, 두루말이, 종이묶음, 그리고 모니터의 모양을 거치고 있다. 이러한 형태와 내용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것들이 책이라고 불릴 수 있다면 책의 정의는 무엇이고 그 범위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브리태니카에는 책이 갖추어야 할 요건으로 다음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책은 첫째 커뮤니케이션의 도구이다. 둘째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시각적 기호체계가 사용된다. 셋째 손쉽게 유통될 수 있도록 발행된 것이다. 이를 종합적으로 표현하면 책은 상당한 정도의 분량(유네스코의 규정에 따르면 표지를 포함해서 최소한 49쪽 이상)을 가지며, 공적인 유통을 의도로 하며, 비교적 쉽게 들고 다닐 수 있을 만큼 가벼우면서도 견고한 물질 위에 쓰여진 메시지라고 정의될 수 있다. 책은 지식의 전파와 보존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위해 휴대성과 영구성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바빌로니아의 점토판, 중국의 대나무 조각 묶음, 이집트의 파피루스 두루말이, 중세의 소가죽이나 양가죽을 묶은 코덱스, 현대의 인쇄된 종이 책, 마이크로필름, 전자책도 다 책이라 할 수 있다.

전자책

이 중에서 요즘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새로운 책의 형태는 바로 전자책이다. 실제로 인터넷 여러 곳에서 전자책을 팔기도 하고 또 어디서나 들고 다니면서 볼 있는 전자책 단말기 개발도 매우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다니는 대신, 학생들이 노트북보다 작고 얇은 단말기 하나씩만 들고 학교를 등교하는 모습을 아주 흔하게 보게 되리라는 것은 이제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사람들은 전자책이 더 이상 종이를 필요로 하지 않고, 잉크도 필요 없으며, 굳이 서점을 찾아갈 필요도 없이,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우편비용 한 푼 들이지 않고 독자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점에 열광한다. 단 하나 문제가 있다면 디지털화로 인해 너무 쉽게 원본과 똑같이 복제 전파될 수 있기 때문에 저작권 보호와 관리가 어렵다는 점 정도라고 할까?

하지만 전자책은 디지털의 힘과 정신을 제대로 살리는 책이 아니다. 전자책은 단지 책의 주 재료가 종이에서 전자적인 장치, 특히 컴퓨터의 디지털 장치로 바뀐 것일 뿐이다. 지금 사람들이 열광하는 전자책은 인쇄된 종이 책의 기능을 모니터로 옮겨 놓은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종이를 넘기며 책을 읽는 지금의 방식과 전자책을 읽는 방식에 큰 차이가 없다. 지금의 전자책은 비록 종이의 한계를 약간 벗어나기는 하지만 그 외의 다른 부분에서는 종이책을 그대로 모방한다. 따라서 전자책은 인쇄 기술에 의해 규정된 글쓰기 공간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책의 쪽 순서는 책이 묶이면서 고정된다. 그리고 독자를 그 순서를 따라 움직이게 한다.

책 = 백과사전 = 도서관

하지만 책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인쇄기의 발명과 함께 생겨난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디지털의 새로운 정신은 기존의 종이책이 아닌 새로운 책에 담아야 적격이다. 따라서 우리는 편협한 책의 개념에서 벗어나 보다 폭넓고 열린 마음으로 미래의 책의 모습을 그려보아야 한다. 우리는 책이 처음 만들어질 때의 근본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책은 언어적인 생각들을 담는 그릇 또는 자리이다. 책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모든 언어적인 생각들을 한꺼번에 담을 수 있는 큰 그릇, '위대한 책'(Great Book)을 생각하게 된다. 사실 이 위대한 책의 꿈은 두 가지 형태로 구현되어 왔다. 도서관과 백과사전이 그것이다. 그런데 도서관과 백과사전은 서로 상반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즉 도서관은 가능한 한 많은 책들을 한 곳에 모으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고, 백과사전은 책의 내용을 가능한 한 하나의 책에 압축해 넣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 도서관은 양을 늘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고 백과사전은 양을 줄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도서관과 백과사전의 이 기능이 하나로 통합될 때 사실 '위대한 책'이 실현될 수 있을 터인데 그것이 종이책에서는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 불가능했던 일이 이제 디지털이라는 도구 위에서 실현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바로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다름 아닌 디지털의 정신을 가장 잘 실현해 보이는 하이퍼텍스트이다.

