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인간 그리고 정보화 사회


1

과학과 관련하여 우선 떠오르는 두 속담이 있는데 그것은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와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다. 이 두 속담은 짐작하고 있듯이 과학에 대한 모종의 부정적 태도를 함축하고 있다. 이글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바로 이러한 부정적 측면에 가까운 것이다. 물론 나도 과학의 긍정적 측면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또한 과학의 방법이나 성과에 대해 그 어느 것보다도 큰 신뢰를 보내고 있다. 그렇지만 내가 제기하고 싶은 것은 '그 어느 것보다도 신뢰하지만 전적으로 신뢰할만한 것은 아니다'는 점이다.

2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라는 비유는 생각하면 할수록 그것의 넓은 해석 가능성에 감탄을 하게 된다. 우리는 코끼리를 만지면서도 그것을 코끼리라고 알지 못하는 장님의 좁은 소견을 비난한다. 그렇지만 처지를 바꾸어 만약 우리가 장님의 처지라면 어떨까? 이 속담은 시각이 촉각보다 훨씬 우월한 인식도구라는 너무도 자명한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한다. 하지만 이 우월한 시각조차도 한계를 가진 인식능력이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 우리가 눈으로 보고서 알아낸 그 코끼리가 실제로는 코끼리가 아니라면? 누군가가 나타나 눈에 빤히 보이는 그 코끼리를 코끼리가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미친 놈 취급을 하든가 아니면 자신의 거대한 확신의 한 귀퉁이가 무너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데까르트에 의해 물질이 합목적성 또는 신 또는 정신의 시집살이로부터 분가(分家)되면서 과학의 시대는 그 서막이 올랐다. 분가의 시도는 이미 고대 원자론 같은데서도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물질이 자기 나름의 독자적인 세계를 확보한 실질적인 분가를 이룩한 것은 데까르트로 대표되는 근세 이후였다. 우리는 이 분가가 가지는 특별한 의미를 놓쳐서는 안된다. 이 분가는 곧 인과적이고 기계적인 물리세계, 즉 맹목의 세계가 하나의 의미있는 세계로 우리 가운데 자리 잡았음을 의미한다. 종전까지는 인간 중심의 어떤 합목적성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 세계는 결코 참된 세계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세계에 대한 이러한 탈인간화가 뜻하지 않은 결과를 낳기 시작했다. 물리적 세계를 다루기 위한 경험중심의 새로운 인식론은 자연을 정복하기 위한 칼을 인간의 손에 쥐어주었다. 우리의 참된 인식은 맹목적인 물리 세계에 대해서나 가능할 뿐이라는 자기 겸양을 통해 인간은 역사상 그 어느 것보다도 탁월한 자연 통제의 무기를 획득한 것이다. 불과 400여년 만에 과학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인식의 폭을 급속도로 넓혀왔으며 또 완전한 앎의 미래를 약속하는 것만 같다. 의인화된 물활론(物活論)적 세계관에 기반하고 있는 신화, 전설, 주술, 신학은 이제 그 지적 오만함으로 인해 오늘날 우리의 몰락한 시어머니를 연상시킨다.

3

이제 '선무당' 이야기를 할 때가 된 것 같다. 우리의 역사에서 무당은 하늘(진리)과 인간을 매개하는 자이며 또한 하늘을 대신해서 인간에게 닥친 고통과 슬픔을 치유하는 자이다. 하지만 무당은 과학과의 결투에서 참패를 하고 이제는 무지몽매한 이의 의지처로 또는 재미거리로 전락해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를 이제는 과학에 종사하는 이들이 차지하고 있다.
과학을 통해 우리는 하늘을 만나고 과학을 통해 우리는 자연을 컨트롤 즉 우리 수중에 둘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과학에서 무당이 했던 역할을 찾는다. 그렇다면 과학은 과연 능숙한 무당일까? 아니 과학은 과연 능숙한 무당일 수 있을까?
앞에서 짐작했겠지만 과학은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과학은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인간중심적인 사고의 탈피로부터 시작되었다. 즉 과학은 인간 정신이라는 너무도 미세한 알갱이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앎을 포기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집나간 며느리가 태생적 한계를 잊어버리고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그러나 상황은 나갈때와는 전혀 딴 판이다. 이제는 시어머니가 오히려 시집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물질적 세계에서 발휘했던 능숙한 손놀림으로 과학은 이제 우리 인간의 정신 현상을 인과의 잣대로 마구 난도질하려 한다. 신내림을 받은 무당처럼 과학의 굿거리는 현란하기만 하다.
바로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장님이 자신이 눈멀었음을 잊어버렸다고 생각해보라.... 게다가 또하나 간과해서는 안되는 점은 자연과는 달리 사람에게는 '돌이킬 수 없다'라는 말이 적용된다는 점이다. 즉 과학이 자연을 잘못 다룬다고 해서 자연을 잡는 일은 없지만 사람은 잘못 다루면 선무당이 사람 잡듯 사람을 잡게 된다.(요즘의 심각한 환경 문제를 생각한다면 자연까지도 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당사자에게는 사망율이 1%니 0.1%니 하는 말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에게는 100%인 것이다. 일기예보에서 비가 올 확율이 30%니 60%니 하지만 그 결과는 비가 오든가 비가 오지 않든가 둘 중에 하나인 것이다. 우리는 과학의 선무당식 사람잡기를 이미 많이 보아왔다. DDT로 이를 잡았으며, 맹장을 마구 잘랐으며, 물고기는 살지 않지만 과학적으로는 안전한 수질 환경에서, 과학적으로 안전한 회색 하늘 아래서 우리는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

