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둥글지 않다

글로벌 문화(global culture)에서 사이버 문화(cyber culture)로

우리 인류가 사는 땅덩어리를 가리키는 영어의 'Globe'나 한자어인 '지구(地球)'는 둘 다 둥근 구의 의미를 그 저변에 두고 있다. 굳이 구의 의미를 살리고자 한 것을 보면 근세에까지 그 위세를 떨쳐온 평면적 세계상을 극복하고 새로운 인식에로 개안을 이룬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구' 비유는 컴퓨터와 커뮤니케이션이 결합되는 오늘날의 정보사회를 대표하는 말로서는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

둥글지 않은 세계

이 무슨 말인가? 갈릴레이의 위대한 업적을 무시하는가? 달에서 찍은 지구의 아름다운 사진을 모른체하는가? 아니다. 당신 말이 맞다. 지구는 둥글다. 그렇지만 물리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지구의 '둥금'은 더 이상 지금 이시대의 화두가 아니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나가면 온세상 사람들을 다만나고 오겠지'라는 노랫말에서도 보이는 것처럼 그것은 '걸음걸이' 시대에 적절한 화두이다. 증기기관, 석유 기관 등의 발명으로 배, 기차, 자동차, 비행기 등 우리의 걸음을 빠르게 할 각종 장치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럼에도 그것은 여전히 걸음걸이 시대의 연속선상에 있는 장치들이다. 아무리 빨라도 결국엔 지구 표면 위를 몸소 움직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지구라는 물리적 속박을 벗어나지 못한다.

전기가 발명되면서 이러한 걸음걸이의 시대를 마감해줄 전신, 전화, 라디오, TV 등의 커뮤니케이션 장치의 발명이 잇따랐다. 하지만 이러한 장치들은 '전달 용량의 한계' 아니면 '일방향성'이라는 불구의 다리를 하나씩 달고 있어서 걸음걸이 시대의 완전한 마감을 이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역부족 때문에 이들이 가지는 위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 시대를 주름잡으면서 앞으로 올 메시아의 엄청난 위력을 능히 가늠케하고 있다.

사이버 공간은 공간이 아니다. 구형적 공간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를 계속 공간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활동 공간이다. 이 공간은 기존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인간 활동이 모두 일어나면서도 기존의 공간이 가진 제약들은 제거된 공간이다. 공간적 제약이 제거됨으로써 공간의 중첩과 자유로운 확장, 순간적인 팽창과 축소가 가능하다. 공간의 변형과 함께 우리가 체험하는 시간도 또한 변형된다. 기다림은 이제 낯선 단어가 되어가고 있다.

글로벌 문화

글로벌 문화란 지구라는 거대한 덩어리가 한 인간의 삶의 단위가 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내가 사는 마을, 내가 사는 국가가 내 삶의 단위가 아니고 내가 사는 지구가 내 삶의 단위라는 말이다. 지구가 내 삶의 단위가 되기까지에는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있어왔다. 이는 산업혁명에서 시작해서 수송기관의 발달, 제국주의, 동서냉전, 자본주의 경제침략, 매스미디어의 발달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포함한다.

여기서 우리가 문화의 글로벌화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자본주의 경제침략과 매스미디어의 발달이다. 왜냐하면 지구를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어주는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 둘이기 때문이다. 문화는 인간 생활 또는 행위 양식의 총체이다. 문화라는 말이 의미있게 논의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인간의 일상 생활 깊숙히 침투해 있어야 한다. 문화는 '알게 모르게' 이미 우리의 몸에 배어 있는 어떤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적 상품 소비와 텔레비전과 같은 미디어의 시청만큼 전지구인의 생활에 골고루 그리고 깊숙히 침투한 것도 없다. 바로 이것이 글로벌 문화를 가능케 한 두 축이 아닌가?

글로벌 문화는 상품을 매개로 한 문화이며 또한 매스미디어 문화이다. 더더군다나 이 둘의 결합은 새로운 상승작용을 일으켜 글로벌 문화를 새로운 국면에 이르게 한다. 상품의 문화화와 문화의 상품화가 그것이다.