디지털 시대의 책 = 하이퍼텍스트

'하이퍼텍스트'가 뭔지를 알려면 인터넷의 '월드와이드웹'을 생각하면 된다. 사실 인터넷이 전 세계인의 필수적인 네트워크로 발전하게 된 데에는 월드와이드웹의 절대적 공헌이 있었음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웹의 등장과 함께 인터넷은 마치 기름에 불붙듯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월드와이드웹은 인터넷을 대학교나 컴퓨터 관련 종사자들의 전유물에서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는 보편적인 도구로 탈바꿈시켰다. 왜냐하면 월드와이드웹에서는 마우스 하나만 있으면 어디로든 돌아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복잡한 키보드의 자판을 외울 필요도 없다. '링크'라고 부르는 '파란 줄그어진 글자'를 마우스로 클릭하기만 하면 바로 그와 관련된 다른 문서로 넘어간다.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하이퍼텍스트이다. 월드와이드웹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도 문서 내의 어느 부분을 클릭하면 다른 문서로 이동한다는 바로 이 점이다. 이는 책에서 책장을 넘기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책장은 위에서 아래로 한 페이지의 글을 다 읽었을 때 넘기는 것이다. 책에서는 책장을 넘기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웹의 한 문서 안에는 다른 문서로의 넘어가는 다양한 통로가 마련되어 있다. 어느 경로를 선택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독자의 판단에 맡겨져 있다. 이처럼 다른 문서로의 다양한 경로를 마련해 놓은 텍스트, 이를 하이퍼텍스트라고 한다. 하이퍼텍스트에는 독자들을 여러 방향으로 이끄는 '보이지 않는 끈'이 있다. 이런 하이퍼텍스트에서는 각주가 본문보다 더 중요하다. 책에서는 각주를 읽은 후에는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야 하지만 하이퍼텍스트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각주 이외에 따로 본문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각주에서 각주로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슬이 존재할 뿐이다.

로버트 쿠버는 {뉴욕 타임즈}에 쓴 '책의 종말'이란 글에서 이러한 상황을 '선(線)의 횡포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이야기한다. "소설의 힘의 많은 부분은 선, 즉, 문장의 시작으로부터 마침표까지, 페이지의 꼭대기부터 맨 밑까지,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저자의 감독 하에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그 운동 속에 구현되어 있다. 물론 인쇄의 긴 역사 동안 이 선의 힘에 맞서기 위한 많은 전략들이 있어 왔다. ... 그 선의 횡포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이 마침내 하이퍼텍스트의 도래와 함께 이제 정말 가능한 것으로 인식된다."

하이퍼텍스트의 세 가지 특성

종이의 묶음인 책으로부터 컴퓨터라는 전자적인 공간에 펼쳐지는 하이퍼텍스트로의 이 이동이 그렇다면 과연 우리에게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인가? 우리의 관심사는 저변의 기술적 변화가 가져다 줄 글쓰기와 글읽기의 변화된 모습,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끈'의 위력이다. 하이퍼텍스트 문서들에는 우리가 책과 비교해서 그냥 지나쳐서는 안되는 부분이 세 가지 있다. 첫째는 하이퍼텍스트 문서 구성 성분의 복합성이고, 둘째는 하이퍼텍스트가 만드는 경로의 다양성이며, 셋째는 하이퍼텍스트 문서의 불확정성이다.

첫째로 하이퍼텍스트 문서의 구성 성분부터 살펴보자. 하이퍼텍스트로 된 홈페이지들은 단순히 글자들의 나열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거기에는 글자뿐만 아니라 그림, 사진, 동영상까지도 어우러져 있다. 이는 하이퍼텍스트가 디지털 기술의 구현체인 컴퓨터에 기반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하이퍼텍스트를 이루는 구성 성분은 또 있다. 홈페이지에는 기본적으로 게시판, 방명록이 마련되어 있다. 그 외에도 독자의 참여를 가능케 하는 많은 입력 장치들이 제공된다. 심지어는 실시간 채팅도 가능하다. 따라서 이제 저자는 단순히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게시판을 관리하고 답장을 게시하는 등 독자와 직접 대화를 나눌 방법을 찾고 고민해야 하며, 독자는 단순히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 공간에 참여하여야 한다.

둘째로 하이퍼텍스트에는 다양한 경로가 마련되어 있다. 하나의 문서에는 다른 문서로 넘어가는 다양한 통로가 사방으로 열려 있다. 또 그 통로는 안팎을 가리지도 않는다. 한 사이트 안의 문서와 밖의 문서로 이동하는 것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다른 사람이 쓴 다른 사이트의 문서라 하더라도 내 문서에서 연결되면 내 글의 한 부분으로 포섭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 문서에는 명확한 경계가 없다. 경계 없이 맞물린 공동의 공간을 독자는 자기가 선택한 경로를 따라 항해한다. 따라서 똑같은 사이트를 돌아다녀도 독자는 자기만의 선택에 따라 다른 경험을 한다. 예를 들어 최초의 상업적 하이퍼텍스트 소설인 마이클 조이스의 {오후}(1987)를 보면, 주인공인 피터가 사장과 점심을 먹는 장면은 다른 장면으로의 세 가지 경로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사장의 아내를 생각하는 장면이고 둘째는 동료와의 정사를 생각하는 장면이고 셋째는 자기가 맡은 골치 아픈 업무를 생각하는 장면이다. 어느 경로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피터의 점심의 의미는 다르게 해석된다. 모든 마디는 그것이 어디로부터 왔으며 또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또 설령 모든 마디, 즉 모든 에피소드를 다 방문해 보았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거기에는 새롭게 읽을 방법이 남아 있다. 예전과는 다른 경로를 선택해서 읽으면 그것은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인터넷이란 정보의 바다에는 무한의 바닷길이 펼쳐져 있다. 누구든지 그 바닷길 위에 원하는 대로 배를 몰아갈 수 있다. 배가 지나가면 수면은 다시 언제 배가 지나갔냐는 듯 매끄럽게 펼쳐져 있다. 각자는 각자의 필요와 관심에 따라 바다 표면에 다른 길을 낼 수 있다. 게다가 그 경로는 이미 주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한다. 검색 엔진에 의한 정보 검색이 그 예이다. 하나의 키워드에 의해 전 세계의 관련 문서들이 한 화면 위에 매번 새롭게 정리된다. 검색된 목록 중에서 독자는 원하는 곳을 선택해서 이동할 수 있다. 고정된 위치가 있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변화시킴으로써 다르게 읽힐 수 있는 정보, 이것이 하이퍼텍스트이다.