4

이제 우리 인류는 과학이 마련해 준 또하나의 거대한 실험실로 들어가고 있다. 정보화 시대라는 실험실이 그것이다. 이전의 실험이 끝나 그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우리는 또 다른 실험에 투입되고 있다.
2005년이라면 앞으로 10년 정도 남은 셈이다. 그러나 앞으로 10년은 이전 10년과는 비교가 안되는 세월일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 10년과 비교해 본다면 앞으로 10년은 어쩌면 우리가 지나간 세월을 여유있게 돌이켜 볼 수 있는 마지막 기간일런지도 모른다. 그만큼 우리는 급속히 정보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정보가 중요하지 않은 시대는 없었던 것 같다. 자연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자연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고 사회를 이루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다른 동료 인간들의 행동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정보를 많이 가지고 그것을 잘 활용하는 자가 역사의 주역이 된다는 점은 만고의 진리인 것 같다. 그렇다면 요즘 정보화시대라고 부르며 법석을 떠는 것은 새삼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일까? 가장 눈이 띄는 차이는 '정보효용가치 - 정보획득비용 =?'이라는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는 유용한 정보를 획득하기 위해서 사전에 막대한 인적 물적 투자가 있어야만 했다. 따라서 정보는 소수의 권력에 집중될 수 밖에 없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정보를 획득하기 위해서 들여야 될 비용이 얻어낼 수 있는 정보의 효용가치보다 더 컸으므로 정보라는 것이 별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초고속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은 이러한 상황을 역전시키고 있다. 즉 이제까지는 '정보효용가치 - 정보획득비용 < 0'인데 반해 이제는 '정보효용가치 - 정보획득비용 > 0'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유비쿼터스 컴퓨팅(ubiquitous computing)이 실현되는 시점이 되면 '정보획득비용'은 최소값에 이를 것이다. 그렇지만 이 시점이 '정보효용가치 - 정보획득비용'의 값이 최대가 되는 시점은 아닐 것 같다. 왜냐하면 '정보효용가치'는 단순기술로 획득되는 것도 단순 척도로 재어지는 것도 아닌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인 모든 요소를 고려해서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를 세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정보 획득 비용의 최소화이며 둘째는 정보 효용 가치의 최대화이고 셋째는 '정보효용가치 - 정보획득비용 > 0'인 사회가 우리 인간의 삶에 지니는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다. 우리에게는 이 세가지를 순차적으로 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정보화 사회로 진입하는 앞으로 10년은 아마 '정보획득비용'의 최소화 쪽에 많은 힘이 실리는 시기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 구석에서는 정보의 진정한 가치와 그것의 인간적 의미를 탐색하는 노력도 더불어 있어야 한다.
산업사회의 주요한 성공이 인간의 물리적 환경의 개조와 창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면 정보화 사회는 인간의 정신적 환경의 개조와 창조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하겠다. 초고속 멀티미디어 환경은 주로 인간의 정신, 문화, 사회적 시공간 환경의 급속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나와 세계의 거리가 내 손과 키보드의 거리이며, 정보 창조자와 정보 소비자의 구별이 없어질 정보화 시대는 커뮤니케이션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보이고 있다. 하지만 과학이 열어보이는 이러한 무한한 가능성이 무한한 현실성으로 되기까지는 과학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많은 인간적 장애가 가로놓여 있다.
돌과 나무와 같은 자연물에서 콘크리트나 아스팔트와 같은 인공물을 거쳐 인간은 이제 오직 인간에 의해 그리고 인간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사이버사회(Cybersociety)를 자신의 주요한 삶의 환경으로 꾸며가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무지한 이상 자신이 만든 사이버사회도 우리 인간에게 낯선 것일 수 밖에 없다. 사이버 사회를 인간의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면 인간이 사이버사회의 것이 되느냐는 우리 인간이 자기 자신과의 힘겨운 대화를 얼마나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