매스미디어는 상품을 신화화한다. 사람들은 물건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보들리야르의 말처럼 기호를 소비한다. 즉 "상품에 투입된 이미지와 이데올로기를 소비한다."(1) 제품 소비를 통해 소비자는 광고의 한 장면이 된 듯한 착각을 즐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사회의 건전한, 그리고 선도적인 집단에 자신도 속하게 되었다는 만족감을 느낀다. 금 목걸이가 아니라 '황신혜 목걸이'이며, 나비 머리띠가 아니라 '이승연 머리띠'이다. 요즘의 남성 의류 모델은 왜 한결같이 그렇게 심각한가?

대량 생산된 제품들에서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동질적 소속감을, 다른 한편으로는 소속의 경계를 벗어나려는 일탈의 욕구를 가진다. 말하자면 경계에 서서 둘 사이의 교묘한 줄타기를 즐기는 것이다. 그렇지만 산업사회에서는 그러한 소속감과 일탈 욕구마저도 공장에서 대량 제조되어 유통된다. 현대인들은 문화를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한다. 문화마저도 상품화된 것이다. 그러나 문화의 상품화는 문화를 '즉석 경험'의 대상으로 포장하여 문화를 관람의 대상으로 만든다. 상품화된 문화는 소비자 그 문화를 체험하는 듯한 착각 속에 빠지게 만들지만 사실은 그 소비자들은 여전히 관객일 뿐이다.

바로 여기에서 상품과 매스미디어에 기반한 글로벌 문화의 표피적 성격이 드러난다. 문화란 기본적으로 '부대낌'이다. 부대끼면서 상처가 나고 그 상처가 아물면서 살에 붙는 딱지가 바로 문화이다. 다시말해 문화는 아픔을, 땀을 동반한다. 문화는 자연을 인간화하는 것이다. 문화는 인간에게 낯선, 심지어는 적대적, 대립적으로 다가오는 자연 또는 자연성을 인간에게 낯익은 것으로 만드는 작업과 그 결과이며 이를 통해 자연에로 향하는 다양한 통로를 마련하는 것이다. 문화는 자연을 상대로 인간이 일대일로 체득해가는 것이지 소비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업화된 매스미디어는 한편으로는 자연을 인간으로부터 격리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가 소비의 대상임을 계속 주입시키면서 문화로 가는 '손쉬운' 길이 있다고 현혹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글로벌 문화의 표피적 성격은 사이버 문화에서는 어떤 모양을 지니게 될까? 지구라는 자연적 속박마져 벗어버린, 그리하여 자연과의 부대낌의 기회가 더더욱 적어져버린 사이버공간에서는 문화가 어떻게 자리매김 될 것인가?

사이버 문화

사이버 공간은 기존의 공간적 제약이 양적으로 개선된 공간이 아니라 질적으로 극복된 공간이다. 움직임은 마우스의 움직임 뿐이며 이 세상에 모니터 스크린 보다 더 큰 공간은 없다. 여기서는 전세계의 사람, 정보, 각종 활동공간, 그리고 인공적 자연들이 클릭 하나로 곧바로 주어진다. 실제세계와 때로는 구별이 안되게, 때로는 더 분명하게, 때로는 더 재미있게 주어진다. 낙관적 사이버리스트들은 이 공간이 벌레나 치한, 소음, 신체의 불결함 등이 제거된 순수한 정신적 공간이라며 유토피아적 꿈을 늘어놓는다. 과연 그렇기만 할까?

<자연이 제거된 자연>
마크 슬로카는 미디어의 발전과 함께 자연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인간들을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지금의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주로 실제 존재들이 주는 충격이다. 대면 의사소통의 적나라함, 자연세계의 거친 힘 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TV를 통해서는 자연현상을 몇시간 동안이나 관찰할 수 있지만 실제로 숲이나 초원에 놓여지면 어찌해야할 바를 모른다. .... 매체를 통하지 않고 직접 접하게 되면 당황하게 된다. 파티장 같은 곳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보면 거북함을 느낀다. 그런 일은 어쩐지 너무 적나라하다." "그들은 내부에서 산다. TV를 보면서 자신들의 가정용 오락 시스템들을 사용하면서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 그들이 밖으로 나갈 때는 어디론가 들어가기 위해서이다. 쇼핑몰이나 상점이나 영화관으로."(2)

슬로카는 사이버 공간에서 일어나는 '밖의 종말'을 주시하면서 이에 저항한다. 인공적 자연에 둘러싸여 그것에 만족하고 심지어는 실제 자연에 나아가기를 두려워하는 인간을 그려내면서 이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다. 이미 TV와 같은 일방향적 매체에서도 그 조짐이 나타나는 것을 보여주면서 그는 사이버 공간이 지닐 더 큰 파괴력을 경고한다. 사이버 공간은 사용자의 참여를 보장한다. 실제 자연보다 못할 게 없다. 마음만 먹으면 방구석에 쳐박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사이버 공간이 실공간이 되고 실제 공간은 허구의 공간이 된다. 그러니 이를 어쩌겠는가? 길은 하나다. 다시 몸을 움직여라!