셋째로 하이퍼텍스트 문서는 인쇄된 책처럼 한번 찍혀 나오면 영영 고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하이퍼텍스트는 언제나 미완(未完)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미완이다. 첫째, 쉽게 수정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완이다. 워드프로세서로 써서 파일로 저장해 놓은 글은 언제든지 다시 불러서 고치고 지우고 순서를 바꾸고 내용을 덧붙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인터넷상에 올라와 있는 글들도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고치고 지우고 순서나 배치를 바꿀 수 있다. 둘째, 계속 성장을 한다는 점에서 미완이다. 인터넷 정보는 끊임없이 갱신되고 추가된다. 홈페이지를 만든 사람들에 의해서도 수정, 추가, 갱신되고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참여를 보장함에 의해서도 내용이 늘어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딸꾹질이 날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learn2.com이란 사이트에 가보라. 거기에는 딸꾹질을 멈추게 하는 비법들이 정리되어 있다. 그밖에 자질구레하게 알면 도움이 되는 생활의 지혜들이 총 망라되어 있다. 새로운 지혜가 계속 추가됨으로써 그 사이트는 계속 성장한다. 게다가 그 곳을 방문했던 사람들도 자기들의 비법을 거기에 공개함으로써 생활의 지혜를 보탠다. 하이퍼텍스트는 완결되지 않은, 끝이 열려 있는 책이다.

디지털 시대의 책 읽기

이상의 세 가지가 하이퍼텍스트의 주목할 만한 특징들이다. 하이퍼텍스트가 책과 다른 점은 변화하고 성장하며 저자와 독자가 함께 만들어 간다는 점이다. 하이퍼텍스트도 책이라 한다면 이제 책은 '읽는 것'이 아니라 '돌아다니는 곳'이다. 그것은 마당이다. 이러한 하이퍼텍스트는 지금까지의 책에 대한 태도 변화를 요구한다. 지금까지의 책은 영구 불변의 표상이었다. 책은 '시간을 초월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믿으며, 역사를 초월해서 인류 모두에게 영원한 진리를 이야기해 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책은 세계의 질서를 보여주는 것이며 따라서 "1,2,3장", "서론, 본론, 결론" 등의 목차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정리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책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인쇄기의 발명과 함께 생겨난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똑같은 모양으로 대량생산되며, 또 한번 찍혀 나오면 더 이상 고칠 수 없는 인쇄된 책의 특성에 현혹되어 책에 대한 지금의 신화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제 선형적이고 순차적인 질서를 강요하고, 두꺼운 표지에 싸여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유기체로 취급되던 책은 해체된다. 인쇄문화가 만들어 놓은 전통은 뒤집고 망가뜨려진다. 하이퍼텍스트는 이 해체된 책의 자리를 메꿀 새로운 글쓰기이다. '해체'를 넘어 하이퍼텍스트는 '창조'로 우리 곁에 다가오고 있다. 하이퍼텍스트란 새로운 책에는 예전의 독자를 당황케 하는 다양한 가능성들과 길들이 펼쳐져 있다. 새롭게 설정되는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신하는 마디들이 있다. 불후의 업적으로서의 책이 아닌 수정, 변화를 거듭하는 책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불변의 것에의 의지'가 아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자기 극복의 의지'이다.

횡설수설(橫說竪說)이란 말이 있다. 기존의 책은 사람들의 횡설수설을 막기 위해 질서를 잡아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이퍼텍스트는 독자에게 제공되는 자유만큼 밑도 끝도 없이 횡설과 수설을 조장한다. 그래서 더더욱 독자의 자율적인 통제과 적절한 자료 수집 그리고 창의적 분석력을 필요로 한다. 디지털 시대의 책 읽기가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밥을 떠서 입에까지 넣어 주는 교육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신세대가 배워야 할 능력은 바로 '무엇이든 우연히 잘 찾아내는 능력'(serendipity)이다.


참고 사이트 및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