<다시 신체로>
신체는 생존의 도구였을 뿐 아니라 풍요의 도구였다. 그러나 자연과의 직접적인 투쟁보다는 이러한 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인간 사회의 체계적 운영이 더 중요해지면서 신체는 천시되기 시작했다. 자연과는 달리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힘이 아니라 말이었으며 폭력이 아니라 설득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신체는 서양에서는 정신의 맑음(이성)을 해치는 더께로, 동양에서는 마음의 올바름(四端)을 그르치는 것으로 치부되어 신에 가까와지고자 하는 인간에게는 엄격한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사이버 공간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비록 천덕꾸러기로 대접을 받았지만 실제 세계에서 신체는 어쨌든 인간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숙명과도 같은 존재로 남아있었다. 기계가 신체 활동의 수동성을, 매스미디어가 인식의 수동성을 강요하면서 신체는 삶의 생산적 과정에서 소외되어버렸지만 신체는 여전히 정신의 담지자로서, 생생한 의사소통의 매개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신체의 역할마저 사이버 공간에서는 자기의 자리를 잃어버렸다. 신체의 불완전성에 의존하지 않는 새로운 의사소통의 가능성이 사이버 공간에서 제공되기 때문이다. 드디어 인간은 신의 영토에 발을 디뎌놓기 시작한 것인가?

신체는 이제 '생명'이라는 마지막 성역과 관련해서만 겨우 자신의 존재가치를 유지한다. 건강이 정치, 경제면와 동등하게 신문의 한 코너를 차지하고 헬스클럽, 건강식품이 판을 친다. 신체는 이제 절멸의 지경에 이르러 경계의 대상에서 오히려 부양받아야할 대상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자 신체에 가해졌던 가혹한 시선이, 쓰러진 자식을 바라보는 모성애로 180도 회전한다. 낭만은 바로 약자에 대한 동정과 동경에서 시작되는 법. 현대의 낭만주의자들은 다시 신체의 부활을 부르짖는다. 오늘날 신체와 몸의 문제가 철학에서 새롭게 부각되는 것도 이렇게 보자면 이해가 되는 일이다. 정신만으로 세워진 사이버 공간이 대변하고 있듯이 정신의 힘이 너무도 막강해진 지금 사람들은 이제 다시 잃어버렸던 신체를 다시 불러와 정신과 신체의 건강한 긴장 상태를 복원하고자 한다. 헬스클럽의 쳇바퀴를 돌고 있는 신체가 아니라 건전한 인식의 토대로서의 신체로.

<반복의 상실-메아리 없이 살기>
반복은 미래에 대한 예측을 제공함으로써 생활의 안정을 도모한다. 반복은 우리에게 삶의 강약과 완급을 조절하게 하고, 매듭과 재출발의 기회를 제공하며, 따라서 일방적으로 흐르는 긴 시간을 잘게잘게 쪼개서 순간 순간을 알차게 보내도록 한다. 인류는 하루, 한달, 일년의 반복에서 질서를 발견하고 이에 맞추어 살아왔다. 하지만 농경어업 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하면서 이러한 자연적 주기들의 중요도는 많은 부분 상실되었다.

산업사회 말/정보사회 초라는 시점을 점하고 있는 우리를 지배하는 주기는 이처럼 자연에 그 상응물을 가지지 않는 일주일이라는 주기이다. 겉보기에는 우선 기독교의 창세기에서 비롯된 듯한 이 일주일이라는 주기는 현재 노동과 여가, 직장과 가족의 적절한 배려라는 측면에서 산업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그에 비해 자연적 주기는 이제 여가와 낭만으로나 의미가 있다.

정보화는 이러한 주기로부터의 이탈 추세를 더더욱 가속시키고 있다. 반복과 기다림은 기계의 몫으로 넘겨지고 인간에게는 분초를 다투는 변화와 새로움만이 미덕으로 남는다. 실제 세계와 달리 사이버 공간은 흥망성쇄가 순식간에 게다가 아무런 출혈없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일정한 주기도 일정한 유형도 없다. 낮과 밤조차도 무력화된다. 더구나 원격근무라고해서 직장과 가정, 출근과 퇴근의 산업사회적 구분이 없어진 프리랜서가 출현하면서 일주일이라는 주기도 위협을 받고 있다. 끊임없는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는 강박만이 우리를 짓누른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어디에서 안정과 휴식을 찾을 것인가? 삶의 여유를 위한 기다림의 공간은 어디에 주어지는가? 사람들은 어떤 반복을 또 고안해 내서 이를 의지처로 삼을 것인가? 요즘들어 더더욱 기세를 부리는 오늘의 운세, 관상, 풍수 등이 부유하는 우리의 불안을 달래줄까?

<가면무도회-익명의 파티>
글로벌 시대의 문화 상호간의 침투는 그것이 상품과 매스미디어를 매개로 일상 깊숙히 교두보를 확보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매개 때문에 간접적이며 따라서 피상적 동일성을 벗어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일상과 일상의 직접적인 부딪침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이버 공간은 다르다. 서로 다른 일상과 일상이 직접적으로 부딪힌다. 시공을 가로질러 관심을 공유하는 다양한 문화의 사람들의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된다. 이제는 어쩌면 문화를 구획짓는 예전의 모든 지도는 불태워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문화지도는 더 이상 땅에 기반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신의 관심에 기반한다.

그러나 사이버 공간에서의 만남은 가볍다. 쉽게 그 흔적이 남고 쉽게 그 흔적이 지워진다. 펜과 붓의 손길을 기다리는 빈 벽과 성적 차이까지도 극복할 수 있는 다양한 가면이 도처에 널려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열광한다. 중독자도 생겨난다. 가볍고 경쾌한 세상을 두고 다시 과거의 짊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무겁고 그늘진 세상으로 나갈 이유는 없다. 쉽게 자기 자신을 바꾸며, 쉽게 치고 빠지면서 언제나 최상의 자기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가벼움은 끝모를 양극단을 들락날락한다. 한없이 너그러웠다가 한없이 사악해진다. 우리는 새삼스레 신체가 가지는 순기능적 제약을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닐까? 목적없는 즉시성 속에서 그들은 또 내일의 가면무도회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문화로

아주 먼 옛날로 돌아가보자. 창과 방패의 난무 속에서 사회가 그리고 문화가 그 틀을 잡아가던 시절로 돌아가보자. 그 당시에도 이미 사회가 조장하는 문화적 허구성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이상적인 나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매듭을 지어 그것을 계산에 사용하도록 하고, 그 먹는 것을 달콤하게 하며, 그 입는 것을 아름답게하며, 그 거주하는 것을 편안하게 하며, 그 풍속을 즐기도록 하여, 이웃나라가 서로 보이고, 닭과 개우는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오가는 법이 없다." (使人復結繩而用之, 甘其食, 美其服, 安其居, 樂其俗, 國相望, 犬之聲相聞, 民至老死, 不相往來 (老子 道德經 王弼本 第 80 小國寡民章))

문화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가까이, 너무도 가까이 있어 미처 눈치채지 못하는 그런 것이다. 이미 내 속에 충분하고도 튼튼한 문화의 토양이 있는데 어디로 눈길을 돌리는가? 글로벌 문화란 것인 무엇인가? 내가 알게 모르게 몸에 배어 행동하고 있는 것이 알고 보니 전 세계의 다른 사람들도 하고 있는 바로 그런 것 아닌가?

사이버 공간은 두 개의 극단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완전한 고립과 완전한 연결이 그것이다. 정신이라는 '미세한 알갱이'는 이 두 극단을 천정부지로 돌아다닐 것이다. 그만큼 환상과 현혹의 가능성도 커진다. 우리는 이웃의 개짓는 소리에 귀막고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냥 그 소리를 따라 다닐 수도 없다. 다시 한번 중용(中庸)이 강조되는 때이다. 소비하는 문화가 아닌 참여하는 문화가 그 중용의 길을 위한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한번 더 말하지만 더 이상 지구는 둥글지 않다. 곧장 앞으로 나아간다고 해도, 제자리로 다시 돌아올 보장이 없다.

 

(1) 박형준 외, {21세기 프론티어}, 길벗, p.222
(2) 마크 슬로카 지음, 김인환 옮김, {사이버스페이스 전쟁}, 한국경제신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